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릴리지로 사랑의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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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금호은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1-25 01:22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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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릴리지로 사랑의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들
조용한 고민, 목소리를 내다
30대 후반의 직장인 김성훈가명 씨는 몇 년 전부터 연인과의 관계에서 점점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바쁜 직장 생활과 스트레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겹치면서 성생활에서 기대만큼의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지속되었고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성훈 씨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자신감이 줄어들면서 연애 자체가 부담스러워지더라구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진 남성은 비단 성훈 씨뿐만이 아니다. 국내외 연구에 따르면 20~40대 남성 중 약 30가 조루증을 경험하며, 이로 인해 자존감 저하와 연인과의 관계 악화를 겪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남성이 혼자만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해결책을 찾다: 프릴리지Priligy의 등장
조루증 치료제 중 하나인 프릴리지Priligy, 성분명 다폭세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프릴리지는 세계 최초의 조루 치료제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활동을 조절하여 사정 시간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 보통 성관계 13시간 전에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으며, 1864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성관계 지속 시간이 2~3배 증가하는 결과를 보였다.
프릴리지를 복용한 경험이 있는 이정훈가명 씨는 처음엔 약을 먹는다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직접 사용해 보니 성생활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고, 파트너와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감이 생기니까 성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어요라고 덧붙였다.
프릴리지의 효과와 주의점
프릴리지는 조루증을 개선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모든 약이 그렇듯 사용 시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전문가들은 프릴리지를 복용하기 전에 반드시 의사와 상담해야 하며, 하루에 한 번 이상 복용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또한, 어지러움, 메스꺼움, 두통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첫 복용 시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비뇨기과 전문의 최현우 박사는 프릴리지는 단순히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별로 적절한 복용법이 다를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 후 사용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남성의 성 건강,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다
과거에는 남성의 성 기능 문제를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적 해결책을 찾고, 이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성 기능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행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도 성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루증과 같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성훈 씨 역시 예전 같았으면 그냥 혼자 고민하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라며, 성 건강을 챙기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중요한 과정임을 강조했다.
프릴리지와 같은 치료제는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단순히 성 기능 개선을 넘어 남성들의 자신감 회복과 심리적 안정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 건강에 대해 숨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한 시대다. 프릴리지로 인해 새로운 자신감을 되찾은 남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지금, 더 많은 이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기자 admin@slotnara.info
서아프리카 나라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의 전 대통령 토마 상카라는 아프리카 대륙의 '체 게바라'라고 불린다. 1983년 민중 봉기와 함께 쿠데타로 권력을 획득한 그는 명확한 반제국주의 노선과 범아프리카주의, 강력한 부패 척결과 사회주의 개혁, 여성 해방 등을 이끈 혁명가였다.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나, 당대 민중의 삶을 개혁해 내고 식민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한 그의 모습은 부르키나파소 민중들에겐 정치적 향수로 남아 있다. 가장 특징적인 건 검소함이다. 그는 당시 상층 계급이었던 공무원과 군인 등의 사익 추구 행위와 사치스러운 문화를 자 바다이야기하는법 주 비판했다. 집권 직후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공무원 급여를 삭감했고, 자신에겐 월급여 450달러를 책정했다. 관용차 메르세데스-벤츠를 모두 매각하고 가장 저렴한 르노 5로 바꿨고, 해외 출장 시 일등석 항공권 사용을 금지했다. 그의 사후 재산은 자동차 한 대, 자전거와 오토바이 몇 대, 그리고 냉장고 정도였다.
당시 부르키나파소는 릴게임몰메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인구의 90% 이상이 문맹으로, 교육은 상층 계급만 받았다. 인구 5만 명 당 의사 수는 1명 꼴로 의료 인프라는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영아 1000명 당 280명가량이 5세 이전 숨졌고,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다. 1896년부터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수도에조차 포장도로가 없을 정도로 국가 인프라는 전무했다. 쌀, 10원야마토게임 밀 등 기본 식료품도 프랑스에서 수입했고, 재정은 외채에 의존해 예산 상당부분이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
그의 집권기 4년 간 문해율은 13%에서 73%로 올랐다. 집권 몇 주 만에 국내 250만 명 아동들에게 예방접종을 전면 실시하며 공중 보건의 질을 끌어올렸고, 수백 명의 청소년을 쿠바에 보내 의사와 엔지니어로 양성했다. 토지를 재분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배해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해 식량 자급 목표를 달성했다. 군 창고를 국영 슈퍼마켓으로 바꿔 모든 시민이 이용하게 했다. 식민주의 잔재인 '오트볼타'란 국가 이름을 '정의롭고 정직한 이들의 땅'이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로 바꿨다.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이들의 경제활동을 장려하며 할례, 강제결혼 등 성차별 관습을 법으로 금지했다 바다이야기온라인 .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경호대도 따로 뒀다.
왜 다른 나라 대통령처럼 거리에 초상화 하나 걸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토마 상카라는 700만 명(당시 인구)이나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널리 회자하는 그의 말이다. 웅변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체 게바라 20주년 기념 연설을 하며 "혁명가 개인은 죽일 수 있어도, 사상을 죽일 수 없다"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는 사살됐다. 쿠데타 세력은 상카라 정책을 모두 뒤엎으며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외채를 끌어들였고, 27년 간 집권했다.
웅변가이자 혁명가인 토마 상카라의 말 모음집이 출간됐다. 출판사 진지가 지난해 11월 펴낸 <상카라 1983-1987: 검은 대륙 혁명의 목소리>다. 상카라를 다룬 국내 유일 도서다. 상카라가 집권했던 1983년부터 사망한 1987년까지 4년 간의 주요 발언문 25편과 인터뷰 5편이 실렸다. 원서는 이다.
ⓒ진지"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1/24/pressian/20260124120037686gxvj.png" data-org-width="458" dmcf-mid="0Cr4J2pXHY"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4/pressian/20260124120037686gxvj.png" width="658">
▲도서 <상카라 1983-1987 : 검은 대륙 혁명의 목소리> ⓒ진지
"유엔의 쥐새끼가 되는 걸 피해야 한다"
그를 세상에 알린 무대 중 하나는 1984년 10월 유엔(UN) 총회 연설이다. 그는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대신해 말한다"며 고통받는 이들을 읊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이유로 게토에 갇혀 동물에 불과한 생활을 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 "남성이 강요하는 착취 시스템에서 고통받는 전 세계 여성들", "아이를 구할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말라리아나 설사병으로 죽는 아이를 지켜보는 빈곤층 어머니", "부자를 위한 가게에 쌓인 풍요로움을 슬며시 훔쳐보는 배고픈 아이" 등을 호명했다.
팔레스타인부터 라틴아메리카까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남반구 국가 민중들도 불렀다. 그는 "비인간적인 한 인류가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며 UN이 이스라엘의 회원권을 정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형제 살해와 자살 전쟁 가운데 죽어가는 이란과 이라크 형제 병사들 곁에 있고자 하며, 항구가 지뢰밭이 되고 마을이 폭격당해도 용기와 냉철함으로 자기 운명에 맞서는 니카라과 동지들과도 함께 한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사람, 아일랜드,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등 분쟁을 겪은 나라도 빠짐없이 읊었다.
그는 UN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귀국 후 진행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유엔 복도의 쥐새끼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각국의 정치 엘리트들을 우회로 비판했다.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를 이론가들끼리 일종의 무균실에서 벌이는 스파링 경기로 축소하고 묵인하는 국제적 공모에 급격히 빠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곳 사람들을 보면 진지하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들과 함께 있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부채 안 갚겠다" 부채 탕감 아프리카 연대 역설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우리를 식민지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국가와 경제를 운영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를 금융가들, 즉 그들의 형제와 사촌들에게 빚을 지도록 만든 건 바로 식민주의자들입니다. 이 부채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 탕감은 그의 유명한 목표였다. 그는 연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채를 갚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식민 지배로 원자재 추출, 단일작물 재배, 저임금 노동 등의 왜곡된 경제 구조를 안착시켜 놓고, 다시 그들이 가난한 식민지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착취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채무는 아프리카 민중이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북반구 채권자를 "기술적 암살자"라 불렀고, 외채를 갚는 건 "전쟁 배상금을 두 번 지불하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우리가 갚지 않더라고 대출기관은 죽지 않기 때문에 부채는 갚을 수 없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반면 우리가 돈을 지불한다면, 죽는 것은 우리입니다. 이것도 확실합니다. 우리를 빚더미에 빠뜨린 사람들은 마치 카지노에서 하듯 도박을 했습니다."
그는 이리 말하며 "절약한 돈은 지역 개발에 사용될 것이고, 무기를 위해 빚을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기를 사는 아프리카 국가는 그 무기를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기는 (핵폭탄 등을 가진) 유럽 국가를 상대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고,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며 "부채에 관한 결의안을 준비할 때, 군비 문제 해결책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를 먹여 살리는 자가 우리를 지배한다"며 IMF 등의 차관도 거부했다.
"사상은 죽일 수 없다"
1984년 UN 총회 연설차 방문한 뉴욕에서, 그는 외교관들이 주로 머무는 고급 호텔 대신 아프리카 이주민과 가난한 주민이 모여 사는 할렘을 찾았다. 그는 노예 해방 운동가 이름을 딴 해리엇 터브먼 학교를 찾아 연설했다. "우리의 백악관은 흑인 할렘에 있다"는 그의 발언은 강당에 모인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부르키나파소의 여성들은 3월 8일 여성의 날에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개혁이 추진됐던 상카라 집권기에 생긴 문화다. 상카라는 "진정한 여성 해방은 여성에게 책임을 맡기고, 생산적인 활동과 사람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싸움에 여성을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7년 여성의 날에 "여러분의 해방은 여러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며 "혁명은 여러분에게 권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그는 1987년 10월 15일 회의 도중, 전 동료인 블레즈 콤파오레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암살됐다. 상카라가 프랑스와 이들의 친선국인 코트디부아르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게 쿠데타 이유였다. 그는 수십 발의 총탄을 맞았고, 시신은 훼손돼 표식 없는 무덤에 매장됐다. 콤파오레의 쿠데타 뒤에 프랑스가 개입했다는 의혹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혁명이 번지길 두려워 한 코트디부아르가 프랑스의 묵인 혹은 지원 아래 쿠데타 자금을 댔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가 사살되기 일주일 전 말했던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 사상은 죽지 않는다"는 연설은 이 때문에 상징성을 가졌다.
한편, 상카라는 권위주의적 통제와 인권 탄압으로 국제 사회 비판을 받았다. 앰네스티는 부패 관료 등을 기소한 혁명 정부의 인민혁명재판소(TPR)가 피고인 변호권을 박탈했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입증하게 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자의적 판결 수단으로 악용됐다고 비판했다. 또 집권 초기 '국가 전복 음모 혐의'를 산 피고인들이 비밀리에 약식 재판을 받고 사형을 집행받았다며 강하게 규탄했다. 앰네스티는 1986년과 1988년 상카라 집권기에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전기 고문과 구타 사례가 보고됐다고 밝혔다.
[손가영 기자(bada@pressian.com)]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나, 당대 민중의 삶을 개혁해 내고 식민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한 그의 모습은 부르키나파소 민중들에겐 정치적 향수로 남아 있다. 가장 특징적인 건 검소함이다. 그는 당시 상층 계급이었던 공무원과 군인 등의 사익 추구 행위와 사치스러운 문화를 자 바다이야기하는법 주 비판했다. 집권 직후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공무원 급여를 삭감했고, 자신에겐 월급여 450달러를 책정했다. 관용차 메르세데스-벤츠를 모두 매각하고 가장 저렴한 르노 5로 바꿨고, 해외 출장 시 일등석 항공권 사용을 금지했다. 그의 사후 재산은 자동차 한 대, 자전거와 오토바이 몇 대, 그리고 냉장고 정도였다.
당시 부르키나파소는 릴게임몰메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인구의 90% 이상이 문맹으로, 교육은 상층 계급만 받았다. 인구 5만 명 당 의사 수는 1명 꼴로 의료 인프라는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영아 1000명 당 280명가량이 5세 이전 숨졌고,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다. 1896년부터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수도에조차 포장도로가 없을 정도로 국가 인프라는 전무했다. 쌀, 10원야마토게임 밀 등 기본 식료품도 프랑스에서 수입했고, 재정은 외채에 의존해 예산 상당부분이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
그의 집권기 4년 간 문해율은 13%에서 73%로 올랐다. 집권 몇 주 만에 국내 250만 명 아동들에게 예방접종을 전면 실시하며 공중 보건의 질을 끌어올렸고, 수백 명의 청소년을 쿠바에 보내 의사와 엔지니어로 양성했다. 토지를 재분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배해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해 식량 자급 목표를 달성했다. 군 창고를 국영 슈퍼마켓으로 바꿔 모든 시민이 이용하게 했다. 식민주의 잔재인 '오트볼타'란 국가 이름을 '정의롭고 정직한 이들의 땅'이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로 바꿨다.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이들의 경제활동을 장려하며 할례, 강제결혼 등 성차별 관습을 법으로 금지했다 바다이야기온라인 .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경호대도 따로 뒀다.
왜 다른 나라 대통령처럼 거리에 초상화 하나 걸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토마 상카라는 700만 명(당시 인구)이나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널리 회자하는 그의 말이다. 웅변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체 게바라 20주년 기념 연설을 하며 "혁명가 개인은 죽일 수 있어도, 사상을 죽일 수 없다"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는 사살됐다. 쿠데타 세력은 상카라 정책을 모두 뒤엎으며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외채를 끌어들였고, 27년 간 집권했다.
웅변가이자 혁명가인 토마 상카라의 말 모음집이 출간됐다. 출판사 진지가 지난해 11월 펴낸 <상카라 1983-1987: 검은 대륙 혁명의 목소리>다. 상카라를 다룬 국내 유일 도서다. 상카라가 집권했던 1983년부터 사망한 1987년까지 4년 간의 주요 발언문 25편과 인터뷰 5편이 실렸다. 원서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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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상카라 1983-1987 : 검은 대륙 혁명의 목소리> ⓒ진지
"유엔의 쥐새끼가 되는 걸 피해야 한다"
그를 세상에 알린 무대 중 하나는 1984년 10월 유엔(UN) 총회 연설이다. 그는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대신해 말한다"며 고통받는 이들을 읊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이유로 게토에 갇혀 동물에 불과한 생활을 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 "남성이 강요하는 착취 시스템에서 고통받는 전 세계 여성들", "아이를 구할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말라리아나 설사병으로 죽는 아이를 지켜보는 빈곤층 어머니", "부자를 위한 가게에 쌓인 풍요로움을 슬며시 훔쳐보는 배고픈 아이" 등을 호명했다.
팔레스타인부터 라틴아메리카까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남반구 국가 민중들도 불렀다. 그는 "비인간적인 한 인류가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며 UN이 이스라엘의 회원권을 정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형제 살해와 자살 전쟁 가운데 죽어가는 이란과 이라크 형제 병사들 곁에 있고자 하며, 항구가 지뢰밭이 되고 마을이 폭격당해도 용기와 냉철함으로 자기 운명에 맞서는 니카라과 동지들과도 함께 한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사람, 아일랜드,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등 분쟁을 겪은 나라도 빠짐없이 읊었다.
그는 UN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귀국 후 진행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유엔 복도의 쥐새끼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각국의 정치 엘리트들을 우회로 비판했다.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를 이론가들끼리 일종의 무균실에서 벌이는 스파링 경기로 축소하고 묵인하는 국제적 공모에 급격히 빠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곳 사람들을 보면 진지하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들과 함께 있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부채 안 갚겠다" 부채 탕감 아프리카 연대 역설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우리를 식민지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국가와 경제를 운영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를 금융가들, 즉 그들의 형제와 사촌들에게 빚을 지도록 만든 건 바로 식민주의자들입니다. 이 부채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 탕감은 그의 유명한 목표였다. 그는 연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채를 갚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식민 지배로 원자재 추출, 단일작물 재배, 저임금 노동 등의 왜곡된 경제 구조를 안착시켜 놓고, 다시 그들이 가난한 식민지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착취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채무는 아프리카 민중이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북반구 채권자를 "기술적 암살자"라 불렀고, 외채를 갚는 건 "전쟁 배상금을 두 번 지불하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우리가 갚지 않더라고 대출기관은 죽지 않기 때문에 부채는 갚을 수 없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반면 우리가 돈을 지불한다면, 죽는 것은 우리입니다. 이것도 확실합니다. 우리를 빚더미에 빠뜨린 사람들은 마치 카지노에서 하듯 도박을 했습니다."
그는 이리 말하며 "절약한 돈은 지역 개발에 사용될 것이고, 무기를 위해 빚을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기를 사는 아프리카 국가는 그 무기를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기는 (핵폭탄 등을 가진) 유럽 국가를 상대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고,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며 "부채에 관한 결의안을 준비할 때, 군비 문제 해결책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를 먹여 살리는 자가 우리를 지배한다"며 IMF 등의 차관도 거부했다.
"사상은 죽일 수 없다"
1984년 UN 총회 연설차 방문한 뉴욕에서, 그는 외교관들이 주로 머무는 고급 호텔 대신 아프리카 이주민과 가난한 주민이 모여 사는 할렘을 찾았다. 그는 노예 해방 운동가 이름을 딴 해리엇 터브먼 학교를 찾아 연설했다. "우리의 백악관은 흑인 할렘에 있다"는 그의 발언은 강당에 모인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부르키나파소의 여성들은 3월 8일 여성의 날에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개혁이 추진됐던 상카라 집권기에 생긴 문화다. 상카라는 "진정한 여성 해방은 여성에게 책임을 맡기고, 생산적인 활동과 사람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싸움에 여성을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7년 여성의 날에 "여러분의 해방은 여러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며 "혁명은 여러분에게 권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그는 1987년 10월 15일 회의 도중, 전 동료인 블레즈 콤파오레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암살됐다. 상카라가 프랑스와 이들의 친선국인 코트디부아르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게 쿠데타 이유였다. 그는 수십 발의 총탄을 맞았고, 시신은 훼손돼 표식 없는 무덤에 매장됐다. 콤파오레의 쿠데타 뒤에 프랑스가 개입했다는 의혹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혁명이 번지길 두려워 한 코트디부아르가 프랑스의 묵인 혹은 지원 아래 쿠데타 자금을 댔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가 사살되기 일주일 전 말했던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 사상은 죽지 않는다"는 연설은 이 때문에 상징성을 가졌다.
한편, 상카라는 권위주의적 통제와 인권 탄압으로 국제 사회 비판을 받았다. 앰네스티는 부패 관료 등을 기소한 혁명 정부의 인민혁명재판소(TPR)가 피고인 변호권을 박탈했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입증하게 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자의적 판결 수단으로 악용됐다고 비판했다. 또 집권 초기 '국가 전복 음모 혐의'를 산 피고인들이 비밀리에 약식 재판을 받고 사형을 집행받았다며 강하게 규탄했다. 앰네스티는 1986년과 1988년 상카라 집권기에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전기 고문과 구타 사례가 보고됐다고 밝혔다.
[손가영 기자(bad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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