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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빈 기자]
▲ 중동판 환단고기 2편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거부했던 이유
ⓒ 정환빈
지난 글에서 밸포어 선언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게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오리지널골드몽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게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대체 어떻게 건국될 수 있었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발상에서 환단고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영국은 이스라엘 건국에 크게 기여했고, 그 시작은 밸포어 선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약속한 '민족의 고향(nati 오리지널골드몽 onal home)'이 유대 '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은 축약되거나 생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간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벨포어 선언 발표 후 변화된 것
밸포어 선언이 발표된 1917년은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된 지 한 세대가 넘게 지난 후였다. 그런데도 전 세계 1천만이 넘는 유대 인구 중 릴게임5만 시온주의자 기구에 가입한 회원(연회비 1프랑)은 1913년 기준 약 13만 명에 불과했다. 연관 단체에 소속된 유대인을 포함하더라도 수십만 명을 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었다.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를 비롯해 많은 유대인은 시온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1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으 바다신릴게임 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된 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에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나 유대 국가 재건은 오직 메시아가 도래한 이후에 일어날 이상향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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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로니아 탈무드 (Ketubot 111a)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 Eretz Yisrael)으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가 나온다.
ⓒ Sefaria Library
자연히 유대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유럽 땅을 고향으로 여기며 오래도록 살아왔다. 근대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했을 때 이들은 유대 민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같은 유럽인으로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 민족 국가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시온주의가 유대교 금기를 범했다는 종교적 반감까지 더해졌으니, 거센 반발로 이어진 것이다.
일부 유대인들은 식민주의적 행태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시온주의가 시작된 1880년대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이 2만 명밖에 없었다. 반면, 아랍인은 약 50만 명이 살았다. 유럽인들로부터 박해를 피하려 아랍인의 땅을 빼앗아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게 정당하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토지를 사더라도) 아랍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대인들은 아랍인들 사이에서 외지인이 되기를 원하나, 아니면 아랍인들을 유대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외지인으로 만들길 원하나? ... 아랍인들은 정확히 우리와 같은 역사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협잡과 타락한 외교술로 국제적 약탈자들[열강]의 보호를 받아 자리를 잡는다면, 평화로운 아랍인들은 권리를 수호하러 나설 것이고 당신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Chto delat evreiam vRossii," Vestnik narodnoi voli no. 5 (1886))
1897년에 시온주의자들이 민족의 고향이라는 위장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고 유대인들을 속이기로 결심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20년 뒤 영국이 밸포어 선언으로 민족의 고향을 약속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였다. 영국은 프랑스를 제치고 팔레스타인을 독차지할 명분이 필요했다. 유대 국가는 애당초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유대인들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명분으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민족의 고향은 어떻게 유대 국가로 바뀌게 되었을까. 시온주의자들과의 야합 덕분에 영국은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따냈다. 그러자 아랍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영국은 유대인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책임을 전가했다.
'유대인을 위해 민족의 고향을 세워야 하니, 독립은 불가하다.'
밸포어 선언의 역사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맥락을 모르는 이들에게 밸포어 선언은 강대국이 유대 국가 건설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유대인이 이주해 와서 안전을 보장받고 토지를 구매할 수 있는 법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으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에 낸 세금이 유대인에게 쓰이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밸포어 선언의 역사적 함의는 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 시온주의가 '유대 민족의 열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전 세계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온주의로 인해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잠재워주었다. 게다가, 극소수의 지지만을 받는 극단주의적 정치 집단이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하게 공인된 정치권력으로 급부상해 민족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었다.
밸포어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는 졸지에 70만 아랍인과 1천만 유대 '민족'이 권리를 다투는 문제라는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전자는 수백~수천 년을 살아온 토착민이고, 후자는 태반이 팔레스타인에 발 한 번 디뎌본 적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2천 년 동안 유럽 등지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믿어졌다. 그런데도 무게추는 유대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1922년,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은 영국에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위임했다. 통치 목표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민족의 고향이 완성될 때까지 독립은 유보되고 강제 지배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언젠가 영국이 철수하게 된다면, 민족의 고향은 유대 국가로 전환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밸포어 선언 이후 갑자기 유대 국가를 지지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고향은 유대 인구를 늘리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비정치적인 목표로 선전되었고, 실제로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유대 국가가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 것은 오직 홀로코스트(1941-45) 이후의 일이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더 이상 유럽인들을 신뢰하기 어려웠고, 다른 나라로,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싶어 했다. 1947년에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조사위원회(UNSCOP)가 근거로 제시한 인터뷰를 보면 이렇다.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신청한 적이 있나요?
생존자 대답 : 아니요.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을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나요?
생존자 대답 : 나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에서 살 거라고 항상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깨달았죠. 팔레스타인 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요.
그런데 이렇게 민족의 고향에 대한 지지가 유대 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침묵 당한 중요한 진실이 있었다. 바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땅이 아니고, 안전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대다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100만 명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강렬히 저항한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위원회는 이 점을 지적하며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재고할지도 모른다고 기술했다.
왜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존재를 몰랐을까? 바로 팔레스타인은 '버려진 땅'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선전 때문이었다. 아랍인이 경작하던 농지를 유대인이 사면, 시온주의자들은 사막을 개간해 꽃을 피웠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까지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사막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1943년에 영토권 주장을 위해 남부 사막 지대에 수십에서 백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 3개를 세운 게 전부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56% 면적에서 유대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는 유대인의 소망보다는 서구 국가들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결정이었다. 표결 하루 전날,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보고서는 이 결정으로 "거의 확실하게"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국 내 유대 여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미국에서 시온주의 운동은 매우 강하다. 그러나 시온주의자 단체들이 모든 미국 유대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많은 시온주의자 단체들은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고향이란 목표를 지지하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독립 유대 국가 (건설)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 CIA 보고서(1947.11.28.)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유대 국가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 Public Domain
독자들은 이제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했다는 서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서사에서는 시온주의자들과 서구 국가들이 유대 여론을 왜곡해 민족 간 분쟁을 야기했다는, 이-팔 분쟁의 핵심 원인이 생략된다. 대신,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원해서 1차 대전 중에 영국에 거액의 자금을 융통하는 등 전공을 세웠고, 이스라엘은 그 정당한 보상이었다는 '시온주의 선전물'이 진실을 대체한다.
밸포어 선언 당시 시온주의자는 유대 사회에서 극소수였다는 점도, 유대교의 반발이 거셌다는 점도,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도 모두 확고하게 진실로 자리 잡은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런데도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외교부와 대다수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반복해서 생산하고 유통해 왔다. 왜 이토록 중대한 역사적 오류가 검증되지 못한 채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왔을까. 이제는 그 구조적 원인을 들여다볼 차례다.
▲ 중동판 환단고기 2편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거부했던 이유
ⓒ 정환빈
지난 글에서 밸포어 선언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게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오리지널골드몽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게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대체 어떻게 건국될 수 있었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발상에서 환단고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영국은 이스라엘 건국에 크게 기여했고, 그 시작은 밸포어 선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약속한 '민족의 고향(nati 오리지널골드몽 onal home)'이 유대 '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은 축약되거나 생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간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벨포어 선언 발표 후 변화된 것
밸포어 선언이 발표된 1917년은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된 지 한 세대가 넘게 지난 후였다. 그런데도 전 세계 1천만이 넘는 유대 인구 중 릴게임5만 시온주의자 기구에 가입한 회원(연회비 1프랑)은 1913년 기준 약 13만 명에 불과했다. 연관 단체에 소속된 유대인을 포함하더라도 수십만 명을 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었다.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를 비롯해 많은 유대인은 시온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1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으 바다신릴게임 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된 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에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나 유대 국가 재건은 오직 메시아가 도래한 이후에 일어날 이상향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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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로니아 탈무드 (Ketubot 111a)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 Eretz Yisrael)으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가 나온다.
ⓒ Sefaria Library
자연히 유대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유럽 땅을 고향으로 여기며 오래도록 살아왔다. 근대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했을 때 이들은 유대 민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같은 유럽인으로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 민족 국가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시온주의가 유대교 금기를 범했다는 종교적 반감까지 더해졌으니, 거센 반발로 이어진 것이다.
일부 유대인들은 식민주의적 행태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시온주의가 시작된 1880년대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이 2만 명밖에 없었다. 반면, 아랍인은 약 50만 명이 살았다. 유럽인들로부터 박해를 피하려 아랍인의 땅을 빼앗아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게 정당하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토지를 사더라도) 아랍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대인들은 아랍인들 사이에서 외지인이 되기를 원하나, 아니면 아랍인들을 유대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외지인으로 만들길 원하나? ... 아랍인들은 정확히 우리와 같은 역사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협잡과 타락한 외교술로 국제적 약탈자들[열강]의 보호를 받아 자리를 잡는다면, 평화로운 아랍인들은 권리를 수호하러 나설 것이고 당신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Chto delat evreiam vRossii," Vestnik narodnoi voli no. 5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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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민족의 고향은 어떻게 유대 국가로 바뀌게 되었을까. 시온주의자들과의 야합 덕분에 영국은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따냈다. 그러자 아랍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영국은 유대인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책임을 전가했다.
'유대인을 위해 민족의 고향을 세워야 하니, 독립은 불가하다.'
밸포어 선언의 역사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맥락을 모르는 이들에게 밸포어 선언은 강대국이 유대 국가 건설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유대인이 이주해 와서 안전을 보장받고 토지를 구매할 수 있는 법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으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에 낸 세금이 유대인에게 쓰이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밸포어 선언의 역사적 함의는 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 시온주의가 '유대 민족의 열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전 세계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온주의로 인해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잠재워주었다. 게다가, 극소수의 지지만을 받는 극단주의적 정치 집단이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하게 공인된 정치권력으로 급부상해 민족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었다.
밸포어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는 졸지에 70만 아랍인과 1천만 유대 '민족'이 권리를 다투는 문제라는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전자는 수백~수천 년을 살아온 토착민이고, 후자는 태반이 팔레스타인에 발 한 번 디뎌본 적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2천 년 동안 유럽 등지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믿어졌다. 그런데도 무게추는 유대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1922년,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은 영국에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위임했다. 통치 목표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민족의 고향이 완성될 때까지 독립은 유보되고 강제 지배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언젠가 영국이 철수하게 된다면, 민족의 고향은 유대 국가로 전환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밸포어 선언 이후 갑자기 유대 국가를 지지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고향은 유대 인구를 늘리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비정치적인 목표로 선전되었고, 실제로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유대 국가가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 것은 오직 홀로코스트(1941-45) 이후의 일이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더 이상 유럽인들을 신뢰하기 어려웠고, 다른 나라로,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싶어 했다. 1947년에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조사위원회(UNSCOP)가 근거로 제시한 인터뷰를 보면 이렇다.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신청한 적이 있나요?
생존자 대답 : 아니요.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을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나요?
생존자 대답 : 나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에서 살 거라고 항상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깨달았죠. 팔레스타인 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요.
그런데 이렇게 민족의 고향에 대한 지지가 유대 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침묵 당한 중요한 진실이 있었다. 바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땅이 아니고, 안전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대다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100만 명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강렬히 저항한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위원회는 이 점을 지적하며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재고할지도 모른다고 기술했다.
왜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존재를 몰랐을까? 바로 팔레스타인은 '버려진 땅'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선전 때문이었다. 아랍인이 경작하던 농지를 유대인이 사면, 시온주의자들은 사막을 개간해 꽃을 피웠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까지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사막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1943년에 영토권 주장을 위해 남부 사막 지대에 수십에서 백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 3개를 세운 게 전부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56% 면적에서 유대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는 유대인의 소망보다는 서구 국가들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결정이었다. 표결 하루 전날,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보고서는 이 결정으로 "거의 확실하게"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국 내 유대 여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미국에서 시온주의 운동은 매우 강하다. 그러나 시온주의자 단체들이 모든 미국 유대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많은 시온주의자 단체들은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고향이란 목표를 지지하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독립 유대 국가 (건설)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 CIA 보고서(1947.11.28.)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유대 국가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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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이제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했다는 서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서사에서는 시온주의자들과 서구 국가들이 유대 여론을 왜곡해 민족 간 분쟁을 야기했다는, 이-팔 분쟁의 핵심 원인이 생략된다. 대신,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원해서 1차 대전 중에 영국에 거액의 자금을 융통하는 등 전공을 세웠고, 이스라엘은 그 정당한 보상이었다는 '시온주의 선전물'이 진실을 대체한다.
밸포어 선언 당시 시온주의자는 유대 사회에서 극소수였다는 점도, 유대교의 반발이 거셌다는 점도,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도 모두 확고하게 진실로 자리 잡은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런데도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외교부와 대다수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반복해서 생산하고 유통해 왔다. 왜 이토록 중대한 역사적 오류가 검증되지 못한 채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왔을까. 이제는 그 구조적 원인을 들여다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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