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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금호은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2-17 00:23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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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는 책 도덕경’의 작가 켄 리우(Ken Liu). 단편소설 ‘종이동물원’으로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석권했고 류츠신의 ‘삼체’를 영어로 번역해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했다.
“더 많은 지식은 더 좁은 길로 인도할 뿐이니, 계속 텅 빈 채 열려 있는 편이 낫다.” -켄 리우의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중에서
읽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늦게, 시간의 강을 건너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알맞은 시기에 노자를 읽었다. 켄 리우가 쓴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이다. 나는 일찍이 켄 리우가 쓴 ‘종이동물원’을 읽은 바다이야기릴게임 바 있었고,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그의 시야가 보여주는 겹겹의 레이어,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신비로운 화법에 감탄하곤 했다.
켄 리우는 왜 지금 같은 타이밍에 노자를 이야기하기로 한 걸까? AI와 트럼프의 급발진으로 전 세계의 가치 체계가 혼돈과 욕망으로 흔들리는 이 난리통에.
‘노자가 글을 쓰던 때는 사아다쿨 위대한 발명과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고, 모두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현을 찾았고 제후들은 전쟁을 찬양했으며, 현명한 책사들은 패권과 종속의 문제로 초조해했다. 아름다움은 공포와 겨루었고 개인이든 나라든 그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라고 그는 서문에 쓰고 있다.
기원전 4세기 게임릴사이트 의 상황이 이토록 동시대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은 삶과 관계, 자유에 대한 노자의 아포리즘을 켄 리우가 번역하고 해설을 더한 책이다. 중국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공기 중에 노자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았다,라는 고백처럼 노자의 시와 켄 리우의 산문은 2천 년의 시간을 오가는 타임슬립 드라마처럼 읽힌다.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예컨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거나 모든 생은 공포와 아름다움이 함께 추는 춤이라는 자각,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승리했을 뿐 힘을 키우기 위해 승리한 것이 아니니 승리가 더 많은 것을 하게 만들지 말라는 일침은 읽을수록 온몸에 힘이 빠졌다.
수레바퀴 장인이나 도축업자, 공자와 장자, 거북이와 릴게임무료 붕새가 수시로 드나들며 사위가 고요해질 정도로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자가 던지면 켄 리우가 화답하는 이 문학적인 대화는 귀 기울여 들을수록 내 안의 전투력을 앗아갔다. 이분법 너머의 선택지를 상상하고, AI 바깥 세상에서 경험과 의미를 헤아리다 보니 어느새 묵은 해가 가고 설이 다가왔다.
날카롭되 베이지 않고 희망을 품되 달콤하지 않은 노자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의 작가 켄 리우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에서 태어났다. 주나라의 장서실의 관리자로 일했다. 어떤 기록은 그가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기원전 6세기경이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장자와 동시대인으로 보기도 한다. 노자는 오천 여자로 된 두 부짜리 책 한 권을 남겼고, 그것이 도덕경이다.
가장 문학적인 ‘도덕경’의 탄생이라고 찬사를 받은 켄 리우의 ‘길을 찾는 책 도덕경’.
-무엇이 당신을 도덕경으로 이끌었습니까?
“노자의 통찰력은 불확실성 자체를 끌어안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움과 공포에 나 자신을 내어 맡겨도 된다고 속삭이죠. 저를 도덕경으로 이끈 것은 바로 그의 급진적인 개방성이었습니다.”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도덕경의 태도는 환각 현상을 일으켜서라도 대답을 내놓고야 마는 현대의 AI가 지닌 전지적 태도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당신은 어떻게 AI의 시대에 대처하고 있습니까? 노자는 AI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요?
“저는 AI에 대한 노자의 답을 모르지만 LLM에 물으면 확고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요. 바로 여기에 인간성을 유지하는 핵심이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나 사상가와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AI를 사용해 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그 답변이 얄팍하고 오글거리며 지성인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LLM은 사상가들의 실제 생각 대신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이죠. 쓰거나 창작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누군가 남긴 한마디 뒤에는 하지 않기로 결심한 열 마디가 있습니다. 출판된 모든 문장은 긴 여정의 끝에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이끄는 특정한 경로입니다.
누군가 남긴 문장으로 훈련된 모델이 그 사람의 사고를 제대로 모방할 수 있다는 말은 빙산의 일각만 보고도 빙산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LLM이 AI에 대해 노자가 뭐라고 했을지 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하며 엉터리 답변을 내놓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디지털고치에 담궈진 인류의 미래를 그린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모른다는 감각이 중요한가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며 지적인 잠재력에 빈 공간을 만드는 순간 호기심과 학습, 탐구, 연구가 시작됩니다. 비늘과 발자국을 따라 용을 찾는 과정이죠. 우리는 모르겠다고 말할 때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모르겠다고 말할 힘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기계에도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의 지혜를 전달하겠다는 저의 야심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인터뷰가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용적 지혜로 나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기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기술을 통해 도를 이해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적인 시대는 노자가 살던 시대와 매우 다릅니다. 현시대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대 철학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곤 하죠. 세상이 달라졌으니 조부모님의 잔소리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처럼요. 하지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설명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기술적인 종입니다. 비버가 댐을 통해 벌이 벌집을 통해 본성을 표출하듯 사람은 기술로써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 인류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도가는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는 사상으로, 첨단 기술 시대에 오히려 적합합니다.”
켄 리우는 수레바퀴 장인에 관한 장자의 우화로 말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된 수레바퀴를 만들려면 목재의 성질을 살피고 결의 흐름을 느껴야 하고 수레바퀴의 테가 여름과 겨울에 진흙과 모래 위에서 어떻게 다르게 닳는지 이해해야한다. 지혜도 지식도 말로 다 전달할 수 없기에, 장인은 일흔이 되어서도 직접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
-노자의 도가야말로 첨단 기술 시대에 필요한 철학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노자는 인간이 사물을 만드는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사물을 되돌아보며 우리를 통찰하지요. 도가가 반기술적이라는 의견은 정말 터무니없는 평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서른 개의 바큇살은 차축을 위해 하나의 구멍에서 만난다.
그 빈 공간 덕분에 수레바퀴는 수레에 유용한 것이 된다.
구운 진흙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둘러싸고 굳어진다.
그 텅 빔 덕분에 그릇은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된다.’
‘큰 그릇은 다듬어지지 않았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듯이 그릇은 도가에서 기술을 암시하는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릇은 조력자이기도 합니다. 그릇이 없다면 물은 담기지 못하고 쏟아져 땅에 스며듭니다. 동시에 그릇은 물을 가두어 그릇의 형태에 머무르게 하는 제약이기도 합니다. 그릇은 인간 본성과 마찬가지로 음양의 특성을 모두 지닙니다.”
-그릇에서 인간 본성을 찾을 수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릇은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하죠. 그릇 덕분에 물은 담기지만 흐르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 또한 그래요. 보이지 않는 잠재력이자 그 잠재력을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술을 거부하는 대신 그 본성을 인지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물이 그릇에 담겨 들어 올려지듯 그 힘에 순응하면서도 고여서 썩지 않도록 갇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이 만든 인공물과 환상 속에 파묻혀 있어요. 가득 쌓인 소유물 속에서 변화와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빈 공간’은 무엇일까요?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로 모든 틈을 채우려고 애쓰는 우리의 마음속에 꿈꿀 수 있는 공백은 있나요? 구절 하나가 성찰을 끌어내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이것만으로도 책을 여러 권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릇 덕분에 물은 담기지만 흐르지 못한다. 기술과 인간 본성의 양면성이다.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도덕경은 시작합니다. 과학자이기도 한 당신에게 이 문장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공허의 물리학이나 현실의 근본적인 비현실성을 주장하며 현대 과학을 도가 사상의 껍질에 끼워 맞추는 경솔한 답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LLM(거대 언어 모델)처럼 단어의 재배열로 지능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노자의 의도를 짐작하여 이 구절을 은유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은 바깥에 존재할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은 두개골 안에 갇혀 감각과 주관,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우선 깊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사물은 생각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모든 창작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필멸의 존재로서 무한함을 이해해야만 하는 경험의 역설입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점점 대결과 혐오, 전쟁으로 치닫는 지금 같은 국제 정세를 노자가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만 대의 수레를 가진 군주가 어찌 세상의 운명을 그리 가볍게 대하겠는가?
경망스러움은 뿌리가 없고, 목적 없는 조급함은 군주가 없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진 강력한 군주들이 전쟁터에서 맞붙을 때, 그들은 우리의 안녕이 이분법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위협합니다. 20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이 제후들은 세상과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을 마치 장부상의 숫자나 바둑판의 돌, 고기 분쇄기에 들어갈 몸뚱이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그들의 말은 고통이라는 현실에서 동떨어진 목적 없는 선동이자 위선일 뿐입니다.
반면 노자는 우리에게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할 것을 촉구합니다. 다툼이라는 손쉬운 사치에서 벗어나 안식을 찾으라고 조언하지요. 필멸성에 뿌리를 둔 우리 자신의 ‘삶의 무게’에서 안식처를 찾으라고요. 노자가 주는 위안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제시되는 ‘나쁜 선택지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담백함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도덕경에서 전하는 최상의 리더는 어떤 모습입니까?
“최상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존재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가 일을 끝내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해낸 줄 알지요. 그다음으로 훌륭한 리더는 백성이 그를 칭송하고, 그다음 등급은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고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이 그를 업신여깁니다.”
관세 폭탄과 이민자 추방으로 매일 매일 ‘더 나쁜 선택지’를 강요하는 트럼프. ‘만 대의 수레를 가진 군주가 어찌 세상이 운명을 그리 가볍게 대하겠는?’라는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지요. 세상을 언어 게임으로 규정하는 비트겐슈타인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던’ 노자에게 현대인들이 끌리는 이유가 뭘까요? 사실 얼마 전까지 한국 인문 출판계의 스타는 쇼펜하우어였습니다.
“LLM을 떠올려 보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LLM은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알고 종종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노자 모두 동일하게 지적했을 겁니다. LLM은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요.
LLM은 부호들을 정교하게 재배열하며, 그 지능은 인간이 사고방식을 언어로 표면화하기 위해 천 년 동안 생성한 양질의 데이터 세트에서 발굴한 것일 뿐입니다. 최근 머신 러닝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요인은 레딧과 위키피디아, 깃허브, 스택 오버플로 같은 데이터 세트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서로를 돕기 위한 공간이죠.
LLM이 보이는 지능은 이러한 데이터 세트에 기록된 친절함의 유령에 불과합니다.”
-친절한 유령이라...
“경험을 대신해 말을 재배열하도록 훈련된 유령이 모든 분야에서 권위를 얻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 어떤 출처보다도 LLM의 답변을 신뢰하죠. 그러나 두 철학자는 모두 언어를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말은 언어 게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어야만 의미를 갖습니다. 노자에게 말은 의미가 지나간 뒤에 남겨진 흔적으로, 용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늘처럼 도를 상기시키는 것에 그칩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니 언어를 넘어서기를 요구합니다. 요는 수영하는 법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바다에서 헤엄쳐야 합니다.”
노자에 의하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봄에는 물이 실어나르고 겨울에는 얼음이 떠받쳐준다.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거북을 통해서 바다의 장엄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도가에서 바다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바다가 도교의 강력한 은유가 되는 이유는 바다가 우주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해요. 노자는 우주를 조화와 친절로 가득 찬 인격체로 바라보는 흔히 희화화된 ‘뉴에이지 현자’가 아닙니다. 우주는 단연코 자애롭지(benevolent) 않습니다. 바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파도는 순식간에 조난자를 집어삼키고 물보라조차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경외감에 젖어 침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풍경은 단순히 숨을 멎게 만듭니다.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다의 패턴을 따르고 그 힘에 순응해야 합니다. 배는 바다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다의 움직임에 맞추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파도와 함께 출렁이고, 조류와 함께 흐르며, 바람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죠. 고대 폴리네시아의 항해사들은 바다의 조류를 읽는 법을 배웠고, 길 없는 대양의 ‘도’를 따라 항해하며 전 근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바다는 길들여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소요하는 붕새’가 되거나, 그 바다 버전인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 되기를 지향해야 합니다.”
-저는 너무 거대한 문장보다는 때론 생활적인 일침, 예컨대 ‘재능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경쟁하려는 욕구가 사라진다’는 문장에서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재능과 과시가 거의 모든 성공과 라이프스타일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같은 악명 높은 실리콘밸리 스타도, 사랑과 인기를 좇는 팝스타도 마찬가지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우리의 창작물과 선택을 통해 본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믿는 것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에는 비극적이게도 가치와 가격이 동일하다는 거짓 등가성의 오류가 존재합니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가치 있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여기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배우자의 포옹은 얼마일까요? 아이가 그린 그림은요?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함께 보낸 마지막 한 시간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격이 매겨진 재능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호랑이는 아름다운 털 때문에 사냥당하고, 곡예단 원숭이는 영리하고 재빨라서 사슬에 묶입니다. 가격을 거부하고 가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AI는 우리의 문장을 완성하지만 도덕경은 우리에게 문장을 불완전하게 남겨두는 법을 가르쳐줍니다”라고 켄 리루는 말한다.
-당신도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재능 부자입니다. SF소설가, 미래학자, 번역가라는 3개의 직업을 오가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일단 저는 항상 라벨들이 불편했어요. 식별에 유용하지만 규정한다는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이나 물건, 개념을 상자 속에 넣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저는 제 작품들이 왜 ‘SF’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번역가’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남들이 저를 ‘미래학자’라고 여기는 이유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저는 흥미롭다고 느끼는 일들을 할 뿐입니다. 은유가 말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즐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작품이 ‘SF’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SF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칸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겠죠.
천 년을 살아남은 고대 문헌을 읽고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들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도 좋아해서, 저를 ‘번역가’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럴듯한 서류나 직함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제게 자격 미달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상상하며 미래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즐기고, 사람들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미래를 사유하도록 돕는 일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를 ‘미래학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래학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고 만약 존재하더라도 저는 그에 걸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규정과 구획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저를 칸에 집어넣으려는 사람들과 논쟁한 적은 없습니다. 칸에 속하기엔 삶이 너무 짧고, 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하는 일에 라벨을 붙이지 않으면 새로운 일에 도전해도 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게 장점입니다. 어차피 직무 기술서가 없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들은 무척 흥미롭지만, 그 일들을 뭐라고 규정할지 논쟁하는 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라벨과 상자, 경계, 잘 정돈된 칸들에 모든 것이 속하고 갇히며 가로막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라벨이 없으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시간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참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그게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상의 선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슬퍼하기에는 즐기느라 너무 바쁘거든요. 그래서 저는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거북이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거북이가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라듯이 제가 하는 흥미로운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거북이가 껍질을 제기에 넣으려는 대신들에게 반박하고 떠났듯이 라벨에 대한 논쟁은 남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노자의 텍스트와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는 켄 리우.
-‘변함없는 자는 야망을 넘어선다’고도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 문장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공의 진정한 척도에 대한 매우 단순한 진술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이해하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하죠.
‘만족하는 자는 부유하다.
변함없는 자는 야망을 넘어선다.’
우리는 경쟁하고 욕망하라는 메시지에 노출됩니다. 현대성의 기반이 ‘성장’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만족하면 경제 시스템은 그 즉시 새로운 욕망과 결핍을 제조하고 부추깁니다. 마치 암세포가 활동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작가로서 저 역시 얼마나 많은 책을 팔았는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 팬이 몇 명인지로 제 가치를 측정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광기뿐이죠. 만약 제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을 측정한다면, 저는 제 자존감을 타인의 판단에 맡겨버리는 셈입니다. 제 신세는 바람의 변덕에 의존하는 풍향계와 다를 바 없게 되죠.”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유의 첫걸음은 야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암세포의 논리와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책에서 도축업자인 포정은 예술적인 움직임으로 소를 가르고 곧장 칼을 닦고 치워버리더군요.
“성취의 기쁨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물러나는 것입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츠’의 한 장면. 도가 사상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영화로 영화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에블린의 무력이 아니라 웨이먼드의 다정함이다.
-독자로서 당신의 번역을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당신도 성취의 기쁨을 느꼈습니까?
“저는 박식함을 포기하는 대신 명료함을 택했어요. 원문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것을 포착해서 단순하게 스케치했고 소박함으로 나아갔습니다. 도로 향하는 길을 찾으며 참 즐거웠습니다. 세상은 새로운 경이를 선사했고 저는 가장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았죠.
매일 저를 행복하게 만든 것들을 적는데, 딸의 농담과 아내와 보낸 고요한 시간, 만족스러운 게임 한 판 같은 아주 단순한 것들입니다. 제가 도를 깨달았다거나 도를 찾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죠. 도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은 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만 더이상 가격만 있고 가치는 없는 현대의 분주함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뿐이지요.”
-마지막으로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를 통과하며 2026년을 맞은 한국의 뜨거운 독자들에게 한 해를 잘 건너가기 위한 태도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조언을 한다면 저는 형편없는 도가 사상가일 겁니다. 저는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물처럼 흐르는 노자의 말로 대신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선이란 친절해지는 것입니다. 다스림에 있어서 선이란 질서정연해지는 것입니다. 일함에 있어서 선이란 유능해지는 것이며, 행위에 있어서 선이란 시의적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잠재력으로 창조하세요. 평안으로 가는 각자의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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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지식은 더 좁은 길로 인도할 뿐이니, 계속 텅 빈 채 열려 있는 편이 낫다.” -켄 리우의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중에서
읽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늦게, 시간의 강을 건너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알맞은 시기에 노자를 읽었다. 켄 리우가 쓴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이다. 나는 일찍이 켄 리우가 쓴 ‘종이동물원’을 읽은 바다이야기릴게임 바 있었고,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그의 시야가 보여주는 겹겹의 레이어,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신비로운 화법에 감탄하곤 했다.
켄 리우는 왜 지금 같은 타이밍에 노자를 이야기하기로 한 걸까? AI와 트럼프의 급발진으로 전 세계의 가치 체계가 혼돈과 욕망으로 흔들리는 이 난리통에.
‘노자가 글을 쓰던 때는 사아다쿨 위대한 발명과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고, 모두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현을 찾았고 제후들은 전쟁을 찬양했으며, 현명한 책사들은 패권과 종속의 문제로 초조해했다. 아름다움은 공포와 겨루었고 개인이든 나라든 그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라고 그는 서문에 쓰고 있다.
기원전 4세기 게임릴사이트 의 상황이 이토록 동시대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은 삶과 관계, 자유에 대한 노자의 아포리즘을 켄 리우가 번역하고 해설을 더한 책이다. 중국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공기 중에 노자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았다,라는 고백처럼 노자의 시와 켄 리우의 산문은 2천 년의 시간을 오가는 타임슬립 드라마처럼 읽힌다.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예컨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거나 모든 생은 공포와 아름다움이 함께 추는 춤이라는 자각,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승리했을 뿐 힘을 키우기 위해 승리한 것이 아니니 승리가 더 많은 것을 하게 만들지 말라는 일침은 읽을수록 온몸에 힘이 빠졌다.
수레바퀴 장인이나 도축업자, 공자와 장자, 거북이와 릴게임무료 붕새가 수시로 드나들며 사위가 고요해질 정도로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자가 던지면 켄 리우가 화답하는 이 문학적인 대화는 귀 기울여 들을수록 내 안의 전투력을 앗아갔다. 이분법 너머의 선택지를 상상하고, AI 바깥 세상에서 경험과 의미를 헤아리다 보니 어느새 묵은 해가 가고 설이 다가왔다.
날카롭되 베이지 않고 희망을 품되 달콤하지 않은 노자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의 작가 켄 리우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에서 태어났다. 주나라의 장서실의 관리자로 일했다. 어떤 기록은 그가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기원전 6세기경이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장자와 동시대인으로 보기도 한다. 노자는 오천 여자로 된 두 부짜리 책 한 권을 남겼고, 그것이 도덕경이다.
가장 문학적인 ‘도덕경’의 탄생이라고 찬사를 받은 켄 리우의 ‘길을 찾는 책 도덕경’.
-무엇이 당신을 도덕경으로 이끌었습니까?
“노자의 통찰력은 불확실성 자체를 끌어안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움과 공포에 나 자신을 내어 맡겨도 된다고 속삭이죠. 저를 도덕경으로 이끈 것은 바로 그의 급진적인 개방성이었습니다.”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도덕경의 태도는 환각 현상을 일으켜서라도 대답을 내놓고야 마는 현대의 AI가 지닌 전지적 태도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당신은 어떻게 AI의 시대에 대처하고 있습니까? 노자는 AI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요?
“저는 AI에 대한 노자의 답을 모르지만 LLM에 물으면 확고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요. 바로 여기에 인간성을 유지하는 핵심이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나 사상가와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AI를 사용해 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그 답변이 얄팍하고 오글거리며 지성인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LLM은 사상가들의 실제 생각 대신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이죠. 쓰거나 창작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누군가 남긴 한마디 뒤에는 하지 않기로 결심한 열 마디가 있습니다. 출판된 모든 문장은 긴 여정의 끝에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이끄는 특정한 경로입니다.
누군가 남긴 문장으로 훈련된 모델이 그 사람의 사고를 제대로 모방할 수 있다는 말은 빙산의 일각만 보고도 빙산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LLM이 AI에 대해 노자가 뭐라고 했을지 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하며 엉터리 답변을 내놓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디지털고치에 담궈진 인류의 미래를 그린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모른다는 감각이 중요한가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며 지적인 잠재력에 빈 공간을 만드는 순간 호기심과 학습, 탐구, 연구가 시작됩니다. 비늘과 발자국을 따라 용을 찾는 과정이죠. 우리는 모르겠다고 말할 때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모르겠다고 말할 힘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기계에도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의 지혜를 전달하겠다는 저의 야심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인터뷰가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용적 지혜로 나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기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기술을 통해 도를 이해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적인 시대는 노자가 살던 시대와 매우 다릅니다. 현시대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대 철학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곤 하죠. 세상이 달라졌으니 조부모님의 잔소리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처럼요. 하지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설명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기술적인 종입니다. 비버가 댐을 통해 벌이 벌집을 통해 본성을 표출하듯 사람은 기술로써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 인류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도가는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는 사상으로, 첨단 기술 시대에 오히려 적합합니다.”
켄 리우는 수레바퀴 장인에 관한 장자의 우화로 말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된 수레바퀴를 만들려면 목재의 성질을 살피고 결의 흐름을 느껴야 하고 수레바퀴의 테가 여름과 겨울에 진흙과 모래 위에서 어떻게 다르게 닳는지 이해해야한다. 지혜도 지식도 말로 다 전달할 수 없기에, 장인은 일흔이 되어서도 직접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
-노자의 도가야말로 첨단 기술 시대에 필요한 철학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노자는 인간이 사물을 만드는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사물을 되돌아보며 우리를 통찰하지요. 도가가 반기술적이라는 의견은 정말 터무니없는 평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서른 개의 바큇살은 차축을 위해 하나의 구멍에서 만난다.
그 빈 공간 덕분에 수레바퀴는 수레에 유용한 것이 된다.
구운 진흙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둘러싸고 굳어진다.
그 텅 빔 덕분에 그릇은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된다.’
‘큰 그릇은 다듬어지지 않았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듯이 그릇은 도가에서 기술을 암시하는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릇은 조력자이기도 합니다. 그릇이 없다면 물은 담기지 못하고 쏟아져 땅에 스며듭니다. 동시에 그릇은 물을 가두어 그릇의 형태에 머무르게 하는 제약이기도 합니다. 그릇은 인간 본성과 마찬가지로 음양의 특성을 모두 지닙니다.”
-그릇에서 인간 본성을 찾을 수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릇은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하죠. 그릇 덕분에 물은 담기지만 흐르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 또한 그래요. 보이지 않는 잠재력이자 그 잠재력을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술을 거부하는 대신 그 본성을 인지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물이 그릇에 담겨 들어 올려지듯 그 힘에 순응하면서도 고여서 썩지 않도록 갇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이 만든 인공물과 환상 속에 파묻혀 있어요. 가득 쌓인 소유물 속에서 변화와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빈 공간’은 무엇일까요?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로 모든 틈을 채우려고 애쓰는 우리의 마음속에 꿈꿀 수 있는 공백은 있나요? 구절 하나가 성찰을 끌어내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이것만으로도 책을 여러 권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릇 덕분에 물은 담기지만 흐르지 못한다. 기술과 인간 본성의 양면성이다.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도덕경은 시작합니다. 과학자이기도 한 당신에게 이 문장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공허의 물리학이나 현실의 근본적인 비현실성을 주장하며 현대 과학을 도가 사상의 껍질에 끼워 맞추는 경솔한 답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LLM(거대 언어 모델)처럼 단어의 재배열로 지능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노자의 의도를 짐작하여 이 구절을 은유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은 바깥에 존재할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은 두개골 안에 갇혀 감각과 주관,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우선 깊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사물은 생각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모든 창작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필멸의 존재로서 무한함을 이해해야만 하는 경험의 역설입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점점 대결과 혐오, 전쟁으로 치닫는 지금 같은 국제 정세를 노자가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만 대의 수레를 가진 군주가 어찌 세상의 운명을 그리 가볍게 대하겠는가?
경망스러움은 뿌리가 없고, 목적 없는 조급함은 군주가 없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진 강력한 군주들이 전쟁터에서 맞붙을 때, 그들은 우리의 안녕이 이분법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위협합니다. 20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이 제후들은 세상과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을 마치 장부상의 숫자나 바둑판의 돌, 고기 분쇄기에 들어갈 몸뚱이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그들의 말은 고통이라는 현실에서 동떨어진 목적 없는 선동이자 위선일 뿐입니다.
반면 노자는 우리에게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할 것을 촉구합니다. 다툼이라는 손쉬운 사치에서 벗어나 안식을 찾으라고 조언하지요. 필멸성에 뿌리를 둔 우리 자신의 ‘삶의 무게’에서 안식처를 찾으라고요. 노자가 주는 위안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제시되는 ‘나쁜 선택지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담백함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도덕경에서 전하는 최상의 리더는 어떤 모습입니까?
“최상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존재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가 일을 끝내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해낸 줄 알지요. 그다음으로 훌륭한 리더는 백성이 그를 칭송하고, 그다음 등급은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고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이 그를 업신여깁니다.”
관세 폭탄과 이민자 추방으로 매일 매일 ‘더 나쁜 선택지’를 강요하는 트럼프. ‘만 대의 수레를 가진 군주가 어찌 세상이 운명을 그리 가볍게 대하겠는?’라는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지요. 세상을 언어 게임으로 규정하는 비트겐슈타인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던’ 노자에게 현대인들이 끌리는 이유가 뭘까요? 사실 얼마 전까지 한국 인문 출판계의 스타는 쇼펜하우어였습니다.
“LLM을 떠올려 보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LLM은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알고 종종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노자 모두 동일하게 지적했을 겁니다. LLM은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요.
LLM은 부호들을 정교하게 재배열하며, 그 지능은 인간이 사고방식을 언어로 표면화하기 위해 천 년 동안 생성한 양질의 데이터 세트에서 발굴한 것일 뿐입니다. 최근 머신 러닝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요인은 레딧과 위키피디아, 깃허브, 스택 오버플로 같은 데이터 세트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서로를 돕기 위한 공간이죠.
LLM이 보이는 지능은 이러한 데이터 세트에 기록된 친절함의 유령에 불과합니다.”
-친절한 유령이라...
“경험을 대신해 말을 재배열하도록 훈련된 유령이 모든 분야에서 권위를 얻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 어떤 출처보다도 LLM의 답변을 신뢰하죠. 그러나 두 철학자는 모두 언어를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말은 언어 게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어야만 의미를 갖습니다. 노자에게 말은 의미가 지나간 뒤에 남겨진 흔적으로, 용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늘처럼 도를 상기시키는 것에 그칩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니 언어를 넘어서기를 요구합니다. 요는 수영하는 법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바다에서 헤엄쳐야 합니다.”
노자에 의하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봄에는 물이 실어나르고 겨울에는 얼음이 떠받쳐준다.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거북을 통해서 바다의 장엄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도가에서 바다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바다가 도교의 강력한 은유가 되는 이유는 바다가 우주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해요. 노자는 우주를 조화와 친절로 가득 찬 인격체로 바라보는 흔히 희화화된 ‘뉴에이지 현자’가 아닙니다. 우주는 단연코 자애롭지(benevolent) 않습니다. 바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파도는 순식간에 조난자를 집어삼키고 물보라조차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경외감에 젖어 침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풍경은 단순히 숨을 멎게 만듭니다.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다의 패턴을 따르고 그 힘에 순응해야 합니다. 배는 바다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다의 움직임에 맞추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파도와 함께 출렁이고, 조류와 함께 흐르며, 바람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죠. 고대 폴리네시아의 항해사들은 바다의 조류를 읽는 법을 배웠고, 길 없는 대양의 ‘도’를 따라 항해하며 전 근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바다는 길들여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소요하는 붕새’가 되거나, 그 바다 버전인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 되기를 지향해야 합니다.”
-저는 너무 거대한 문장보다는 때론 생활적인 일침, 예컨대 ‘재능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경쟁하려는 욕구가 사라진다’는 문장에서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재능과 과시가 거의 모든 성공과 라이프스타일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같은 악명 높은 실리콘밸리 스타도, 사랑과 인기를 좇는 팝스타도 마찬가지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우리의 창작물과 선택을 통해 본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믿는 것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에는 비극적이게도 가치와 가격이 동일하다는 거짓 등가성의 오류가 존재합니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가치 있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여기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배우자의 포옹은 얼마일까요? 아이가 그린 그림은요?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함께 보낸 마지막 한 시간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격이 매겨진 재능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호랑이는 아름다운 털 때문에 사냥당하고, 곡예단 원숭이는 영리하고 재빨라서 사슬에 묶입니다. 가격을 거부하고 가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AI는 우리의 문장을 완성하지만 도덕경은 우리에게 문장을 불완전하게 남겨두는 법을 가르쳐줍니다”라고 켄 리루는 말한다.
-당신도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재능 부자입니다. SF소설가, 미래학자, 번역가라는 3개의 직업을 오가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일단 저는 항상 라벨들이 불편했어요. 식별에 유용하지만 규정한다는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이나 물건, 개념을 상자 속에 넣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저는 제 작품들이 왜 ‘SF’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번역가’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남들이 저를 ‘미래학자’라고 여기는 이유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저는 흥미롭다고 느끼는 일들을 할 뿐입니다. 은유가 말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즐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작품이 ‘SF’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SF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칸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겠죠.
천 년을 살아남은 고대 문헌을 읽고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들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도 좋아해서, 저를 ‘번역가’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럴듯한 서류나 직함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제게 자격 미달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상상하며 미래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즐기고, 사람들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미래를 사유하도록 돕는 일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를 ‘미래학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래학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고 만약 존재하더라도 저는 그에 걸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규정과 구획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저를 칸에 집어넣으려는 사람들과 논쟁한 적은 없습니다. 칸에 속하기엔 삶이 너무 짧고, 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하는 일에 라벨을 붙이지 않으면 새로운 일에 도전해도 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게 장점입니다. 어차피 직무 기술서가 없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들은 무척 흥미롭지만, 그 일들을 뭐라고 규정할지 논쟁하는 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라벨과 상자, 경계, 잘 정돈된 칸들에 모든 것이 속하고 갇히며 가로막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라벨이 없으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시간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참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그게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상의 선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슬퍼하기에는 즐기느라 너무 바쁘거든요. 그래서 저는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거북이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거북이가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라듯이 제가 하는 흥미로운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거북이가 껍질을 제기에 넣으려는 대신들에게 반박하고 떠났듯이 라벨에 대한 논쟁은 남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노자의 텍스트와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는 켄 리우.
-‘변함없는 자는 야망을 넘어선다’고도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 문장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공의 진정한 척도에 대한 매우 단순한 진술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이해하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하죠.
‘만족하는 자는 부유하다.
변함없는 자는 야망을 넘어선다.’
우리는 경쟁하고 욕망하라는 메시지에 노출됩니다. 현대성의 기반이 ‘성장’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만족하면 경제 시스템은 그 즉시 새로운 욕망과 결핍을 제조하고 부추깁니다. 마치 암세포가 활동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작가로서 저 역시 얼마나 많은 책을 팔았는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 팬이 몇 명인지로 제 가치를 측정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광기뿐이죠. 만약 제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을 측정한다면, 저는 제 자존감을 타인의 판단에 맡겨버리는 셈입니다. 제 신세는 바람의 변덕에 의존하는 풍향계와 다를 바 없게 되죠.”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유의 첫걸음은 야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암세포의 논리와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책에서 도축업자인 포정은 예술적인 움직임으로 소를 가르고 곧장 칼을 닦고 치워버리더군요.
“성취의 기쁨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물러나는 것입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츠’의 한 장면. 도가 사상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영화로 영화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에블린의 무력이 아니라 웨이먼드의 다정함이다.
-독자로서 당신의 번역을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당신도 성취의 기쁨을 느꼈습니까?
“저는 박식함을 포기하는 대신 명료함을 택했어요. 원문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것을 포착해서 단순하게 스케치했고 소박함으로 나아갔습니다. 도로 향하는 길을 찾으며 참 즐거웠습니다. 세상은 새로운 경이를 선사했고 저는 가장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았죠.
매일 저를 행복하게 만든 것들을 적는데, 딸의 농담과 아내와 보낸 고요한 시간, 만족스러운 게임 한 판 같은 아주 단순한 것들입니다. 제가 도를 깨달았다거나 도를 찾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죠. 도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은 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만 더이상 가격만 있고 가치는 없는 현대의 분주함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뿐이지요.”
-마지막으로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를 통과하며 2026년을 맞은 한국의 뜨거운 독자들에게 한 해를 잘 건너가기 위한 태도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조언을 한다면 저는 형편없는 도가 사상가일 겁니다. 저는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물처럼 흐르는 노자의 말로 대신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선이란 친절해지는 것입니다. 다스림에 있어서 선이란 질서정연해지는 것입니다. 일함에 있어서 선이란 유능해지는 것이며, 행위에 있어서 선이란 시의적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잠재력으로 창조하세요. 평안으로 가는 각자의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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