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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소설의 본 마련된 또 차츰 인삿말이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의 1차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합수부장 자리를 발판 삼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쿨사이다릴게임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고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본보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한다. 당시 내란 세력인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 언론검열단을 운영하며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을 사전 검열해 불편한 진실을 야마토게임연타 모두 삭제했다. 12·12 군사반란의 밤과 5·18 광주의 절규, 경제난과 노동 탄압, 전염병 때문에 신음했던 국민의 아픔 등이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바다이야기예시 부 교수가 검열단에서 일했던 부친이 모아두었던 삭제 기사 복사본을 본보에 전달했으며, 이를 토대로 '계엄과 검열' 시리즈를 통해 1979년 10월~1981년 1월, 삭제 기사와 취재 기록을 복원한다. 이 기사들이 제때 보도됐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맞섰던 당시 본보 바다이야기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검열당한다고 해서 취재를 안 한 것 없었다, 모두 취재했다"(본보 31기 신연숙 해직 기자), "지금은 못 실어도 언젠가 실을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5·18을 취재했다"(본보 37기유동성 기자) 등의 회한을 들을 수 있었다.
엄혹한 검열 때문이라고 해도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한국일보의 릴게임몰 사죄의 마음을 담아 시리즈를 시작한다. 되살려낸 기사 전체는 추후 한국일보 홈페이지에 구축할 아카이브(기록 보관소)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일보는 1979년 10월~1981년 1월 비상계엄 당시 검열 삭제당한 본보 기사 352개를 입수해 분석했다. 사진은 관련 자료 복사본을 깔아놓고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 강예진 기자
첫 회로 1979년 겨울날로 돌아간다. 12·12 내란의 밤이었다. 한국일보는 이 밤을 빠르고 깊게 취재했지만 독자들은 기사를 볼 수 없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기사를 마구잡이로 삭제한 탓이다. 전두환 세력이 자행한 권력 찬탈의 서막이었던 12·12 군사반란 당일 한국일보 기사 원고를 입수해 46년 만에 공개한다. 군부가 '국민 여론을 자극해 동요할 수 있다'며 전면 삭제시킨 기사들이다.
<1>12·12 내란 당시 1면 게재 예정 기사
12일 하오 7시 35분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산8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총격전이 벌어져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밤 10시 현재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에 의하면 하오 7시 30분께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1개 분대 병력이 공관 쪽으로 접근, 공관 경비병들과 충돌·총격전이 시작됐으며 하오 9시 30분 공관 사태는 끝나고 정 총장이 공격 병력에 의해 억류된 것으로 보인다.(①)
공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순천향병원 응급실에는 9시 3분 오른쪽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정 총장의 부관 이재천 소령이 앰뷸런스에 실려와 응급 처치를 받고 있다. 이날 밤 8시 30분 전군과 전경찰에는 비상령이 발동했으며 1시간 만인 9시 30분 비상령이 풀렸다.(②)
그래픽=김대훈 기자
공관 주변인 남산 1호 터널에서 제3한강교로 나가는 인근 도로는 사고 직후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에 의해 한때 교통이 차단됐으며 9시 15분 수경사 병력을 실은 트럭 5대와 탱크 2대, 앰뷸런스 4대 등이 도착, 대기 중이다.
8시 40분 남산 1호 터널을 지나다 교통 차단으로 현장을 목격한 사람에 의하면 차가 공관 못 미친 고가도로 위에서 정지하자 완전무장한 병력이 터널 쪽으로 접근해 오면서 『차량들은 불을 끄라』고 명령했으며 그들 병력은 공관 쪽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렸다.
충돌 직후 공관 일대에는 정전이 됐으며 총성은 9시 15분까지 들렸다. 공관 부근의 차량 통행 제한은 이날 하오 9시 30분 경찰 비상령이 풀리면서 같이 풀렸으나 고가 다리 밑 3거리와 단국대학 사이는 계속 통행이 금지됐다. 한편, 하오 9시 55분께 군 앰뷸런스 1대가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와 보광동 쪽으로 갔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측 반란군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기습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한 공관 경비병이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2>육군 참모총장 공관 및 국방부 현장 취재 기사
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날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습격한 병력은 계엄사령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지휘하는 합수반 병력으로 규모는 버스 2대였으며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에 의하면 이들 병력이 정 총장 공관에 도착한 시각은 하오 7시 40분이었으며 총장 공관을 경비하던 소수의 병력과 충돌됐다.
이 소식통은 정 총장은 이들 합수반 병력에 의해 체포됐으며 체포 이유는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됐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이날 낮, 이 같은 사실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 정 총장 체포의 재가를 얻은 것으로 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③) 정 총장은 체포된 당시 총상을 입었으며 합동수사본부에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 20분, 수 발의 총성이 도심을 울렸다. 퇴근길 시민들은 이 소리에 크게 놀랐다. 사진은 시민들이 총성이 울린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공관촌 인근에 몰려들어 상황을 살피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방부, 육군본부*
정문을 비롯한 각 문에는 모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집총한 사병들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또, 정문에는 겨우 차량 1대만 통과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놨는데 장성급 차량만 통과시키고 있었다.
또 하오 9시 45분께는 탄약상자로 보이는 무거운 상자를 멘 7, 8명의 사병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민간인의 접근은 전면 통제됐다. 국방부 청사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으나 커튼을 쳐 희미했다. 어떤 군 장성 차량은 신호를 위반, 청사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12·12 군사반란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3>용산 일대 현장 취재 기사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슈퍼체인 옆 주택가 외무부 장관 공관, 국방부 장관 공관, 해군 참모총장 공관, 말레이시아 대사관 등이 밀집해 있는 남산 1호 터널 한남동 쪽 입구와 단국대학 쪽 일대는 12일 하오 7시 40분께부터 하오 9시 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통행이 전면금지된 채 무장 군인과 경찰의 경비가 삼엄했다.
총장 공관 부근 주택가에서는 하오 9시 10분께까지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으며 한동안 공포 분위기였다. 이 사태로 영동과 경부고속도로 쪽으로 퇴근하는 차량이 모두 막혀 제1한강교의 잠수교로 우회했으며 교통혼잡이 많았다.
내란에 성공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도심에 중화기를 배치한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 중앙청(현 서울시청 자리) 주변에 장갑차가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한편 경찰은 이날 하오 9시 30분께 현장 부근의 교통통제를 풀었으나 한동안 단국대와 3거리까지의 교통만은 통제했다.
한편 이날 하오 8시 10분부터 30분까지 20분 사이에 탱크 4대가 남산 1호 터널을 통해 공관 있는 쪽으로 갔으며 거의 같은 시각에 병력을 실은 트럭 5대가 통과했다.(④) 장충동, 장충체육관 입구 타워호텔 입구에는 이날 하오 7시 40분께부터 무장 군인과 헌병이 한남동 쪽으로 향하는 차량을 통행 금지시켰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헌병들이 마이크로 『한남동 쪽은 위험지역이다』 『모든 차량은 약수동과 남산순환도로 쪽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고 한남동 쪽으로 접근하려는 차량들에게 총을 겨누며 차량통행을 통제시켰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한남초등학교 앞에서 제3한강교 쪽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에 보행인들의 통행만을 허용했다.
<4>교통 통제에 따른 혼란 스케치 기사
12일 밤 11시를 전후해서 제3한강교를 비롯한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한강의 12개 다리가 모두 차량통행이 차단돼 차를 타고 강남으로 퇴근하던 많은 시민들이 강북에서 발이 묶였다. 당국은 차량 통행금지와 함께 시민들의 귀가 편의를 위해 보행자의 통행만은 허가, 대부분 시민들이 걸어서 강을 건넜다. 또, 강북에는 다리를 건너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보행자에 대해 통금을 해제했으며 13일 새벽까지도 택시, 버스 등의 통행을 허가했다.
1979년 12월 12일, 퇴근길 갑작스런 교통 통제 탓에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가 꽉 막혀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편 이날 하오 7시 40분께부터 하오 9시 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남산 1호 터널 한남동 쪽의 교통이 차단돼 한남동 일대의 교통이 대혼란을 빚었고 대부분 차량은 성수대교, 잠수대교, 제1한강교 등 우회 통행했다.
특히 제3한강교를 지나야 귀가할 수 있는 영동 시민들은 이날 하오 8시께부터 잠수교, 제1한강교, 광장교 등을 우회해 귀가했다. 이날 밤 본사를 비롯한 시내 각 언론기관에는 강다리가 막혔으니 무슨 일이냐는 문의전화가 밤늦게까지 걸려 왔었다.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1979년 12월 14일 자 한국일보 1면을 읽고 있다. 당시 한국일보를 포함한 언론들은 12·12 군사반란의 전말을 보도하는 대신 반란 세력에 포섭된 노재현 국방 장관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① 46년 만의 보도
•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45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기자 admin@slotmega.info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쿨사이다릴게임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고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본보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한다. 당시 내란 세력인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 언론검열단을 운영하며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을 사전 검열해 불편한 진실을 야마토게임연타 모두 삭제했다. 12·12 군사반란의 밤과 5·18 광주의 절규, 경제난과 노동 탄압, 전염병 때문에 신음했던 국민의 아픔 등이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바다이야기예시 부 교수가 검열단에서 일했던 부친이 모아두었던 삭제 기사 복사본을 본보에 전달했으며, 이를 토대로 '계엄과 검열' 시리즈를 통해 1979년 10월~1981년 1월, 삭제 기사와 취재 기록을 복원한다. 이 기사들이 제때 보도됐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맞섰던 당시 본보 바다이야기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검열당한다고 해서 취재를 안 한 것 없었다, 모두 취재했다"(본보 31기 신연숙 해직 기자), "지금은 못 실어도 언젠가 실을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5·18을 취재했다"(본보 37기유동성 기자) 등의 회한을 들을 수 있었다.
엄혹한 검열 때문이라고 해도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한국일보의 릴게임몰 사죄의 마음을 담아 시리즈를 시작한다. 되살려낸 기사 전체는 추후 한국일보 홈페이지에 구축할 아카이브(기록 보관소)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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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로 1979년 겨울날로 돌아간다. 12·12 내란의 밤이었다. 한국일보는 이 밤을 빠르고 깊게 취재했지만 독자들은 기사를 볼 수 없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기사를 마구잡이로 삭제한 탓이다. 전두환 세력이 자행한 권력 찬탈의 서막이었던 12·12 군사반란 당일 한국일보 기사 원고를 입수해 46년 만에 공개한다. 군부가 '국민 여론을 자극해 동요할 수 있다'며 전면 삭제시킨 기사들이다.
<1>12·12 내란 당시 1면 게재 예정 기사
12일 하오 7시 35분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산8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총격전이 벌어져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밤 10시 현재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에 의하면 하오 7시 30분께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1개 분대 병력이 공관 쪽으로 접근, 공관 경비병들과 충돌·총격전이 시작됐으며 하오 9시 30분 공관 사태는 끝나고 정 총장이 공격 병력에 의해 억류된 것으로 보인다.(①)
공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순천향병원 응급실에는 9시 3분 오른쪽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정 총장의 부관 이재천 소령이 앰뷸런스에 실려와 응급 처치를 받고 있다. 이날 밤 8시 30분 전군과 전경찰에는 비상령이 발동했으며 1시간 만인 9시 30분 비상령이 풀렸다.(②)
그래픽=김대훈 기자
공관 주변인 남산 1호 터널에서 제3한강교로 나가는 인근 도로는 사고 직후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에 의해 한때 교통이 차단됐으며 9시 15분 수경사 병력을 실은 트럭 5대와 탱크 2대, 앰뷸런스 4대 등이 도착, 대기 중이다.
8시 40분 남산 1호 터널을 지나다 교통 차단으로 현장을 목격한 사람에 의하면 차가 공관 못 미친 고가도로 위에서 정지하자 완전무장한 병력이 터널 쪽으로 접근해 오면서 『차량들은 불을 끄라』고 명령했으며 그들 병력은 공관 쪽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렸다.
충돌 직후 공관 일대에는 정전이 됐으며 총성은 9시 15분까지 들렸다. 공관 부근의 차량 통행 제한은 이날 하오 9시 30분 경찰 비상령이 풀리면서 같이 풀렸으나 고가 다리 밑 3거리와 단국대학 사이는 계속 통행이 금지됐다. 한편, 하오 9시 55분께 군 앰뷸런스 1대가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와 보광동 쪽으로 갔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측 반란군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기습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한 공관 경비병이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2>육군 참모총장 공관 및 국방부 현장 취재 기사
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날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습격한 병력은 계엄사령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지휘하는 합수반 병력으로 규모는 버스 2대였으며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에 의하면 이들 병력이 정 총장 공관에 도착한 시각은 하오 7시 40분이었으며 총장 공관을 경비하던 소수의 병력과 충돌됐다.
이 소식통은 정 총장은 이들 합수반 병력에 의해 체포됐으며 체포 이유는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됐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이날 낮, 이 같은 사실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 정 총장 체포의 재가를 얻은 것으로 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③) 정 총장은 체포된 당시 총상을 입었으며 합동수사본부에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 20분, 수 발의 총성이 도심을 울렸다. 퇴근길 시민들은 이 소리에 크게 놀랐다. 사진은 시민들이 총성이 울린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공관촌 인근에 몰려들어 상황을 살피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방부, 육군본부*
정문을 비롯한 각 문에는 모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집총한 사병들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또, 정문에는 겨우 차량 1대만 통과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놨는데 장성급 차량만 통과시키고 있었다.
또 하오 9시 45분께는 탄약상자로 보이는 무거운 상자를 멘 7, 8명의 사병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민간인의 접근은 전면 통제됐다. 국방부 청사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으나 커튼을 쳐 희미했다. 어떤 군 장성 차량은 신호를 위반, 청사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12·12 군사반란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3>용산 일대 현장 취재 기사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슈퍼체인 옆 주택가 외무부 장관 공관, 국방부 장관 공관, 해군 참모총장 공관, 말레이시아 대사관 등이 밀집해 있는 남산 1호 터널 한남동 쪽 입구와 단국대학 쪽 일대는 12일 하오 7시 40분께부터 하오 9시 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통행이 전면금지된 채 무장 군인과 경찰의 경비가 삼엄했다.
총장 공관 부근 주택가에서는 하오 9시 10분께까지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으며 한동안 공포 분위기였다. 이 사태로 영동과 경부고속도로 쪽으로 퇴근하는 차량이 모두 막혀 제1한강교의 잠수교로 우회했으며 교통혼잡이 많았다.
내란에 성공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도심에 중화기를 배치한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 중앙청(현 서울시청 자리) 주변에 장갑차가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한편 경찰은 이날 하오 9시 30분께 현장 부근의 교통통제를 풀었으나 한동안 단국대와 3거리까지의 교통만은 통제했다.
한편 이날 하오 8시 10분부터 30분까지 20분 사이에 탱크 4대가 남산 1호 터널을 통해 공관 있는 쪽으로 갔으며 거의 같은 시각에 병력을 실은 트럭 5대가 통과했다.(④) 장충동, 장충체육관 입구 타워호텔 입구에는 이날 하오 7시 40분께부터 무장 군인과 헌병이 한남동 쪽으로 향하는 차량을 통행 금지시켰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헌병들이 마이크로 『한남동 쪽은 위험지역이다』 『모든 차량은 약수동과 남산순환도로 쪽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고 한남동 쪽으로 접근하려는 차량들에게 총을 겨누며 차량통행을 통제시켰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한남초등학교 앞에서 제3한강교 쪽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에 보행인들의 통행만을 허용했다.
<4>교통 통제에 따른 혼란 스케치 기사
12일 밤 11시를 전후해서 제3한강교를 비롯한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한강의 12개 다리가 모두 차량통행이 차단돼 차를 타고 강남으로 퇴근하던 많은 시민들이 강북에서 발이 묶였다. 당국은 차량 통행금지와 함께 시민들의 귀가 편의를 위해 보행자의 통행만은 허가, 대부분 시민들이 걸어서 강을 건넜다. 또, 강북에는 다리를 건너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보행자에 대해 통금을 해제했으며 13일 새벽까지도 택시, 버스 등의 통행을 허가했다.
1979년 12월 12일, 퇴근길 갑작스런 교통 통제 탓에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가 꽉 막혀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편 이날 하오 7시 40분께부터 하오 9시 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남산 1호 터널 한남동 쪽의 교통이 차단돼 한남동 일대의 교통이 대혼란을 빚었고 대부분 차량은 성수대교, 잠수대교, 제1한강교 등 우회 통행했다.
특히 제3한강교를 지나야 귀가할 수 있는 영동 시민들은 이날 하오 8시께부터 잠수교, 제1한강교, 광장교 등을 우회해 귀가했다. 이날 밤 본사를 비롯한 시내 각 언론기관에는 강다리가 막혔으니 무슨 일이냐는 문의전화가 밤늦게까지 걸려 왔었다.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1979년 12월 14일 자 한국일보 1면을 읽고 있다. 당시 한국일보를 포함한 언론들은 12·12 군사반란의 전말을 보도하는 대신 반란 세력에 포섭된 노재현 국방 장관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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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46년 만의 보도
•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45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기자 admin@slotmeg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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