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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걸 장군 영정
-삼도 수군절도사(수사)를 역임하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의 곁을 지킨 참모장이 있었다. 흥양(고흥) 출신 정걸(丁傑, 1514-1597)이 그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년이나 대 선배였지만,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며 불멸의 이순신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늘 정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을 불패의 신화로 만든 정걸은 1514년(중종 9)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태어난다. ‘상춘곡’으로 잘 알려진 불우헌 정극인의 5세손이다. 1544년(중종 39)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역임했다. 그가 무과에 급제한 해인 1544년은 이순신이 태어나 차담보대출 기 1년 전이었다.
1555년(명종 10), 왜구가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다. 왜선 70척에 5-7천 명 규모였는데, 조선 건국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를 ‘을묘왜변’, 혹은 ‘달랑왜변’으로 부른다. 당시 정걸은 남도포(진도) 만호였다. 전라도 10여 진이 함락당하고 전라병사와 진도군수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이자율 높은 예금 이때 정걸의 활약이 눈부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도포 만호 정걸이 홀로 진격하여 힘껏 싸워서 전선(全船)의 왜적을 모두 잡았다”라고 기록돼 있음이 그 증거다.
이후 부안현감, 온성부사, 종성부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장흥부사, 전라병사, 창원부사 등을 지낸다. 1555년, 역사에 처음 이름을 남긴 부산 농협 이래 20여 년을 남쪽과 북쪽, 전라도와 경상도의 모든 변방에 그가 버티고 있었다. 바다와 육지의 모든 전투를 다 경험하고 은퇴 후 고향에서 지내던 백전노장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의 간곡한 청을 받게 된다. 당시 정걸의 나이 78세였다.
정걸은 기꺼이 이순신의 조방장(助防將)이 된다. 조방장은 지금의 참모장 쯤에 해당된다. 그는 조 학사지원 방장이 돼 판옥선을 제작하고 불화살을 만드는 등 이순신을 도와 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순신 최초의 전투였던 옥포 해전을 비롯, 한산도·부산포 해전에 참가해 큰 공을 세운다.
1593년, 충청 수사가 된 정걸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에 화살 수만 발을 운반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충청 수사에서 물러난 뒤에도 lg미소금융 그는 한산도에 머물며 이순신을 도왔다.
전라·경상·충청수사와 전라병마사를 다 역임한 백전노장 정걸, 그는 이순신을 지킨 멘토였다.
- 이순신장군 곁을 지키다 이순신이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날은 1591년 2월13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조정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파격적인 승진 인사 때문이었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 직전 이순신의 관직은 종5품 정읍 현감이었다. 전라좌수사 임명 직전 종4품 진도군수와 전라우수영 관할인 종3품 가리포(완도) 첨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부임 도중 다시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종5품 정읍현감에서 곧바로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셈이니,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1576년(선조 9)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한다. 성적도 변변찮은 병과 급제였다. 그리고 내려진 관직이 함경도 변경의 수비를 맡은 정9품 군관이었다. 그의 군 생활의 대부분은 여진족으로부터 국경의 최전선인 함경도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순신의 최초 수군 관직은 1580년(선조 13) 전라좌수영 관할의 발포진 만호(萬戶)였다. 그 기간도 1년 6개월(1580.7-1582.1)이 전부였다. 발포만호로 근무한 1년 6개월은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의 수군 경력 전부였다. 아무리 유능한 장수라 해도 짧은 수군 경력은 전라좌수사 직무를 수행하는데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경상우수사 및 전라좌·우도 수사를 지낸 백전노장 정걸을 참모장격인 조방장으로 삼아 옆에 두었던 연유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살이나 위였고,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던 1576년 당시의 직책은 경상우수사였다. 왜란을 감지하고 정걸의 경험을 높이 산 이순신의 안목도 대단하지만, 이순신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걸의 용기 또한 대단하다.
‘난중일기’ 등 각종 자료에 정걸과 이순신이 만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1592년 2월21일의 ‘난중일기’에는 “맑았다. 공무를 처리한 뒤, 주인(主人)이 자리를 깔아놓아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이 와서 만나고 황숙도(능성현령)도 와서 함께 취했다” 라고 쓰여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어 달도 남지 않은 시점, 고흥을 순찰할 때 조방장 정걸이 함께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정걸의 활약은 대단했다. 정걸은 이순신의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1592년5월7일)부터 참여했다.
병마절도사 정걸 유허비(고흥군 포두면)
병마절도사 정걸 신도비(고흥군 포두면)
‘호남절의록’에 “새벽 전투에서 정걸 장군이 또 와서 협력하고 싸워서 적을 막고 호위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 해 5월29일 치러진 사천 전투 당시 정걸은 이순신을 대신해서 본영(전라좌수영)을 지킨다.
7월8일,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도대첩에서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정걸은 9월2일 부산포해전에도 참전했다.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는 “남쪽 해안의 세 수군절도사(이순신,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은 연합작전을 펴서,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적의 북진을 완전히 차단한 전과를 올렸으나 이 작전에서 정걸 장군의 말을 듣지 않은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다.
부산포 현장에 가장 먼저 조방장 정걸과 녹도만호 정운이 도착했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이에 정걸은 정운에게 “날도 저물고 적의 기세도 등등하니 후퇴했다가 내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정운은 듣지 않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싸우다 적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다.
‘이충무공 전서’에서 “정운이 정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정걸은 1593년 2월, 79세의 고령에 다시 충청 수사로 임명된다.
정걸이 충청수사에 임명되자 이순신은 그에게 또 도움을 청한다. 1593년 5월 초순, 서울에서 퇴각하는 왜적들이 남해안으로 집결하자 이순신 장군은 “삼가 아뢰옵니다.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하는 이때……청하건대 충청도 수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하소서.”라는 장계(狀啓)를 보낸다.
정걸은 장계를 받자마자 곧장 이순신의 진중을 찾는다. ‘난중일기’ 1593년 6월1일자에는 “충청 수사 정영공(정걸)이 왔다”, 9월 5일자에는 “식후에 정수사(정걸)의 배 옆에 나아가 정박하고 종일 이야기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순신이 종일 작전을 함께 논의했던 분이 정걸이었다.
정걸은 충청 수사에서 물러났지만,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을 도왔다. 이는 1594년(선조 27) 9월, 장수들에게 물품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자는 다음 글 “전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로 나랏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 진중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아울러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될 것입니다”라는 비변사의 건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정걸 장군 표지석(여수 이순신 광장)
-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이 되다 행주대첩은 1593년 2월12일, 전라도 순찰사였던 권율이 처영 등 승군과 힘을 합쳐 1만 병력으로 평양에서 퇴각한 3만여 명의 일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전투다. 행주대첩은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만들어 입고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운 전투로도 유명하다.
행주대첩의 영웅은 이치(梨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전라도 관군을 이끈 권율이다.
권율이 주장이었으므로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불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행주대첩의 영웅은 권율만은 아니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전라도 관군이 중심이었으며, 장성 출신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이 또 있다. 이순신의 멘토였던 충청수사 정걸이 그다.
그가 행주대첩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그날 묘시(오전 5-7시)에서부터 신시(오후 3-5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 같이 싸웠다”고 기록돼 있다.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이끈 전라도 관군이 승리하는 큰 힘이 된 것은 장성 출신 변이중의 화차와 두 척의 배에 가득 실은 충청 수사 정걸이 보낸 화살이었다.
‘호남절의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주력함대였던 판옥선을 남도포(진도) 만호 시절 정걸이 설계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 향토 사단 이름이 되다 이순신 장군의 숨은 멘토 정걸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인 1597년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오늘 정걸의 흔적은 곳곳에 묻어 있다. 그가 태어난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에는 정극인 등과 함께 그를 모신 사당, 안동사(雁洞祠)가 있다. 마한시대 고분으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 안동고분 바로 앞이다.
정걸 장군을 모신 사당, 안동사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진남관 앞 이순신 광장에는 이순신을 도운 15명의 인물이 돌에 새겨져 있는데, 그중 한 분이 정걸이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를 지낸 고흥 발포진의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는 그의 초상화와 교지 등이 전시돼 있다.
뿐만 아니다. 고흥의 향토부대인 7391부대 제2대대는 2015년 ‘정걸 대대’로 명칭을 변경했다. 지역 출신의 호국 영웅들을 상기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부대원들의 호국 의지를 높이려고 공모를 통해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정걸이 그 주인공이 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이순신 연구가인 윤동한은 2019년 ‘충무공 이순신의 멘토, 80세 현역 정걸 장군’이란 책을 펴 ‘이순신의 포용’과 ‘정걸의 나눔’의 리더십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힘이었음을 설파했다.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정걸, 오늘 그가 다시 사랑받는 이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삼도 수군절도사(수사)를 역임하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의 곁을 지킨 참모장이 있었다. 흥양(고흥) 출신 정걸(丁傑, 1514-1597)이 그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년이나 대 선배였지만,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며 불멸의 이순신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늘 정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을 불패의 신화로 만든 정걸은 1514년(중종 9)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태어난다. ‘상춘곡’으로 잘 알려진 불우헌 정극인의 5세손이다. 1544년(중종 39)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역임했다. 그가 무과에 급제한 해인 1544년은 이순신이 태어나 차담보대출 기 1년 전이었다.
1555년(명종 10), 왜구가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다. 왜선 70척에 5-7천 명 규모였는데, 조선 건국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를 ‘을묘왜변’, 혹은 ‘달랑왜변’으로 부른다. 당시 정걸은 남도포(진도) 만호였다. 전라도 10여 진이 함락당하고 전라병사와 진도군수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이자율 높은 예금 이때 정걸의 활약이 눈부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도포 만호 정걸이 홀로 진격하여 힘껏 싸워서 전선(全船)의 왜적을 모두 잡았다”라고 기록돼 있음이 그 증거다.
이후 부안현감, 온성부사, 종성부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장흥부사, 전라병사, 창원부사 등을 지낸다. 1555년, 역사에 처음 이름을 남긴 부산 농협 이래 20여 년을 남쪽과 북쪽, 전라도와 경상도의 모든 변방에 그가 버티고 있었다. 바다와 육지의 모든 전투를 다 경험하고 은퇴 후 고향에서 지내던 백전노장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의 간곡한 청을 받게 된다. 당시 정걸의 나이 78세였다.
정걸은 기꺼이 이순신의 조방장(助防將)이 된다. 조방장은 지금의 참모장 쯤에 해당된다. 그는 조 학사지원 방장이 돼 판옥선을 제작하고 불화살을 만드는 등 이순신을 도와 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순신 최초의 전투였던 옥포 해전을 비롯, 한산도·부산포 해전에 참가해 큰 공을 세운다.
1593년, 충청 수사가 된 정걸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에 화살 수만 발을 운반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충청 수사에서 물러난 뒤에도 lg미소금융 그는 한산도에 머물며 이순신을 도왔다.
전라·경상·충청수사와 전라병마사를 다 역임한 백전노장 정걸, 그는 이순신을 지킨 멘토였다.
- 이순신장군 곁을 지키다 이순신이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날은 1591년 2월13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조정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파격적인 승진 인사 때문이었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 직전 이순신의 관직은 종5품 정읍 현감이었다. 전라좌수사 임명 직전 종4품 진도군수와 전라우수영 관할인 종3품 가리포(완도) 첨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부임 도중 다시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종5품 정읍현감에서 곧바로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셈이니,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1576년(선조 9)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한다. 성적도 변변찮은 병과 급제였다. 그리고 내려진 관직이 함경도 변경의 수비를 맡은 정9품 군관이었다. 그의 군 생활의 대부분은 여진족으로부터 국경의 최전선인 함경도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순신의 최초 수군 관직은 1580년(선조 13) 전라좌수영 관할의 발포진 만호(萬戶)였다. 그 기간도 1년 6개월(1580.7-1582.1)이 전부였다. 발포만호로 근무한 1년 6개월은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의 수군 경력 전부였다. 아무리 유능한 장수라 해도 짧은 수군 경력은 전라좌수사 직무를 수행하는데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경상우수사 및 전라좌·우도 수사를 지낸 백전노장 정걸을 참모장격인 조방장으로 삼아 옆에 두었던 연유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살이나 위였고,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던 1576년 당시의 직책은 경상우수사였다. 왜란을 감지하고 정걸의 경험을 높이 산 이순신의 안목도 대단하지만, 이순신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걸의 용기 또한 대단하다.
‘난중일기’ 등 각종 자료에 정걸과 이순신이 만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1592년 2월21일의 ‘난중일기’에는 “맑았다. 공무를 처리한 뒤, 주인(主人)이 자리를 깔아놓아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이 와서 만나고 황숙도(능성현령)도 와서 함께 취했다” 라고 쓰여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어 달도 남지 않은 시점, 고흥을 순찰할 때 조방장 정걸이 함께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정걸의 활약은 대단했다. 정걸은 이순신의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1592년5월7일)부터 참여했다.
병마절도사 정걸 유허비(고흥군 포두면)
병마절도사 정걸 신도비(고흥군 포두면)
‘호남절의록’에 “새벽 전투에서 정걸 장군이 또 와서 협력하고 싸워서 적을 막고 호위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 해 5월29일 치러진 사천 전투 당시 정걸은 이순신을 대신해서 본영(전라좌수영)을 지킨다.
7월8일,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도대첩에서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정걸은 9월2일 부산포해전에도 참전했다.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는 “남쪽 해안의 세 수군절도사(이순신,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은 연합작전을 펴서,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적의 북진을 완전히 차단한 전과를 올렸으나 이 작전에서 정걸 장군의 말을 듣지 않은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다.
부산포 현장에 가장 먼저 조방장 정걸과 녹도만호 정운이 도착했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이에 정걸은 정운에게 “날도 저물고 적의 기세도 등등하니 후퇴했다가 내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정운은 듣지 않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싸우다 적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다.
‘이충무공 전서’에서 “정운이 정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정걸은 1593년 2월, 79세의 고령에 다시 충청 수사로 임명된다.
정걸이 충청수사에 임명되자 이순신은 그에게 또 도움을 청한다. 1593년 5월 초순, 서울에서 퇴각하는 왜적들이 남해안으로 집결하자 이순신 장군은 “삼가 아뢰옵니다.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하는 이때……청하건대 충청도 수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하소서.”라는 장계(狀啓)를 보낸다.
정걸은 장계를 받자마자 곧장 이순신의 진중을 찾는다. ‘난중일기’ 1593년 6월1일자에는 “충청 수사 정영공(정걸)이 왔다”, 9월 5일자에는 “식후에 정수사(정걸)의 배 옆에 나아가 정박하고 종일 이야기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순신이 종일 작전을 함께 논의했던 분이 정걸이었다.
정걸은 충청 수사에서 물러났지만,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을 도왔다. 이는 1594년(선조 27) 9월, 장수들에게 물품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자는 다음 글 “전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로 나랏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 진중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아울러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될 것입니다”라는 비변사의 건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정걸 장군 표지석(여수 이순신 광장)
-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이 되다 행주대첩은 1593년 2월12일, 전라도 순찰사였던 권율이 처영 등 승군과 힘을 합쳐 1만 병력으로 평양에서 퇴각한 3만여 명의 일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전투다. 행주대첩은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만들어 입고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운 전투로도 유명하다.
행주대첩의 영웅은 이치(梨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전라도 관군을 이끈 권율이다.
권율이 주장이었으므로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불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행주대첩의 영웅은 권율만은 아니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전라도 관군이 중심이었으며, 장성 출신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이 또 있다. 이순신의 멘토였던 충청수사 정걸이 그다.
그가 행주대첩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그날 묘시(오전 5-7시)에서부터 신시(오후 3-5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 같이 싸웠다”고 기록돼 있다.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이끈 전라도 관군이 승리하는 큰 힘이 된 것은 장성 출신 변이중의 화차와 두 척의 배에 가득 실은 충청 수사 정걸이 보낸 화살이었다.
‘호남절의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주력함대였던 판옥선을 남도포(진도) 만호 시절 정걸이 설계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 향토 사단 이름이 되다 이순신 장군의 숨은 멘토 정걸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인 1597년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오늘 정걸의 흔적은 곳곳에 묻어 있다. 그가 태어난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에는 정극인 등과 함께 그를 모신 사당, 안동사(雁洞祠)가 있다. 마한시대 고분으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 안동고분 바로 앞이다.
정걸 장군을 모신 사당, 안동사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진남관 앞 이순신 광장에는 이순신을 도운 15명의 인물이 돌에 새겨져 있는데, 그중 한 분이 정걸이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를 지낸 고흥 발포진의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는 그의 초상화와 교지 등이 전시돼 있다.
뿐만 아니다. 고흥의 향토부대인 7391부대 제2대대는 2015년 ‘정걸 대대’로 명칭을 변경했다. 지역 출신의 호국 영웅들을 상기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부대원들의 호국 의지를 높이려고 공모를 통해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정걸이 그 주인공이 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이순신 연구가인 윤동한은 2019년 ‘충무공 이순신의 멘토, 80세 현역 정걸 장군’이란 책을 펴 ‘이순신의 포용’과 ‘정걸의 나눔’의 리더십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힘이었음을 설파했다.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정걸, 오늘 그가 다시 사랑받는 이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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