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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 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트레킹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순간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펼쳤다. 히말라야 골짜기를 살짝 눈여겨봤다가 유럽 미봉들을 돌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3대 트레일과 남미의 이름도 잘 안 알려진 곳들도 훑었다. 그렇게 돌 쿨사이다릴게임 고 돌다가 툭 눈길에 걸린 곳의 이름을 뱉었다.
"뉴질랜드요. 밀포드 트레킹이 정말 유명하지 않나요?"
그러자 그는 "하!" 하고 기가 차다는 듯 웃음 짓는다. 들어보니 밀포드는 "사기"란다. 영국의 한 잡지사 기자가 태어나 처음 해외트레킹을 갔는데 그게 하필 밀포드였고, 그걸 보고 나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바다이야기게임2 이라고 기사를 냈단다. 그 기사를 뉴질랜드 정부가 활용하면서 지금의 밀포드 트레킹의 명성이 생겼다며, 실제로는 서덜랜드 폭포와 1500m쯤 되는 고개까지 두 개 빼고는 별게 없다는 설명이다. 진짜 뉴질랜드의 자연을 경험하고 싶으면 뉴질랜드 최고봉인 마운트쿡 주변을 트레킹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릴게임갓 직접 두 발로 전 세계 트레일을 걸어보고, 두 눈으로 꼼꼼히 봐야 내릴 수 있는 신랄한 평가였다. 그런 그이기에 쓸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직접 걸어 보고 선정한 세계 100대 트레일이다. 일단 25개의 길을 담은 1권, <세계 100대 트레일 1ㅣ걸음의 축제>가 발간됐고, 이어 3개의 책이 더 나와 100개를 완성할 예정이다.
세계 10 야마토게임예시 0대 트레일을 선정, 완주하겠다는 가늠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는 그의 이름은 박춘기다. 그의 이름과 얼굴이 낯익다면, 맞다. TV 프로그램 '영상앨범 산'에 자주 출연하는 그다. 프로그램에선 '세계 100대 명산 탐험가'로 소개됐는데 '세계 100대 트레일 탐험가'가 좀 더 정확하다.
"지금까지 70개 좀 넘게 선정, 완주를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마쳤습니다. 자료도 다 구축해 놨고요. 막상 직접 걸어 보니 도무지 세계 100대 트레일 축에는 못 끼는 것들이 있어서 정제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또 무척 아름다운 트레일은 맞지만 같은 산맥 상에 유사한 상위 코스가 있거나 하는 경우도 제외하고 있어요. 지역 안배를 생각하는 거죠."
100개의 길을 정하기 위해 먼저 <론리 플래닛>,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국제 매거진들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선, 50선 등을 모았다. 이어 일반 개인의 SNS나 블로그에 올린 목록들도 더했다. 여기서 중복되는 건 지우고, 비슷한 건 빼고, 누락된 건 더하는 식으로 150여 개의 후보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직접 걸으면서 100개의 길을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 100대 트레일을 선정할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또 선정을 넘어서 직접 걷고, 책으로 낼 생각은 또 어찌 하신 거고요?"
박춘기 대장은 빙그레 웃었다. 대답은 1958년부터 시작된다.
아이슬란드 라우가 베구르 종주. 아이슬란드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뚜렷해지기 전까진 박 대장의 1순위트레일이었다.
작고 말랐던 어린 시절, 맞고 또 맞았다.
그는 호적상으로는 1960년생이지만 실제는 1958년생이라고 했다. 도시인 대구에서 태어나 자칫하면 자연과 떨어진 삶을 살 뻔했다. 그래선지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작고 말라서 앞줄에 앉았다. 그래도 몸이 가볍고 순발력이 좋아서 축구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방학이면 입을 줄이기 위해 경북 영천의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할머니는 지주 집안이라 좀 사는 편이었다. 거기서 자연 속을 뛰놀며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소를 몰고 산과 언덕을 넘으며 풀을 먹였다.
한편 도시 소년이 본 시골은, 교과서에서 읽었던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 속 모습과 꼭 닮았다. 검정색 글로도 유채색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자연히 글을 써보게 됐다. 한 번도 발표한 적은 없지만 나름 소설도 써봤다.
페루 아우상가테의 레인보우 마운틴.
"그러다가 경남 함양군 안의면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아마 제 기억으로는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던 때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물론 삼촌들이 다 곧 6·25처럼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는 안의면으로 대거 이사를 갔죠. 저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에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조금씩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고등학교를 시험 쳐서 들어가는 마지막 세대였는데, 대규모 입시 부정이 발생해서 1년 동안 재수를 해야만 했다. 재수하며 돈을 벌 겸 공장을 다녔는데 출근하면 일단 맞고 시작했다. 공장 소유주, 막말로 돈 주는 사람이 그러면 이해는 못 해도 용납은 하겠는데 단순 상급자가 그러니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대구에서 재수 공부를 접고 부모님을 따라서 안의면으로 들어갔다.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저 빼고는 모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더라고요. 그런 집단에 도시에서 왔다는 애가 나타나니 어땠겠어요. 공장 때처럼 또 맞았죠. 같은 학년인데 유급생인 건달들한테 맞고, 또 한 학년 선배인 애들이 뒷산으로 부르면 나가서 또 한 대씩 맞았어요."
이렇게 3년간 학교를 다닐 순 없었다. 2학년도 꼼짝 못 하는 1학년 대장 노릇하는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독하게 마음먹고 붙었는데, 싸움이나 운동이나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그는 당연히 실컷 얻어터졌다. 그가 한 대 때리면 열 대를 맞았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 종주.
그래도 끝까지, 사생결단으로 버텼다. 그러자 상대가 질렸는지 그만하자고 했다. 그가 "둘 중 하나 죽어야 된다"고, "그만할 수 없다"고 맞받아치자, "그럼 내가 진 걸로 하자"는 답이 돌아왔다.
"거기로 인정받고 그 패거리들과 같이 술을 마셨어요. 저희 집안 체질이, 술이 셉니다. 잔뜩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저만 제정신이더라고요. 술김에 쓰러진 애들 중에 가장 질 나쁜 놈들 4명만 골라서 두들겨 팼죠.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4대1로 싸워서 제가 이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하하."
미국으로 건너가 산악회, 여행사 만들다
그 뒤로도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문학의 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하며 시도 쓰고, 작품도 발표해 봤다. 그러다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도 따봤고, 대학 때 포장마차 가게도 운영해 봤다. 캠퍼스 커플도 해봤고, 그때 사귄 여자 친구가 붙잡은 탓에 현역 입영을 못 하고 ROTC로 입대하게 됐다.
"대학 졸업할 무렵 바로 위의 형이 오토바이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큰형은 양자로 간 터라 제가 우리 집 유일한 아들이 돼 군대 면제가 됐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그냥 복무하러 갔죠. 가정 상황을 고려해줬는지 후방 부대로 배치하더라고요. 한 부대에 오래 있지는 못했어요. 부임 직후 총기 난사 사건도 나고 다사다난했거든요."
페루 안데스산맥 와이와시 트레킹
물론 그의 지휘 책임은 없었다. 갓 전임해 모든 걸 규정에 입각해 지휘했고, 사고는 모두 그 전부터 곪아 있던 것들이 터진 것이었다. 그래도 전방위 감사를 받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나날이 있던 중 일요일에 병사들을 데리고 성당에 나갔다. 밥을 잘 주니 자꾸만 천주교 신자가 늘었다. 그곳에 프랑스인 신부가 있었는데, 그의 취미가 스쿠버다이빙이었다."
그 신부님의 영향으로 저도 한동안 스쿠버다이빙에 푹 빠지게 됐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가볍고 기능이 좋은 장비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입으려면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좀 무식한 것들을 차고 잠수해야 했어요. 간단히 이퀄라이징 요령 정도만 배우고 잠수했는데 정말 충격이었어요. 해저 세상의 풍경과 너무나 예쁜 녹색 수초들. 그렇게 산보다 먼저 바다에 빠지게 됐죠."
직장 생활과 스쿠버다이빙을 번갈아 즐기는 삶이 이어지던 때, 또 다른 인생의 변화가 찾아왔다. 1987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가족 중 한 명이 미국 군의관과 결혼하면서 줄줄이 다른 가족들도 초청받아 갔는데 부모님이 한사코 안 가겠다고 해서 대신 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했죠. 그렇게 손을 댄 것 중 ATM 보급 사업이 우연히 대박이 났어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나오니 스쿠버다이빙에 다시 눈이 가더라고요."
스쿠버다이빙을 할 사람을 어떻게 모을까 고민했는데 환경이 영 좋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물이 차갑고 조류가 심한 데다 오염도가 높았다. 그래서 일단은 스쿠버다이빙을 할 정도로 모험심이 높은 사람들을 모아서 슬슬 부추긴 다음에 멀리 나가는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산도 좋아할 터다. 2008년, 산악회를 만들었다. 이름은 들뫼바다.
KBS 영상앨범 산 촬영진과 함께 남미 파타고니아를 걸었다.
"첫 산행에 무려 150명이 모였어요. 그중에서 바다에 갈 사람을 찾아보려 했죠. 그런데 살펴보니 평균 연령이 무려 58세인 거예요. 같이 바다에 갈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그의 실망과 다르게 150명의 참가자는 그의 산행 모집에 반색했다. 혼자서 산에 가기에는 아무래도 미국 땅이 넓었는데 같이 움직이니 너무 좋았다.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자는 요구가 물 밀듯이 밀려왔다. 책임감이 느껴졌다.
"제가 포장마차를 운영해서 음식 솜씨가 좀 있거든요. 밥을 다 해줬어요. 미국 아웃도어는 차를 끌고 들어가서 대규모로 취사하기 참 좋거든요. 큰 불에 육개장을 올리고, 삼겹살도 구웠죠. 안내 산악회 개념도 없었고 그냥 당연히 제가 사람을 모아서 행사를 연 거니 이렇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참가비를 20달러로 책정했는데 사람들이 밥을 먹고 나니 자발적으로 40달러 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남미 파타고니아 W트레킹.
원래 일요일만 산행했다. 그러자 교회 다니는 이들이 토요일에도 가자고 했다. 또 은퇴한 이들은 주말에 토·일 연달아 가기에는 체력적으로 부담이라 수요 산행을 가자고 했다. 또 주말 장사를 하고 월요일에 쉬는 자영업자가 많은 탓에 월요 산행도 만들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에 네 번 산을 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본업인 ATM 보급 사업이나 부동산 중개업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결국 아예 노선을 틀고 이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2년 지나자 산악회 사람들은 인근 산을 당일로 다녀오는 것에 만족을 못 했다. 멀리 나가서 오래 걷는 트레킹이다.
"다른 사정도 있었어요. 산악회 규모가 커지다 보니 안에서 쪼개지더라고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집단을 이뤄서 나가고 그러더라고요. 회비를 거두니 배임과 횡령이 나오고요. 자기가 밀던 회장이 당선 안 되면 사람을 모아 떠났죠. 환멸을 느껴서 그냥 비즈니스로 산을 다니면 이런 문제로 속앓이를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011년 미주트레킹이란 이름의 여행사를 창업하고 대표로 취임했다. 이름에서 보듯, 원래는 북미 지역만 전문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래 사람 욕심은 한도가 없다. 매번 북미 지역만 가다 보니 색다른 풍경이 끌렸다. 그렇게 남미를 가고, 태평양도 건넜다. 문학을 좋아했기에 어디든 갔다 오고 나면 산행기를 즐겁게 남겼다. 사람들이 또 그 글을 보고는 생경한 곳을 같이 걷자고 찾아왔다. 그렇게 순풍이 불었다.
"제가 첫 산행 모집 때 음식을 해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제가 한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서든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지요. 또 트레킹 오는 분들이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이 중 80%는 외국 음식이 안 맞아요. 그래서 트레킹 상품을 설계할 때 쭉 한식으로 먹게끔 만들었어요. 그러니 반응이 좋았죠."
1939년생 단골손님이 있었다. 코로나 직전까지 1년에 3~4번은 미주트레킹과 함께 해외 산행을 다녔던 이다. 그가 한 말이 "박 대장이랑 그렇게 오래 해외 트레킹을 다닐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가 요리해 준 한식의 힘, 밥심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하는 산행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박 대장의 배낭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와펜들이 한가득 붙어 있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이번에 발간된 '세계 100대 트레일 1ㅣ걸음의 축제'. 박춘기 지음. 진봄북스. 448쪽.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지리산'
일이 너무 잘됐다. 그래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극적으로 짧아졌다. 1년에 겨우 보름만 집에 있던 적도 있었다. 가령 남미에서 모객된 손님들과 10박 11일 일정을 마치면, 또 배낭과 캐리어를 들고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손님들과 걷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스케줄을 소화했다.
"힘들었죠. 그런데 힘든 만큼 건강해졌어요. 그전에는 불면증도 있었고 성인병도 조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산에 다니면서 그런 게 없어졌어요. 아마 산을 만나지 않았다면 집안 내력인 고혈압으로 진작 쓰러졌을 거라고 확신해요."
다만 관절은 조금 다른 의견이다. 개업 초기 종주 코스를 개발하러 갈 때 배낭 30㎏씩 메고 다녔다. 취사 도구와 야영 장비를 다 짊어졌다. 한식을 먹기 위한 무게다. 그래서 고관절과 오른쪽 무릎이 조금 약해졌다. 지금 그 탓에 절뚝거린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전 세계의 좋다는 길은 손님들과 함께 다 걸었다. 볼리비아 안데스의 와이나 포토시(Huayna Potosi·6094m)에서 끝없는 설경도 봤고, 알프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면서 산장 덕에 편하게 갈 수 있는 샤모니~체르마트를 잇는 오트 루트 220㎞, 히말라야, 로키산맥과 안데스산맥도 갔다. 걸은 길 중엔 아이슬란드에서 핌 고개까지 연장해 걷는 트레일이 가장 좋았다. 지구 태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후 변화로 현재는 옛날 그 모습이 아니란다. 이 밖에도 코스는 도전적이지만 풍경이 압도적인 오스트리아 빙하 트레킹,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트라문타나산맥 트레일도 국내엔 덜 알려졌지만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았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한국에서 이뤄진 것이다.
"재미 동포들을 데리고 한국 3대 명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들과 결혼한 외국인도 4명 있었죠. 이들과 함께 지리산을 가려는데 제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됐기에 대피소 예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지인에게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대피소 예약을 좀 해괴하게 해버렸습니다. 화엄사에서 올라 노고단에서 1박을 하고, 연하천에서 2박을 한 뒤 마지막 날 한 번에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가는 일정을 짠 거예요. 그렇게 체격도 좋고 키도 큰 외국인들이 중산리로 내려온 다음 무릎이 흔들린다고 모든 일정을 포기해야 했죠. 그래도 그중 한 명은 설악산 종주를 같이 했어요."
설악산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약을 이상하게 했다. 대피소도 아닌 봉정암에서 1박 후 공룡능선을 타고 대청봉에 오른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소청 대피소를 예약했는데 일행 중 안 온 사람이 꽤 있다는 사람을 우연히 산에서 만나 그 자리를 빌려 잘 수 있었다.
서울 한양도성을 걷고 있는 박 대장. 한국에는 늦가을 같은 트레킹 비수기에만 아주 잠깐 들른다. 그 외엔 전 세계를 돌거나 미국 자택에서 지낸다.
세계 100대 트레일 프로젝트, 공정률 70%
그렇게 국내외 길을 수없이 걷고 다니는 와중에 고국에선 100대 명산이 유행을 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세계에서도 100대 트레일을 추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공신력 있는 단체나 잡지에서 30개, 50개씩 선정된 건 있어도 100개는 없었다. 일부 개인이 100개를 꼽아 놓은 게 있긴 한데 기준이 영 아니었다. 미국 사람은 미국 길이 절반, 호주 사람은 호주 길이 수십 개인 식이다. 그래도 일단 다 모아 놓으니 수백 개 정도 됐고, 글과 사진과 영상을 통해 후보군을 150개까지 추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걸으면서 이를 검증해 진짜 100대 트레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 70개 정도는 등재 확실이다.
"코로나 전까지는 왕성하게 다녔고, 이후로는 1년에 1~2군데밖에 못 가고 있어요. 여행사 일도 해야 하니 시간이 영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이제는 사업 후계자를 뽑아 놓고 앞으로 3년 동안 나머지 30여 군데를 채워 나갈 예정입니다."
혼자 가는 것도 힘든데 사람들을 모객해서 다닌 탓에 이에 얽힌 사건·사고가 많았다. 하와이 절벽 트레킹에서 한 부부는 아내가 고소공포증이 심하다며 헬기 구조를 받겠다고 알아서 할 테니 먼저 가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그는 다른 손님들을 데리고 일단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구조대에 확인해 보니 헬리콥터가 갔는데 정작 아무도 태워오지 않았단다. 이유를 묻자 오로지 '조난자'만 태우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분명 고소공포증에 빠진 조난자인데 남편에게 '당신 상태는 괜찮냐?'고 묻자 '오케이'라고 답한 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헬기에 남편을 태울 수 없다고 하니 아내가 그럼 자기도 남겠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구조해 줄 것을 간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간청으로 구조가 이뤄졌다.
"캐나다 로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길이 없는 곳으로 갔던 분들이 조난당했죠. 천만다행히 무전기가 있었는데 밤이라 구조 헬기가 뜰 수 없었어요. 이분들이 추운 밤을 보내야 했는데 화기가 아예 없었죠. 그런데 그중 친구 따라서 처음 해외 트레킹을 온 분이 마침 전직 소방관이었답니다. 보조 배터리로 불을 내는 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로 밤을 버틸 수 있었대요."
아직 100대 트레일 선정이나 완주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책은 먼저 나왔다. 이번에 발간된 '세계 100대 트레일 1 -걸음의 축제'에는 총 25개 길이 실렸다. 한 권에 25개씩 총 네 권으로 완결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길을 담는 기준은 특별히 없고 그저 글과 사진이 먼저 된 길을 선착순으로 실을 뿐이란다.
"저는 길을 걸을 때 늘 머릿속에서 생각해요. 내면의 저와 대화하고, 다음 트레킹 모객 현황을 파악하고, 어떤 길을 내세워서 모객할지 고민하고, 앞으로 여생은 또 어떻게 살지 모색하죠.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그 사색이 어우러져서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을 다시 글로 옮겼어요.
책에는 정보보다는 감상이나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에 아마 산에 늘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다들 공감하실 것 같아요. '세계 100대 트레일을 같이 사색하며 걸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고, 또 더 써나갈 예정입니다. 만약 산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별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별세계를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며 걸을 수 있고, 이런 기분도 들 수 있을 것이란 걸 간접적으로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엄청난 울림을 주는 글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런 울림 끝자락에 남는 메아리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트레킹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순간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펼쳤다. 히말라야 골짜기를 살짝 눈여겨봤다가 유럽 미봉들을 돌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3대 트레일과 남미의 이름도 잘 안 알려진 곳들도 훑었다. 그렇게 돌 쿨사이다릴게임 고 돌다가 툭 눈길에 걸린 곳의 이름을 뱉었다.
"뉴질랜드요. 밀포드 트레킹이 정말 유명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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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릴게임갓 직접 두 발로 전 세계 트레일을 걸어보고, 두 눈으로 꼼꼼히 봐야 내릴 수 있는 신랄한 평가였다. 그런 그이기에 쓸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직접 걸어 보고 선정한 세계 100대 트레일이다. 일단 25개의 길을 담은 1권, <세계 100대 트레일 1ㅣ걸음의 축제>가 발간됐고, 이어 3개의 책이 더 나와 100개를 완성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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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70개 좀 넘게 선정, 완주를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마쳤습니다. 자료도 다 구축해 놨고요. 막상 직접 걸어 보니 도무지 세계 100대 트레일 축에는 못 끼는 것들이 있어서 정제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또 무척 아름다운 트레일은 맞지만 같은 산맥 상에 유사한 상위 코스가 있거나 하는 경우도 제외하고 있어요. 지역 안배를 생각하는 거죠."
100개의 길을 정하기 위해 먼저 <론리 플래닛>,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국제 매거진들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선, 50선 등을 모았다. 이어 일반 개인의 SNS나 블로그에 올린 목록들도 더했다. 여기서 중복되는 건 지우고, 비슷한 건 빼고, 누락된 건 더하는 식으로 150여 개의 후보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직접 걸으면서 100개의 길을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 100대 트레일을 선정할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또 선정을 넘어서 직접 걷고, 책으로 낼 생각은 또 어찌 하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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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라우가 베구르 종주. 아이슬란드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뚜렷해지기 전까진 박 대장의 1순위트레일이었다.
작고 말랐던 어린 시절, 맞고 또 맞았다.
그는 호적상으로는 1960년생이지만 실제는 1958년생이라고 했다. 도시인 대구에서 태어나 자칫하면 자연과 떨어진 삶을 살 뻔했다. 그래선지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작고 말라서 앞줄에 앉았다. 그래도 몸이 가볍고 순발력이 좋아서 축구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방학이면 입을 줄이기 위해 경북 영천의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할머니는 지주 집안이라 좀 사는 편이었다. 거기서 자연 속을 뛰놀며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소를 몰고 산과 언덕을 넘으며 풀을 먹였다.
한편 도시 소년이 본 시골은, 교과서에서 읽었던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 속 모습과 꼭 닮았다. 검정색 글로도 유채색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자연히 글을 써보게 됐다. 한 번도 발표한 적은 없지만 나름 소설도 써봤다.
페루 아우상가테의 레인보우 마운틴.
"그러다가 경남 함양군 안의면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아마 제 기억으로는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던 때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물론 삼촌들이 다 곧 6·25처럼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는 안의면으로 대거 이사를 갔죠. 저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에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조금씩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고등학교를 시험 쳐서 들어가는 마지막 세대였는데, 대규모 입시 부정이 발생해서 1년 동안 재수를 해야만 했다. 재수하며 돈을 벌 겸 공장을 다녔는데 출근하면 일단 맞고 시작했다. 공장 소유주, 막말로 돈 주는 사람이 그러면 이해는 못 해도 용납은 하겠는데 단순 상급자가 그러니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대구에서 재수 공부를 접고 부모님을 따라서 안의면으로 들어갔다.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저 빼고는 모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더라고요. 그런 집단에 도시에서 왔다는 애가 나타나니 어땠겠어요. 공장 때처럼 또 맞았죠. 같은 학년인데 유급생인 건달들한테 맞고, 또 한 학년 선배인 애들이 뒷산으로 부르면 나가서 또 한 대씩 맞았어요."
이렇게 3년간 학교를 다닐 순 없었다. 2학년도 꼼짝 못 하는 1학년 대장 노릇하는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독하게 마음먹고 붙었는데, 싸움이나 운동이나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그는 당연히 실컷 얻어터졌다. 그가 한 대 때리면 열 대를 맞았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 종주.
그래도 끝까지, 사생결단으로 버텼다. 그러자 상대가 질렸는지 그만하자고 했다. 그가 "둘 중 하나 죽어야 된다"고, "그만할 수 없다"고 맞받아치자, "그럼 내가 진 걸로 하자"는 답이 돌아왔다.
"거기로 인정받고 그 패거리들과 같이 술을 마셨어요. 저희 집안 체질이, 술이 셉니다. 잔뜩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저만 제정신이더라고요. 술김에 쓰러진 애들 중에 가장 질 나쁜 놈들 4명만 골라서 두들겨 팼죠.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4대1로 싸워서 제가 이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하하."
미국으로 건너가 산악회, 여행사 만들다
그 뒤로도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문학의 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하며 시도 쓰고, 작품도 발표해 봤다. 그러다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도 따봤고, 대학 때 포장마차 가게도 운영해 봤다. 캠퍼스 커플도 해봤고, 그때 사귄 여자 친구가 붙잡은 탓에 현역 입영을 못 하고 ROTC로 입대하게 됐다.
"대학 졸업할 무렵 바로 위의 형이 오토바이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큰형은 양자로 간 터라 제가 우리 집 유일한 아들이 돼 군대 면제가 됐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그냥 복무하러 갔죠. 가정 상황을 고려해줬는지 후방 부대로 배치하더라고요. 한 부대에 오래 있지는 못했어요. 부임 직후 총기 난사 사건도 나고 다사다난했거든요."
페루 안데스산맥 와이와시 트레킹
물론 그의 지휘 책임은 없었다. 갓 전임해 모든 걸 규정에 입각해 지휘했고, 사고는 모두 그 전부터 곪아 있던 것들이 터진 것이었다. 그래도 전방위 감사를 받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나날이 있던 중 일요일에 병사들을 데리고 성당에 나갔다. 밥을 잘 주니 자꾸만 천주교 신자가 늘었다. 그곳에 프랑스인 신부가 있었는데, 그의 취미가 스쿠버다이빙이었다."
그 신부님의 영향으로 저도 한동안 스쿠버다이빙에 푹 빠지게 됐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가볍고 기능이 좋은 장비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입으려면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좀 무식한 것들을 차고 잠수해야 했어요. 간단히 이퀄라이징 요령 정도만 배우고 잠수했는데 정말 충격이었어요. 해저 세상의 풍경과 너무나 예쁜 녹색 수초들. 그렇게 산보다 먼저 바다에 빠지게 됐죠."
직장 생활과 스쿠버다이빙을 번갈아 즐기는 삶이 이어지던 때, 또 다른 인생의 변화가 찾아왔다. 1987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가족 중 한 명이 미국 군의관과 결혼하면서 줄줄이 다른 가족들도 초청받아 갔는데 부모님이 한사코 안 가겠다고 해서 대신 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했죠. 그렇게 손을 댄 것 중 ATM 보급 사업이 우연히 대박이 났어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나오니 스쿠버다이빙에 다시 눈이 가더라고요."
스쿠버다이빙을 할 사람을 어떻게 모을까 고민했는데 환경이 영 좋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물이 차갑고 조류가 심한 데다 오염도가 높았다. 그래서 일단은 스쿠버다이빙을 할 정도로 모험심이 높은 사람들을 모아서 슬슬 부추긴 다음에 멀리 나가는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산도 좋아할 터다. 2008년, 산악회를 만들었다. 이름은 들뫼바다.
KBS 영상앨범 산 촬영진과 함께 남미 파타고니아를 걸었다.
"첫 산행에 무려 150명이 모였어요. 그중에서 바다에 갈 사람을 찾아보려 했죠. 그런데 살펴보니 평균 연령이 무려 58세인 거예요. 같이 바다에 갈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그의 실망과 다르게 150명의 참가자는 그의 산행 모집에 반색했다. 혼자서 산에 가기에는 아무래도 미국 땅이 넓었는데 같이 움직이니 너무 좋았다.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자는 요구가 물 밀듯이 밀려왔다. 책임감이 느껴졌다.
"제가 포장마차를 운영해서 음식 솜씨가 좀 있거든요. 밥을 다 해줬어요. 미국 아웃도어는 차를 끌고 들어가서 대규모로 취사하기 참 좋거든요. 큰 불에 육개장을 올리고, 삼겹살도 구웠죠. 안내 산악회 개념도 없었고 그냥 당연히 제가 사람을 모아서 행사를 연 거니 이렇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참가비를 20달러로 책정했는데 사람들이 밥을 먹고 나니 자발적으로 40달러 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남미 파타고니아 W트레킹.
원래 일요일만 산행했다. 그러자 교회 다니는 이들이 토요일에도 가자고 했다. 또 은퇴한 이들은 주말에 토·일 연달아 가기에는 체력적으로 부담이라 수요 산행을 가자고 했다. 또 주말 장사를 하고 월요일에 쉬는 자영업자가 많은 탓에 월요 산행도 만들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에 네 번 산을 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본업인 ATM 보급 사업이나 부동산 중개업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결국 아예 노선을 틀고 이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2년 지나자 산악회 사람들은 인근 산을 당일로 다녀오는 것에 만족을 못 했다. 멀리 나가서 오래 걷는 트레킹이다.
"다른 사정도 있었어요. 산악회 규모가 커지다 보니 안에서 쪼개지더라고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집단을 이뤄서 나가고 그러더라고요. 회비를 거두니 배임과 횡령이 나오고요. 자기가 밀던 회장이 당선 안 되면 사람을 모아 떠났죠. 환멸을 느껴서 그냥 비즈니스로 산을 다니면 이런 문제로 속앓이를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011년 미주트레킹이란 이름의 여행사를 창업하고 대표로 취임했다. 이름에서 보듯, 원래는 북미 지역만 전문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래 사람 욕심은 한도가 없다. 매번 북미 지역만 가다 보니 색다른 풍경이 끌렸다. 그렇게 남미를 가고, 태평양도 건넜다. 문학을 좋아했기에 어디든 갔다 오고 나면 산행기를 즐겁게 남겼다. 사람들이 또 그 글을 보고는 생경한 곳을 같이 걷자고 찾아왔다. 그렇게 순풍이 불었다.
"제가 첫 산행 모집 때 음식을 해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제가 한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서든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지요. 또 트레킹 오는 분들이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이 중 80%는 외국 음식이 안 맞아요. 그래서 트레킹 상품을 설계할 때 쭉 한식으로 먹게끔 만들었어요. 그러니 반응이 좋았죠."
1939년생 단골손님이 있었다. 코로나 직전까지 1년에 3~4번은 미주트레킹과 함께 해외 산행을 다녔던 이다. 그가 한 말이 "박 대장이랑 그렇게 오래 해외 트레킹을 다닐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가 요리해 준 한식의 힘, 밥심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하는 산행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박 대장의 배낭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와펜들이 한가득 붙어 있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이번에 발간된 '세계 100대 트레일 1ㅣ걸음의 축제'. 박춘기 지음. 진봄북스. 448쪽.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지리산'
일이 너무 잘됐다. 그래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극적으로 짧아졌다. 1년에 겨우 보름만 집에 있던 적도 있었다. 가령 남미에서 모객된 손님들과 10박 11일 일정을 마치면, 또 배낭과 캐리어를 들고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손님들과 걷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스케줄을 소화했다.
"힘들었죠. 그런데 힘든 만큼 건강해졌어요. 그전에는 불면증도 있었고 성인병도 조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산에 다니면서 그런 게 없어졌어요. 아마 산을 만나지 않았다면 집안 내력인 고혈압으로 진작 쓰러졌을 거라고 확신해요."
다만 관절은 조금 다른 의견이다. 개업 초기 종주 코스를 개발하러 갈 때 배낭 30㎏씩 메고 다녔다. 취사 도구와 야영 장비를 다 짊어졌다. 한식을 먹기 위한 무게다. 그래서 고관절과 오른쪽 무릎이 조금 약해졌다. 지금 그 탓에 절뚝거린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전 세계의 좋다는 길은 손님들과 함께 다 걸었다. 볼리비아 안데스의 와이나 포토시(Huayna Potosi·6094m)에서 끝없는 설경도 봤고, 알프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면서 산장 덕에 편하게 갈 수 있는 샤모니~체르마트를 잇는 오트 루트 220㎞, 히말라야, 로키산맥과 안데스산맥도 갔다. 걸은 길 중엔 아이슬란드에서 핌 고개까지 연장해 걷는 트레일이 가장 좋았다. 지구 태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후 변화로 현재는 옛날 그 모습이 아니란다. 이 밖에도 코스는 도전적이지만 풍경이 압도적인 오스트리아 빙하 트레킹,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트라문타나산맥 트레일도 국내엔 덜 알려졌지만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았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한국에서 이뤄진 것이다.
"재미 동포들을 데리고 한국 3대 명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들과 결혼한 외국인도 4명 있었죠. 이들과 함께 지리산을 가려는데 제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됐기에 대피소 예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지인에게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대피소 예약을 좀 해괴하게 해버렸습니다. 화엄사에서 올라 노고단에서 1박을 하고, 연하천에서 2박을 한 뒤 마지막 날 한 번에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가는 일정을 짠 거예요. 그렇게 체격도 좋고 키도 큰 외국인들이 중산리로 내려온 다음 무릎이 흔들린다고 모든 일정을 포기해야 했죠. 그래도 그중 한 명은 설악산 종주를 같이 했어요."
설악산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약을 이상하게 했다. 대피소도 아닌 봉정암에서 1박 후 공룡능선을 타고 대청봉에 오른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소청 대피소를 예약했는데 일행 중 안 온 사람이 꽤 있다는 사람을 우연히 산에서 만나 그 자리를 빌려 잘 수 있었다.
서울 한양도성을 걷고 있는 박 대장. 한국에는 늦가을 같은 트레킹 비수기에만 아주 잠깐 들른다. 그 외엔 전 세계를 돌거나 미국 자택에서 지낸다.
세계 100대 트레일 프로젝트, 공정률 70%
그렇게 국내외 길을 수없이 걷고 다니는 와중에 고국에선 100대 명산이 유행을 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세계에서도 100대 트레일을 추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공신력 있는 단체나 잡지에서 30개, 50개씩 선정된 건 있어도 100개는 없었다. 일부 개인이 100개를 꼽아 놓은 게 있긴 한데 기준이 영 아니었다. 미국 사람은 미국 길이 절반, 호주 사람은 호주 길이 수십 개인 식이다. 그래도 일단 다 모아 놓으니 수백 개 정도 됐고, 글과 사진과 영상을 통해 후보군을 150개까지 추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걸으면서 이를 검증해 진짜 100대 트레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 70개 정도는 등재 확실이다.
"코로나 전까지는 왕성하게 다녔고, 이후로는 1년에 1~2군데밖에 못 가고 있어요. 여행사 일도 해야 하니 시간이 영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이제는 사업 후계자를 뽑아 놓고 앞으로 3년 동안 나머지 30여 군데를 채워 나갈 예정입니다."
혼자 가는 것도 힘든데 사람들을 모객해서 다닌 탓에 이에 얽힌 사건·사고가 많았다. 하와이 절벽 트레킹에서 한 부부는 아내가 고소공포증이 심하다며 헬기 구조를 받겠다고 알아서 할 테니 먼저 가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그는 다른 손님들을 데리고 일단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구조대에 확인해 보니 헬리콥터가 갔는데 정작 아무도 태워오지 않았단다. 이유를 묻자 오로지 '조난자'만 태우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분명 고소공포증에 빠진 조난자인데 남편에게 '당신 상태는 괜찮냐?'고 묻자 '오케이'라고 답한 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헬기에 남편을 태울 수 없다고 하니 아내가 그럼 자기도 남겠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구조해 줄 것을 간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간청으로 구조가 이뤄졌다.
"캐나다 로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길이 없는 곳으로 갔던 분들이 조난당했죠. 천만다행히 무전기가 있었는데 밤이라 구조 헬기가 뜰 수 없었어요. 이분들이 추운 밤을 보내야 했는데 화기가 아예 없었죠. 그런데 그중 친구 따라서 처음 해외 트레킹을 온 분이 마침 전직 소방관이었답니다. 보조 배터리로 불을 내는 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로 밤을 버틸 수 있었대요."
아직 100대 트레일 선정이나 완주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책은 먼저 나왔다. 이번에 발간된 '세계 100대 트레일 1 -걸음의 축제'에는 총 25개 길이 실렸다. 한 권에 25개씩 총 네 권으로 완결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길을 담는 기준은 특별히 없고 그저 글과 사진이 먼저 된 길을 선착순으로 실을 뿐이란다.
"저는 길을 걸을 때 늘 머릿속에서 생각해요. 내면의 저와 대화하고, 다음 트레킹 모객 현황을 파악하고, 어떤 길을 내세워서 모객할지 고민하고, 앞으로 여생은 또 어떻게 살지 모색하죠.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그 사색이 어우러져서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을 다시 글로 옮겼어요.
책에는 정보보다는 감상이나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에 아마 산에 늘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다들 공감하실 것 같아요. '세계 100대 트레일을 같이 사색하며 걸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고, 또 더 써나갈 예정입니다. 만약 산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별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별세계를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며 걸을 수 있고, 이런 기분도 들 수 있을 것이란 걸 간접적으로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엄청난 울림을 주는 글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런 울림 끝자락에 남는 메아리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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