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 6차 문학기행 -빠스쩨르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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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2-13 23:09조회2,4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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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닥터지바고’는 러시아의 광활한 자연, 그 자연 속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서구적 낭만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국경을 막론하고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러시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스크바 한인회(회장 김원일)은 2월 2일 제6차 러시아 문학기행을 개최하고 모스크바 근교 페레델키노에 소재한 ‘닥터지바고’의 작가-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생가와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이자 아동문학가인 니콜라이 추코프스키 생가를 방문했다. 이번 행사는 첫 번째 행사였던 톨스토이 생가가 있는 ‘야스나야 뽈리나’를 방문한 이후 참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진행됐으며 20명의 한인들이 참가했다.
특히 3박4일간 모스크바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석 차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인도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는 참가자들의 설렘을 얼리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2팀으로 나뉘어 니콜라이 추코프스키 박물관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생가를 들렀다. 추코프스키는 파스테르나크에 비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유는 아마도 한국의 러시아 문학 번역이 청소년들과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유아 교육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러시아에서 추코프스키의 아동 문학은 책을 읽기 시작하는 러시아 아이들에게 있어 교사의 역할을 대신해 줄만큼 명성이 높다.
그의 생가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품들과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아동들에게 동심을 심어준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어 준 그의 서재에서 참가자들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파스테르나크 생가.
파스체르나크의 집은 지바고가 라라와 함께 몇 날을 같이 보내는 바리키노의 집을 닮았었다. "역사에 저항한 시인"으로 새롭게 지칭되고 있는 파스테르나크의 생가는 개장 이래 무려 30여만명이 다녀갈만큼 소련 문학의 새로운 성소가 돼고 있다고 했다. ‘노벨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조국을 떠나지 않겠’던 파스테르나크의 고뇌가 집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소련당국은 물론 작가동맹등 동료 문인들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게된 파스테르나크가 그의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진 1958년10월 흐루시초프에 편지를 보내 노벨상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과 집"을 보호해 줄것을 탄원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같은 탄원에도 불구, 문학재단과 작가동맹은 1960년 파스테르나크가 죽고 난 이후 그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고자 진력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생가는 집기가 부숴지는등 수난을 겪어야만했다. 파스테르나크의 며느리 나탈리아에 의해 현재 관리되고 있는 그의 생가 겸 기념관에는 그가 임종한 침대, 그리고 방문객들의 접근을 사양했던 서재 등이 당시 모습대로 보존돼 있었다.
모스크바 한인회(회장 김원일)은 2월 2일 제6차 러시아 문학기행을 개최하고 모스크바 근교 페레델키노에 소재한 ‘닥터지바고’의 작가-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생가와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이자 아동문학가인 니콜라이 추코프스키 생가를 방문했다. 이번 행사는 첫 번째 행사였던 톨스토이 생가가 있는 ‘야스나야 뽈리나’를 방문한 이후 참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진행됐으며 20명의 한인들이 참가했다.
특히 3박4일간 모스크바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석 차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인도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는 참가자들의 설렘을 얼리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2팀으로 나뉘어 니콜라이 추코프스키 박물관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생가를 들렀다. 추코프스키는 파스테르나크에 비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유는 아마도 한국의 러시아 문학 번역이 청소년들과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유아 교육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러시아에서 추코프스키의 아동 문학은 책을 읽기 시작하는 러시아 아이들에게 있어 교사의 역할을 대신해 줄만큼 명성이 높다.
그의 생가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품들과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아동들에게 동심을 심어준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어 준 그의 서재에서 참가자들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파스테르나크 생가.
파스체르나크의 집은 지바고가 라라와 함께 몇 날을 같이 보내는 바리키노의 집을 닮았었다. "역사에 저항한 시인"으로 새롭게 지칭되고 있는 파스테르나크의 생가는 개장 이래 무려 30여만명이 다녀갈만큼 소련 문학의 새로운 성소가 돼고 있다고 했다. ‘노벨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조국을 떠나지 않겠’던 파스테르나크의 고뇌가 집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소련당국은 물론 작가동맹등 동료 문인들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게된 파스테르나크가 그의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진 1958년10월 흐루시초프에 편지를 보내 노벨상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과 집"을 보호해 줄것을 탄원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같은 탄원에도 불구, 문학재단과 작가동맹은 1960년 파스테르나크가 죽고 난 이후 그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고자 진력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생가는 집기가 부숴지는등 수난을 겪어야만했다. 파스테르나크의 며느리 나탈리아에 의해 현재 관리되고 있는 그의 생가 겸 기념관에는 그가 임종한 침대, 그리고 방문객들의 접근을 사양했던 서재 등이 당시 모습대로 보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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