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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금호은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2-17 11:27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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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지명자의 고등학교 시절(왼쪽) 및 최근 모습. /미국 셰이커 고등학교, EPA 연합뉴스
케빈 워시(Warsh)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가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난달 지명된 후 가장 흥분한 이들은 유대인 커뮤니티였다. 아서 번스(1970~1978년 재임),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 벤 버냉키(2006~2014년), 재닛 옐런(2014~2018년) 등 금융과 경제에 강한 유대인 출신 연준 의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워시는 특별했다. 그의 장인이 세계 최대 유대인 기구인 ‘세계 유대인 회의’ 회장인 로널드 릴게임바다신2 로더 에스티로더 회장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영자 신문 예루살렘포스트가 워시 지명 후 낸 기사 제목은 ‘로널드 로더의 사위 케빈 워시가 연준 의장에 지명되다’였다. 워시보다 로더가 앞선 것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임기가 오는 5월 끝나면 새 ‘세계 경제 대통령’이 탄생한다.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후 동부와 서부의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대표적인 명문대에서 공부한 워시가 상원 인준을 통과할 경우 최연소 연준 이사(2006~2011년)에 이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연준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연준의 결정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경제에도 중요한 변수다. 앞으로 적어도 4년(연준 의장 임기) 동안은 자주 이름을 듣고 얼굴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큰 워시 연준 의장의 ‘사생활’을 그의 행적에 남은 자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료를 뒤져 짚어보았다.
◇뉴욕 중소 도시, 사업가 아들
케빈 워시의 어머니 주디스 워시의 젊은 시절 모습.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자로 활동했던 그는 코로나 때인 2022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고 사이트에 올라온 모습이다. /파인 사이다쿨 드어그레이브
월스트리트저널은 워시의 삶에 대해 “부와 권력을 향한 고속 상승”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그는 뉴욕주 주도 올버니(Albany)의 중산층·유대인 가문에서 1970년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밥) 워시에 대해선 ‘보험 판매원으로 일했다’, ‘사업을 했다’ 같이 엇갈리는 보 골드몽릴게임 도가 나오고 있지만, 워시 부모님의 결혼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는 브라운대와 워싱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점을 운영한 사업가였다. 보다 구체적으론 아동복 가게다. 어머니는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한 전직 기자이자 작가였다. (워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코로나 팬데믹 때인 2020년과 2022년에 각각 91세,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케빈 워시 부모님의 약혼 소식을 전한 1966년 1월 23일 뉴욕타임스 청첩 지면.(파란 사각형 안) 아버지는 브라운대와 워싱턴대 대학원을 졸업한 사업가, 어머니는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한 전직 기자이자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다. /뉴욕타임스
케빈 워시의 아버지 로버트 워시(파란 원)의 모습. 미국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올라온 사진의 일부다. /이베이 캡처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는, 워시의 고향 출신 바버러 후바씨의 페이스북 글이다.
“케빈의 아버지 밥 워시는 ‘리틀 폭스 숍(Little Folks Shop, 꼬맹이들의 가게)’이라는 근사한 옷 가게를 델마에서 운영했어요. 사업이 아주 잘됐죠. 아주 좋은 분들이었어요. 우리가 그 가게에서 가장 좋아한 건 새장에 있는 ‘미스터 도(Mr. Do)’라는 이름의 구관조였어요. 어린이들이 미스터 도와 이야기하려고 그 가게에 가고 싶어 했답니다.”
워시는 올버니카운티 레이섬에 있는 ‘셰이커 고등학교’를 1988년 졸업했다. 미국 중앙은행 수장 배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 학교가 속한 ‘노스 콜로니 중앙 학군’ 린다 해리슨 교육위원장은 지역 언론에 최근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 해리슨 위원장은 워시의 고교 시절 역사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성명 내용이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명은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인 동시에 우리 학군의 자랑스러운 성과이기도 합니다. 케빈의 고등학생 시절 미국사 선생님으로서 말하자면, 그는 항상 사려 깊고 자신감 넘치며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제 교사 경력 35년 중 최고의 학생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케빈의 훌륭한 가족은 그의 학업 내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의 여정에서 그를 도와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는 그중 한 명에 들게 된 점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셰이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분명히 매우 열정적이고 의욕적인 학생이었고 이후 세상에 나가서도 멋진 일들을 해냈습니다. 저는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는 사람이라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데, 케빈은 이를 모두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케빈이 지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미국 국민을 위한 공직을 잘 수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케빈 워시 고등학교 졸업 앨범 중 일부. 학생 금융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셰이커 고등학교
워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제에 대한 흥미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셰이커 고등학교가 공개한 그의 졸업 앨범 동아리 활동 사진 중엔 그가 ‘학생 금융 위원회(Student Board of Finance)’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프리드먼과 만나다
워시는 뉴욕의 중소 도시를 떠나 서부 실리콘밸리의 중심 대학인 스탠퍼드대에 진학한다. 학부 전공은 공공행정학이었다고 알려졌다. 워시는 당시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학생들과 교류하던 밀턴 프리드먼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유 시장 경제의 옹호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먼은 30여 년 동안 일했던 시카고대에서 1977년 은퇴하고 세상을 뜬 2006년까지 스탠퍼드대에 머물렀다. 춥기로 악명 높은 시카고를 떠나 온화한 캘리포니아로 옮겨 말년을 보낸 셈이다.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 교수. 그는 1977년 시카고대에서 은퇴한 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서 일했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명자는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프리드먼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스탠퍼드대
워시는 프리드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20년 4월 후버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연준의 역할에 대해 묻자 “30년 전 캠퍼스에서 만난 밀턴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엔 밀턴을 언급할 때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앙은행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됐습니다. 그가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경제가 경기 순환을 따라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지, 20년이나 30년에 걸친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앙은행 총재들이 정책 수단을 과도하게 조정하려 한다면 스스로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책 수단’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디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였습니다.”
중앙은행이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워시의 연준 의장 지명 후 그가 과도한 양적 완화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부각됐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워시는 금융 위기나 코로나처럼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연준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동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은행이 평시엔 경제가 자연스럽게 순환하도록 용인하되 위기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자신과 프리드먼의 생각을 워시는 “소수점 이하에 집중하지 말고 소수점 왼쪽에 집중하라”는 말로 요약했다.
후버연구소에 따르면 워시는 대학 4학년 때 총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가 연준 이사로 임명된 직후인 2007년 후버연구소의 게시물에 따르면 워시는 학창 시절 “골프라는 귀중한 사업 기술을 배웠다”고 밝혔다. 과거 보도에 따르면 워시는 골프 클럽 회원권도 여럿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골프를 즐긴다.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트럼프의 눈에 워시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다.
케빈 워시 동창들이 그의 연준 의장 지명 후 소셜미디어에 남긴 글. /페이스북
◇9ᐧ11 테러를 계기로 공직 결심
워시는 1992년 스탠퍼드대 졸업 후 다시 동부로 가서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다. 졸업 직후인 1995년 미국을 대표하는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 입사해 기업 인수ᐧ합병(M&A) 및 구조조정 관련 업무를 주로 맡아 뉴욕에서 일했다. 2002년 이슬람 단체 알카에다의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비극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에 더 봉사할 수 있는 공직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2007년 후버연구소와의 인터뷰 중 발언이다.
“2002년 백악관으로부터 뉴욕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깜짝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바로 백악관에 합류하기로 했죠. 저는 9ᐧ11 테러 당일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모건스탠리 본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테러의 충격으로 모두 귀가 명령이 내려졌는데 일단 걸어서 급히 집에 가면서 무역센터에서 근무하는 모건스탠리 동료 3700명의 소식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여섯 명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가 공직에서 일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백악관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다른 결정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워시는 위에 말한 대로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시의 백악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국가경제위원회 경제 정책 고문으로 합류했다. 당시 월가와 소통이 잘 되는 시장 경제 전문가를 찾던 백악관이 수소문 끝에 그를 발탁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부시 대통령은 4년 후인 2006년 36세였던 워시를 미 연준의 최연소 이사로 지명한다.
2008년 금융위기라는 경제 충격을 맞아 월가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던 워시는 2011년 임기를 7년이나 남기고 자진 사퇴한다. 금융위기를 수습한 후에도 반복되는 막대한 규모의 양적 완화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결국 자리를 내놓는다. 이후엔 모교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억만장자 투자자 스탠리 드러켄밀러의 개인 자산을 굴리는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에 합류해 파트너로도 일해왔다.
뉴욕에서 열린 한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케빈 워시와 배우자 제인 로더의 모습. /X
워시의 가족에 대해선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만난 제인 로더(1995년 졸업)와 2002년 결혼했다는 사실이 가장 부각된다. 제인 로더는 미국을 대표하는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의 상속녀이고 세계 유대인 회의 회장이자 트럼프의 정치 자금을 지원한 거물인 로널드 로더 회장의 둘째 딸이다. 제인 로더의 현재 직함은 에스티로더 마케팅 총괄 겸 최고데이터책임자다.
제인 로더는 결혼 후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로더’라는 가문의 성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보유한 부동산을 팔거나 회사 내 직책이 바뀔 때마다 타블로이드지에 기사가 나곤 하는 유명 인사이지만, 부부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포브스에 따르면 이 부부의 순자산은 약 27억달러(약 3조9000억원)로, 대부분이 로더의 재산이다.
◇한국과도 ‘괜찮은 인연’
워시 지명 후 가장 화제가 된 한국과의 인연은 쿠팡 사외 이사라는 사실이었다. 마침 정보 유출 사태로 쿠팡이 공격받고 있을 즈음이어서 워시의 사외이사직이 부각됐다.
쿠팡을 제외하고도 워시는 한국과 인연이 꽤 있는 편이다. 특히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도 친분이 있다고 알려졌다. 한은 관계자는 “이 총재가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장으로 워싱턴 DC에서 일할 때 현지에서 자주 만났고 총재가 된 후에도 미국 출장 때 여러 차례 교류했다. 이 총재 취임 후 한은 건물도 방문했었다”고 했다. 연준 이사 시절엔 아시아를 담당해 2010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G20 중앙은행 부총재 회의에 이어 부산에서 열린 회의에 벤 버냉키 당시 의장을 대신해 참석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케빈 워시(Warsh)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가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난달 지명된 후 가장 흥분한 이들은 유대인 커뮤니티였다. 아서 번스(1970~1978년 재임),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 벤 버냉키(2006~2014년), 재닛 옐런(2014~2018년) 등 금융과 경제에 강한 유대인 출신 연준 의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워시는 특별했다. 그의 장인이 세계 최대 유대인 기구인 ‘세계 유대인 회의’ 회장인 로널드 릴게임바다신2 로더 에스티로더 회장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영자 신문 예루살렘포스트가 워시 지명 후 낸 기사 제목은 ‘로널드 로더의 사위 케빈 워시가 연준 의장에 지명되다’였다. 워시보다 로더가 앞선 것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임기가 오는 5월 끝나면 새 ‘세계 경제 대통령’이 탄생한다.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후 동부와 서부의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대표적인 명문대에서 공부한 워시가 상원 인준을 통과할 경우 최연소 연준 이사(2006~2011년)에 이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연준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연준의 결정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경제에도 중요한 변수다. 앞으로 적어도 4년(연준 의장 임기) 동안은 자주 이름을 듣고 얼굴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큰 워시 연준 의장의 ‘사생활’을 그의 행적에 남은 자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료를 뒤져 짚어보았다.
◇뉴욕 중소 도시, 사업가 아들
케빈 워시의 어머니 주디스 워시의 젊은 시절 모습.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자로 활동했던 그는 코로나 때인 2022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고 사이트에 올라온 모습이다. /파인 사이다쿨 드어그레이브
월스트리트저널은 워시의 삶에 대해 “부와 권력을 향한 고속 상승”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그는 뉴욕주 주도 올버니(Albany)의 중산층·유대인 가문에서 1970년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밥) 워시에 대해선 ‘보험 판매원으로 일했다’, ‘사업을 했다’ 같이 엇갈리는 보 골드몽릴게임 도가 나오고 있지만, 워시 부모님의 결혼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는 브라운대와 워싱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점을 운영한 사업가였다. 보다 구체적으론 아동복 가게다. 어머니는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한 전직 기자이자 작가였다. (워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코로나 팬데믹 때인 2020년과 2022년에 각각 91세,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케빈 워시 부모님의 약혼 소식을 전한 1966년 1월 23일 뉴욕타임스 청첩 지면.(파란 사각형 안) 아버지는 브라운대와 워싱턴대 대학원을 졸업한 사업가, 어머니는 코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한 전직 기자이자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다. /뉴욕타임스
케빈 워시의 아버지 로버트 워시(파란 원)의 모습. 미국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올라온 사진의 일부다. /이베이 캡처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는, 워시의 고향 출신 바버러 후바씨의 페이스북 글이다.
“케빈의 아버지 밥 워시는 ‘리틀 폭스 숍(Little Folks Shop, 꼬맹이들의 가게)’이라는 근사한 옷 가게를 델마에서 운영했어요. 사업이 아주 잘됐죠. 아주 좋은 분들이었어요. 우리가 그 가게에서 가장 좋아한 건 새장에 있는 ‘미스터 도(Mr. Do)’라는 이름의 구관조였어요. 어린이들이 미스터 도와 이야기하려고 그 가게에 가고 싶어 했답니다.”
워시는 올버니카운티 레이섬에 있는 ‘셰이커 고등학교’를 1988년 졸업했다. 미국 중앙은행 수장 배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 학교가 속한 ‘노스 콜로니 중앙 학군’ 린다 해리슨 교육위원장은 지역 언론에 최근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 해리슨 위원장은 워시의 고교 시절 역사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성명 내용이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명은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인 동시에 우리 학군의 자랑스러운 성과이기도 합니다. 케빈의 고등학생 시절 미국사 선생님으로서 말하자면, 그는 항상 사려 깊고 자신감 넘치며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제 교사 경력 35년 중 최고의 학생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케빈의 훌륭한 가족은 그의 학업 내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의 여정에서 그를 도와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는 그중 한 명에 들게 된 점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셰이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분명히 매우 열정적이고 의욕적인 학생이었고 이후 세상에 나가서도 멋진 일들을 해냈습니다. 저는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는 사람이라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데, 케빈은 이를 모두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케빈이 지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미국 국민을 위한 공직을 잘 수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케빈 워시 고등학교 졸업 앨범 중 일부. 학생 금융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셰이커 고등학교
워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제에 대한 흥미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셰이커 고등학교가 공개한 그의 졸업 앨범 동아리 활동 사진 중엔 그가 ‘학생 금융 위원회(Student Board of Finance)’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프리드먼과 만나다
워시는 뉴욕의 중소 도시를 떠나 서부 실리콘밸리의 중심 대학인 스탠퍼드대에 진학한다. 학부 전공은 공공행정학이었다고 알려졌다. 워시는 당시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학생들과 교류하던 밀턴 프리드먼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유 시장 경제의 옹호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먼은 30여 년 동안 일했던 시카고대에서 1977년 은퇴하고 세상을 뜬 2006년까지 스탠퍼드대에 머물렀다. 춥기로 악명 높은 시카고를 떠나 온화한 캘리포니아로 옮겨 말년을 보낸 셈이다.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 교수. 그는 1977년 시카고대에서 은퇴한 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서 일했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명자는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프리드먼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스탠퍼드대
워시는 프리드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20년 4월 후버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연준의 역할에 대해 묻자 “30년 전 캠퍼스에서 만난 밀턴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엔 밀턴을 언급할 때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앙은행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됐습니다. 그가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경제가 경기 순환을 따라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지, 20년이나 30년에 걸친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앙은행 총재들이 정책 수단을 과도하게 조정하려 한다면 스스로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책 수단’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디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였습니다.”
중앙은행이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워시의 연준 의장 지명 후 그가 과도한 양적 완화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부각됐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워시는 금융 위기나 코로나처럼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연준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동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은행이 평시엔 경제가 자연스럽게 순환하도록 용인하되 위기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자신과 프리드먼의 생각을 워시는 “소수점 이하에 집중하지 말고 소수점 왼쪽에 집중하라”는 말로 요약했다.
후버연구소에 따르면 워시는 대학 4학년 때 총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가 연준 이사로 임명된 직후인 2007년 후버연구소의 게시물에 따르면 워시는 학창 시절 “골프라는 귀중한 사업 기술을 배웠다”고 밝혔다. 과거 보도에 따르면 워시는 골프 클럽 회원권도 여럿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골프를 즐긴다.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트럼프의 눈에 워시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다.
케빈 워시 동창들이 그의 연준 의장 지명 후 소셜미디어에 남긴 글. /페이스북
◇9ᐧ11 테러를 계기로 공직 결심
워시는 1992년 스탠퍼드대 졸업 후 다시 동부로 가서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다. 졸업 직후인 1995년 미국을 대표하는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 입사해 기업 인수ᐧ합병(M&A) 및 구조조정 관련 업무를 주로 맡아 뉴욕에서 일했다. 2002년 이슬람 단체 알카에다의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비극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에 더 봉사할 수 있는 공직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2007년 후버연구소와의 인터뷰 중 발언이다.
“2002년 백악관으로부터 뉴욕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깜짝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바로 백악관에 합류하기로 했죠. 저는 9ᐧ11 테러 당일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모건스탠리 본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테러의 충격으로 모두 귀가 명령이 내려졌는데 일단 걸어서 급히 집에 가면서 무역센터에서 근무하는 모건스탠리 동료 3700명의 소식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여섯 명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가 공직에서 일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백악관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다른 결정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워시는 위에 말한 대로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시의 백악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국가경제위원회 경제 정책 고문으로 합류했다. 당시 월가와 소통이 잘 되는 시장 경제 전문가를 찾던 백악관이 수소문 끝에 그를 발탁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부시 대통령은 4년 후인 2006년 36세였던 워시를 미 연준의 최연소 이사로 지명한다.
2008년 금융위기라는 경제 충격을 맞아 월가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던 워시는 2011년 임기를 7년이나 남기고 자진 사퇴한다. 금융위기를 수습한 후에도 반복되는 막대한 규모의 양적 완화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결국 자리를 내놓는다. 이후엔 모교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억만장자 투자자 스탠리 드러켄밀러의 개인 자산을 굴리는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에 합류해 파트너로도 일해왔다.
뉴욕에서 열린 한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케빈 워시와 배우자 제인 로더의 모습. /X
워시의 가족에 대해선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만난 제인 로더(1995년 졸업)와 2002년 결혼했다는 사실이 가장 부각된다. 제인 로더는 미국을 대표하는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의 상속녀이고 세계 유대인 회의 회장이자 트럼프의 정치 자금을 지원한 거물인 로널드 로더 회장의 둘째 딸이다. 제인 로더의 현재 직함은 에스티로더 마케팅 총괄 겸 최고데이터책임자다.
제인 로더는 결혼 후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로더’라는 가문의 성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보유한 부동산을 팔거나 회사 내 직책이 바뀔 때마다 타블로이드지에 기사가 나곤 하는 유명 인사이지만, 부부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포브스에 따르면 이 부부의 순자산은 약 27억달러(약 3조9000억원)로, 대부분이 로더의 재산이다.
◇한국과도 ‘괜찮은 인연’
워시 지명 후 가장 화제가 된 한국과의 인연은 쿠팡 사외 이사라는 사실이었다. 마침 정보 유출 사태로 쿠팡이 공격받고 있을 즈음이어서 워시의 사외이사직이 부각됐다.
쿠팡을 제외하고도 워시는 한국과 인연이 꽤 있는 편이다. 특히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도 친분이 있다고 알려졌다. 한은 관계자는 “이 총재가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장으로 워싱턴 DC에서 일할 때 현지에서 자주 만났고 총재가 된 후에도 미국 출장 때 여러 차례 교류했다. 이 총재 취임 후 한은 건물도 방문했었다”고 했다. 연준 이사 시절엔 아시아를 담당해 2010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G20 중앙은행 부총재 회의에 이어 부산에서 열린 회의에 벤 버냉키 당시 의장을 대신해 참석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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