발로 뛰는 영사상’ 수상 이원우 주러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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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3-05 22:34조회3,1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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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이 낳은 결과가 최대의 보상이었죠"
글로벌 시대. 국경은 지도위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이에 따라 ‘노마드(nomad, 유목민·방랑자라는 뜻)’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흩어지다의 뜻)’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민족간 국가 간 탈영토화는 점차 확대돼 가고 있다. 이같은 탈영토화 시대에 주재국 내의 자국민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대사관은 가족 구성원으로 비유한다면 ‘부(父)’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됨에 따라 세계 곳곳서 활동하는 한인들의 위상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산업경쟁력을 갖추고 있고 G20정상회의를 유치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재외동포들의 활동 무대가 점차 넓어지고 집단화되면서 교민사회 내부적으로는 반목과 갈등이 현존하고 외부적으로는 한인들이 외국인들에 ‘공공의 적’이 되는 등 교민사회 주변에는 위험 요소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교민 곁에서 불철주야, 물신양면으로 발 벗고 뛰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영사’다. ‘발로 뛰는 영사상’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2012년에는 모스크바 이원우 주러 총영사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월 27일 주러 한국대사관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집무실은 정갈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는 일반 공직자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대개 공무원 간부라 하면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한 인상을 먼저 떠올린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사내가 결재서류를 무성의하게 훑어본 후 만년필로 서명을 하는 모습이 아마도 대중들이 생각하는 공직 간부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인상은 앞서 설명한 공직자의 이미지에서 전면 배치됐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연신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의 눈매는 봄날의 기운을 함북 받으며 새순을 틔우는 자작나무 같은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다. 그가 풀어놓는 외교 현장에서의 일화는 2시간 이상 계속됐다.
유원(幽遠)하고 고고(高古)하고 담박(澹泊)했다. 질문할 틈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수상 소감을 물었다. 그는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의미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지요.
저는 제 자신에게 있어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소임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는 한사코 상을 사양했다. 지난해에도 몇 차례 후보자로 거론됐지만 그때마다 그는 부하 직원들을 추천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고 그 결과를 보람으로 여기는 게 자신에게 있어 ‘최대의 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윤호 전 주러 대사와의 인연으로 모스크바에 총영사로 부임했다. 주러 대한민국 대사관은 그가 부임한 4번째 공관이다. 91년 한러(당시 소련) 수교 이후 첫해에 그는 연수생 1기로 러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그때 익힌 러시아어 덕분에 탁월한 어학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됐고 블라디보스톡에 영사관이 개설되고 첫 영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진가가 발휘됐다.
이후 미국 대사관을 거쳐 영국 등에서 총영사직을 역임하며 다년 간 쌓은 외교 노하우로 정무와 경제중심의 '하드파워'와 문화와 소통 중심의 '소프트파워'를 두루 갖춘 외교관으로서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 블라디보스톡 영사 업무를 맡고 있을 때 그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목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 선교사 추방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선교사 한명이 경찰 소령을 울리면서 비롯됐다. 경찰국은 뒤집혔고 자치구내 한국 선교사 전원 귀국령이 떨어졌다. 다년 간 쌓은 러시아어 실력과 영사 업무로 여러번 만나면서 친교를 맺은 경찰국 간부들 덕분에 사건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목사만 3개월 간 입국 불허 조치를 당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밖에도 그는 벌목공으로 일하는 탈북자들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하기도 했다.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영국 교민들의 30년 숙원사업이었던 한인종합회관 건립에 일조했다. 특히 한인회장 선거를 두고 주영한인회가 파행과 더불어 소송에 휘말렸을 당시 이를 중재하면서 분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난타 팀이 영국 공연을 왔을 때 비자 문제로 입국을 불허 당한 적이 있었어요. 영국이 입국 절차가 무척 까다롭죠. 이미 업질러진 물이었고 누구가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두들 망연자실했었죠" 당시 이 총영사는 기지를 발휘해 영국 관할 당국과 기적적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팀원들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공연을 기획했던 사장은 그의 앞에서 30여 분간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팀원들을 구사일생 구출해 성공적인 영국 공연으로 이끈 것은 영사로서의 자긍심과 보람을 되새기는 값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지나간 시간을 숨고르기 하듯 해외 일선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는 재차 ‘우공’이 산을 옮기듯 한인 한 분 한 분의 숙원 결실을 맺어 꽃을 피운 것과 진배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모스크바 한국학교’를 염두한 듯 했다. 모스크바 한국학교는 오랜 더부살이를 마치고 건물을 인수 새 보금자리를 찾게 됐다. 이원우 총영사를 비롯해 부처 직원, 문진철 교장과 학부모, 학생들의 염원이 현실화된 것이다.
가는 곳마다 굵직한 현안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그는 위기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낙관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아직도 한국학교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세계적으로 30여개의 한국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그나마 대부분은 교육 여건이 좋지 않은 후진국에 상당히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경우 여타 한국학교와는 다른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 여건보다는 생활 환경이 턱없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고공 행진하는 물가와 이에 비례하는 건물 임차료 때문에 관련 부처인 교과부 역시 모스크바 한국학교는 ‘계륵’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같은 곳은 학생 수가 1000명 이상 되는데도 임차료는 10만불 미만입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경우 100여 명의 학생이 취학하고 있지만 임차료는 그 열배가 넘어요.” 학생수 대비 턱없이 높은 건물 임차료도 문제지만 교육 관할 당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실상 폐쇄 위기에 처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간 편의를 봐줬던 1086 학교 측에서 퇴교 통보를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당장에 폐쇄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와 심문규 전 교육관은 그때부터 불철주야 건물 인수에 사활을 걸었다. 정부 소유로 구입을 결정하고 정부가 95% 예산을 지원, 5%는 기업의 후원은 이끌어 낸 상태였다. 학교 건물에 적합한 러시아 아동교육기관을 매입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정부 명의를 건물을 매입하는 것은 민간 차원을 넘어 몇 년에서 많게는 10년이 넘게 걸리는 정부 간 교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호주의 대 원칙하에 업무가 추진되기 때문에 우리 정부 측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없지만 러시아 관련 당국도 쉽게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설상가상이었다. 이원우 총영사는 어렵게 민간으로부터 건물 매입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고 정부 부처로부터 승인을 얻어낸 상태였지만 갑자기 교과부에서 건물 매입 전면 백지화를 통보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계약금은 둘째 치고 매도인은 소송을 걸겠다고 벼르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총영사와 심 전 교육관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건물 주인에게 2주의 시간을 얻었고 러시아 외교부 산하 관련 기관에 퇴교 위기에 처한 한국학교 상황을 설명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협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진심이 통했을까.
그간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관계자들이 입장을 선회했다. 러시아 교육부와 시청, 교육행정 업무를 맡고 있는 우뻬데까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정부 간 교섭의 제1원칙인 ‘상호주의’ 부분을 눈감아 준 것이다. 그 결과 교과부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건물 매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만 기적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며 “한국학교 건물 인수 문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업무가 시작되는 동시에 리모델링이 한창인 모스크바한국학교를 찾아가 꼼꼼이 작업 상황을 살핀다.
그의 바람은 교민들이 외국인학교가 아닌 ‘모스크바한국학교’에 자발적으로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학교의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한국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모교에 대한 긍지가 대단해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학교의 커리큘럼이나 강사진 등이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요. 학교의 퀄리티가 높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그는 교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면서 자녀들을 한국학교 진학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경쟁력을 갖추면 당연스레 교민 여러분들이 한국학교를 선택하리라 믿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교과부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중등 교육 과정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이원우 총영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길.
서설(瑞雪)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교민들과 교감하는 발로 뛰는 영사였다.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장대비가 퍼부어도,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 펼쳐져 있어도, 지열에 발바닥이 데일 것 같은 폭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교민들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리리라.
- 모스크바 한인회
글로벌 시대. 국경은 지도위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이에 따라 ‘노마드(nomad, 유목민·방랑자라는 뜻)’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흩어지다의 뜻)’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민족간 국가 간 탈영토화는 점차 확대돼 가고 있다. 이같은 탈영토화 시대에 주재국 내의 자국민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대사관은 가족 구성원으로 비유한다면 ‘부(父)’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됨에 따라 세계 곳곳서 활동하는 한인들의 위상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산업경쟁력을 갖추고 있고 G20정상회의를 유치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재외동포들의 활동 무대가 점차 넓어지고 집단화되면서 교민사회 내부적으로는 반목과 갈등이 현존하고 외부적으로는 한인들이 외국인들에 ‘공공의 적’이 되는 등 교민사회 주변에는 위험 요소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교민 곁에서 불철주야, 물신양면으로 발 벗고 뛰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영사’다. ‘발로 뛰는 영사상’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2012년에는 모스크바 이원우 주러 총영사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월 27일 주러 한국대사관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집무실은 정갈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는 일반 공직자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대개 공무원 간부라 하면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한 인상을 먼저 떠올린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사내가 결재서류를 무성의하게 훑어본 후 만년필로 서명을 하는 모습이 아마도 대중들이 생각하는 공직 간부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인상은 앞서 설명한 공직자의 이미지에서 전면 배치됐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연신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의 눈매는 봄날의 기운을 함북 받으며 새순을 틔우는 자작나무 같은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다. 그가 풀어놓는 외교 현장에서의 일화는 2시간 이상 계속됐다.
유원(幽遠)하고 고고(高古)하고 담박(澹泊)했다. 질문할 틈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수상 소감을 물었다. 그는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의미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지요.
저는 제 자신에게 있어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소임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는 한사코 상을 사양했다. 지난해에도 몇 차례 후보자로 거론됐지만 그때마다 그는 부하 직원들을 추천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고 그 결과를 보람으로 여기는 게 자신에게 있어 ‘최대의 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윤호 전 주러 대사와의 인연으로 모스크바에 총영사로 부임했다. 주러 대한민국 대사관은 그가 부임한 4번째 공관이다. 91년 한러(당시 소련) 수교 이후 첫해에 그는 연수생 1기로 러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그때 익힌 러시아어 덕분에 탁월한 어학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됐고 블라디보스톡에 영사관이 개설되고 첫 영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진가가 발휘됐다.
이후 미국 대사관을 거쳐 영국 등에서 총영사직을 역임하며 다년 간 쌓은 외교 노하우로 정무와 경제중심의 '하드파워'와 문화와 소통 중심의 '소프트파워'를 두루 갖춘 외교관으로서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 블라디보스톡 영사 업무를 맡고 있을 때 그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목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 선교사 추방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선교사 한명이 경찰 소령을 울리면서 비롯됐다. 경찰국은 뒤집혔고 자치구내 한국 선교사 전원 귀국령이 떨어졌다. 다년 간 쌓은 러시아어 실력과 영사 업무로 여러번 만나면서 친교를 맺은 경찰국 간부들 덕분에 사건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목사만 3개월 간 입국 불허 조치를 당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밖에도 그는 벌목공으로 일하는 탈북자들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하기도 했다.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영국 교민들의 30년 숙원사업이었던 한인종합회관 건립에 일조했다. 특히 한인회장 선거를 두고 주영한인회가 파행과 더불어 소송에 휘말렸을 당시 이를 중재하면서 분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난타 팀이 영국 공연을 왔을 때 비자 문제로 입국을 불허 당한 적이 있었어요. 영국이 입국 절차가 무척 까다롭죠. 이미 업질러진 물이었고 누구가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두들 망연자실했었죠" 당시 이 총영사는 기지를 발휘해 영국 관할 당국과 기적적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팀원들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공연을 기획했던 사장은 그의 앞에서 30여 분간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팀원들을 구사일생 구출해 성공적인 영국 공연으로 이끈 것은 영사로서의 자긍심과 보람을 되새기는 값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지나간 시간을 숨고르기 하듯 해외 일선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는 재차 ‘우공’이 산을 옮기듯 한인 한 분 한 분의 숙원 결실을 맺어 꽃을 피운 것과 진배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모스크바 한국학교’를 염두한 듯 했다. 모스크바 한국학교는 오랜 더부살이를 마치고 건물을 인수 새 보금자리를 찾게 됐다. 이원우 총영사를 비롯해 부처 직원, 문진철 교장과 학부모, 학생들의 염원이 현실화된 것이다.
가는 곳마다 굵직한 현안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그는 위기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낙관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아직도 한국학교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세계적으로 30여개의 한국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그나마 대부분은 교육 여건이 좋지 않은 후진국에 상당히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경우 여타 한국학교와는 다른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 여건보다는 생활 환경이 턱없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고공 행진하는 물가와 이에 비례하는 건물 임차료 때문에 관련 부처인 교과부 역시 모스크바 한국학교는 ‘계륵’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같은 곳은 학생 수가 1000명 이상 되는데도 임차료는 10만불 미만입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경우 100여 명의 학생이 취학하고 있지만 임차료는 그 열배가 넘어요.” 학생수 대비 턱없이 높은 건물 임차료도 문제지만 교육 관할 당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실상 폐쇄 위기에 처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간 편의를 봐줬던 1086 학교 측에서 퇴교 통보를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당장에 폐쇄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와 심문규 전 교육관은 그때부터 불철주야 건물 인수에 사활을 걸었다. 정부 소유로 구입을 결정하고 정부가 95% 예산을 지원, 5%는 기업의 후원은 이끌어 낸 상태였다. 학교 건물에 적합한 러시아 아동교육기관을 매입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정부 명의를 건물을 매입하는 것은 민간 차원을 넘어 몇 년에서 많게는 10년이 넘게 걸리는 정부 간 교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호주의 대 원칙하에 업무가 추진되기 때문에 우리 정부 측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없지만 러시아 관련 당국도 쉽게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설상가상이었다. 이원우 총영사는 어렵게 민간으로부터 건물 매입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고 정부 부처로부터 승인을 얻어낸 상태였지만 갑자기 교과부에서 건물 매입 전면 백지화를 통보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계약금은 둘째 치고 매도인은 소송을 걸겠다고 벼르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총영사와 심 전 교육관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건물 주인에게 2주의 시간을 얻었고 러시아 외교부 산하 관련 기관에 퇴교 위기에 처한 한국학교 상황을 설명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협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진심이 통했을까.
그간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관계자들이 입장을 선회했다. 러시아 교육부와 시청, 교육행정 업무를 맡고 있는 우뻬데까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정부 간 교섭의 제1원칙인 ‘상호주의’ 부분을 눈감아 준 것이다. 그 결과 교과부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건물 매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만 기적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며 “한국학교 건물 인수 문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업무가 시작되는 동시에 리모델링이 한창인 모스크바한국학교를 찾아가 꼼꼼이 작업 상황을 살핀다.
그의 바람은 교민들이 외국인학교가 아닌 ‘모스크바한국학교’에 자발적으로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학교의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한국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모교에 대한 긍지가 대단해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학교의 커리큘럼이나 강사진 등이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요. 학교의 퀄리티가 높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그는 교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면서 자녀들을 한국학교 진학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경쟁력을 갖추면 당연스레 교민 여러분들이 한국학교를 선택하리라 믿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교과부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중등 교육 과정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이원우 총영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길.
서설(瑞雪)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교민들과 교감하는 발로 뛰는 영사였다.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장대비가 퍼부어도,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 펼쳐져 있어도, 지열에 발바닥이 데일 것 같은 폭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교민들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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