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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한민국은 '달리기(러닝) 열풍'이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한 러닝 열풍은 이제 단순한 운동이 아닌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밤낮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러닝 크루(running crew) 행렬을 만나는 것 또한 낯설지 않은 상황. 러닝 열풍에 운동화나 고글, 플라스틱 물병을 파는 스포츠 브랜드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보행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부 '러닝 크루'의 민폐 행위에 지자체까지 나섰으니 말 다했다. 인간은 왜 달리는가! 마침, 달리기를 소재로 한 한일 애니메이션 두 편이 동시기에 개봉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일본에서 달려온 《100미터.》, 다른 하나는 40년 만에 돌아온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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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00미터.》 스틸컷 ⓒ㈜미디어캐슬


철학적 메시지 다량 함유한 《100미터.》
《100미터.》는 제목 그대로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다뤘다. 100미터 달리기에 대한 필자의 첫 기억은 '벤 존슨'이다. 서울 파산상담전문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이 들끓어오르던 1988년,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다닌 종목은 미국 칼 루이스와 캐나다 벤 존슨의 '세기의 대결'로 압축된 100미터 남자 달리기였다. 결과는 벤 존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9초79'라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에 등극한 벤 존슨은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이 검출돼 사흘 만에 금메달을 반 보험영업 납해야 했다.
이 사건은 37년이 지난 지금도 사상 최악의 도핑 스캔들 중 하나로 회자된다. 2015년 반(反)도핑 운동가로 변신해 서울을 다시 찾은 벤 존슨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성공의 지표는 돈이다. 기업의 후원을 더 많이 받으려면 기록이 좋아야 한다. 도핑 유혹에 빠지는 이유다."
모든 육상선수 w저축은행 의 성공 지표가 돈은 아닐 것이다. 켄지 이와이사와 감독이 그려낸 《100미터.》는 각기 다른 목표로 트랙 위에 선 100미터 선수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금 더 자세하게 줄거리를 살펴보자. 열세 살 토가시는 100미터 육상선수다. 그에겐 경쟁자가 없다. 타고난 재능으로 또래 친구들을 일찍이 앞질렀기 때문이다. 늘 1등만 해서인지 우승에 대한 감흥이 별로 복리이자계산방법 없다. 그래서 토가시는 말한다. "누구랑 달리든 재미있었던 적이 없어."
그런 토가시 앞에 전학생 코미야가 나타난다. 달리기에 재능은 없지만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게 마음에 들어 달리는' 코미야는 토가시로부터 달리는 법을 전수받으며 실력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토가시는 그런 코미야를 통해 처음으로 달리기에 대한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코미야의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세월이 흘러 토가시는 전국고등학교 육상대회에서 코미야와 재회한다. 자신보다 실력이 더 앞서 있는 코미야를.
《100미터.》는 '타고난 천재'(토가시)와 '노력의 상징'(코미야)으로 대비되는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관계를 '초등학교 시절-고등학교 시절-20대 후반' 시점으로 나눠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만 그리는 건 아니다. 일본 국가대표 육상선수였던 아버지의 명성에 짓눌린 니가미, 희로애락을 껴안고 달리며 오랫동안 정상을 지켜온 자이츠, 만년 2위지만 자신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믿으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 카이도까지, 달리기를 대하는 자세가 다른 다섯 인물을 통해 스포츠 대결을 넘어선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고든다.
그러니까 이 애니메이션이 닿고자 하는 목표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왜 달리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왜 달리는가"라는 물음은 삶 전체에 대한 은유로 나아간다. 이들에게 "왜 달리는가"의 다른 말은 "왜 사는가"다. "100미터라는 그 짧은 순간에 인생이 응축돼 있다"고 말하는 자이츠의 대사에 이 애니메이션의 자세가 함축돼 있다.
움직이는 대상을 실사로 촬영한 후 그 필름을 베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로토스코핑(Rotoscoping)' 기법을 채택한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덕분에 달릴 때 느껴지는 인물들의 역동성이 상당하다.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으로 제44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영화 오리지널 음악상을 수상한 감독의 이력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음악 사용 또한 뛰어나다.
다만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전에는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캐릭터들의 정체성은 분명 운동선수지만, 속은 죄다 '애늙은이 철학자' 같은 면이 있어서다. 대사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그 속에 담긴 인생에 대한 은유도 깊기에, 아이들과 편하게 관람하려는 부모들이라면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숙지할 필요가 있겠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겐 스포츠 만화 이상의 감흥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스틸컷 ⓒ(주)NEW


추억은 방울방울,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100미터.》가 가족 단위 관객들에게 허들이 높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렇다면 40년 만에 극장판으로 돌아온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하니는 일단 중년 관객들에겐 익숙한 이름이다. 만화잡지 《보물섬》에 1985년 첫 연재된 후 1988년 KBS TV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됐던 《달려라 하니》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추억의 만화다.
어릴 적 병으로 엄마를 잃고 외톨이가 된 주인공 하니가 홍두깨 선생을 만나 세계적인 육상선수로 성장한다는 이야기에 많은 이가 웃고 울었더랬다. 가수 이선희가 부른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 이 세상 끝까지 / 달려라 하니"라는 주제가를 기억하는 이도 많을 테다.
이번 극장판이 40년 전과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제목인 '나쁜계집애'에서 엿볼 수 있다. 하니가 주인공인 원작과 달리 나애리가 중심이 돼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가 원작의 주인공 강백호가 아닌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했던 사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중학생이던 하니와 나애리가 고등학생이 된 것도 변화의 지점이다. 무엇보다 경쟁 상대였던 나애리와 하니가 동료로 거듭나는 설정이 이번 애니메이션의 '킥'이다.
두 캐릭터의 우정을 위해 극장판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닌, 'S런'(에스런)이라는 새로운 종목을 내세웠다. 에스런은 도심 곳곳을 배경으로 대결하는 '스트릿 러닝'으로, 덕분에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엔 홍대·이태원·한강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실제 공간들이 배경으로 깔려 반가움을 안긴다. 《100미터.》처럼 "왜 달리는가"에 대한 물음과 해답도 담겼다. 다만 관객은 40년이나 나이를 먹었는데 캐릭터들이 위기를 겪고 화해해 나가는 과정의 묘사는 다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면이 있다. 2025년 관객 눈높이로 보기엔 서사가 다소 평면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추억은 힘이 세다. 단순한 코치를 넘어 인생 멘토로 활약하는 홍두깨와 그의 피앙세인 고은애 등을 만나는 반가움이 크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성우들이 대폭 바뀌었지만,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3부작을 목표로 제작됐다. 이번 편의 흥행이 2·3편 제작 여부를 가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