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부전치료제 ☂ C͌IÁ3̲5̓1̙.N̋ÉT̯ ☂ 시알리스 정품 구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수여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1-27 15:34조회0회 댓글0건
관련링크
-
http://46.cia367.com
0회 연결
-
http://45.cia948.net
0회 연결
본문
【C᷉iA̡9̢5͟4́.N᷅E͓T̡】
온라인 약국 시알리스비아그라약비아그라파는곳시알리스 복용법
온라인 약국 시알리스비아그라약비아그라파는곳시알리스 복용법
온라인약국 시알리스 ☂ C͞IA̻9̀4᷾8͇.C᷿O͑Ṃ ☂ 비아그라팝니다
비아그라 효능 시간 ☂ C̻IA̪1᷿6͑9̛.N͍E᷈T̞ ☂ 비아그라구매사이트
비아그라 처방전 ☂ C͚IA͓1́6᷆9́.C̀ỌM᷃ ☂ 비아그라구입사이트
비아그라 약국가격 ☂ C̕iA͋3̨1̽2̨.N̕E̾T̪ ☂ 비아그라 자주 먹으면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
올해로 57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 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지난해 8~9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1월 독회 추천작은 김초엽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래빗홀)와 박솔뫼 소설집 ‘영릉에서’(민음사)입니다. 올해 첫 심사를 시작하며 정명교 위원이 심사평과 함께 동인문학상 개황을 보내와 전문을 싣습니다.
다음은 개황과 독회 심사평 전문.
릴게임종류
2025년 10월 28일 서울도서관에서 김초엽 작가. /장경식 기자
/래빗홀
릴게임
박솔뫼 작가
/민음사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 바다이야기온라인 가
♦제57회 동인문학상을 시작하며
다시 동인문학상이 새로운 회기를 맞는다. 회수로는 57회이고 해당 연도는 2026년이다. 검토 대상은 2025년 8월 1일에서 2026년 7월 31일 사이에 출간된 장편 또는 장편 분량의 소설집이다.
출발선에서 한국문학의 지형이 황금성오락실 꽤 요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압박처럼 받는다. 한국문학은 분명 어떤 변화 속에 놓여 있다. 이는 우선은 한국문학 역시 한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지난해에 두드러졌던 현상은 해외에서 소위 ‘K-힐링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모종의 대중 소설들의 판매가 약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류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론 데데 릴게임뜻 한 삶에 위로와 위안을 주는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이 공공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본격문학/대중문학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옛날처럼 두 문학 사이에 가치의 저울추가 기운다고 판단하는 건 편협한 귀족주의로 비칠 수도 있다. 이제 두 방향의 문학이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을 ‘반성형 문학’이라고 한다면, 예전의 대중 문학은 ‘도락형 문학’에서 ‘위안형 문학’으로 변신하였다. ‘반성형 문학’이 현실에 대해 비판적·부정적 인식의 심연을 판다면, ‘위안형 문학’은 현실에 대한 긍정적이고 흔쾌한 수용을 추진력으로 삼는다.
후자의 문학을 지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의 힐링 기능을 뽐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의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포기하고 거짓 위안으로 삶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데서 기운을 얻는 태도를 여전히 경계할 것이다. 문제는 문화의 모든 움직임을 긍정의 가솔린으로 빨아들이는 현실의 저항선이 워낙 강해서, 순수한 부정은 무익한 정크 DNA로 버려질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도저한 부정의 밑바닥에 반동의 에너지와 탄성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 오늘날 문학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들이 뚫어야 할 관문일 것이다.
또 다른 요동은 본격문학 자체의 지형 변화에서 온다. 20세기 말, 디지털 문화의 점령이 점점 일방적인 경향이 되어간 만큼, 문학 독자들이 세대 단위로 급격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즉 책을 읽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지는 20, 30대 대학생 독서층으로 축소되고, 예전에 폭넓은 연령대에 퍼져 있던 여성 독자층이 붕괴하였다. 그러다 보니, 21세기 들어 메이저 출판사들이 젊은 독자층과 취향이 맞는 작가들을 특별히 관리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다시 좁혀지다 보니, 메이저 출판사들 사이에서 작가들을 돌려막기하는 관행이 생겼다.
이런 현상이 한국문학을 왜소하게 만들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약진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무수한 군소 출판사들을, 글쓰기의 욕망을 토해내듯이, 배출시켰고, 그 출판사들의 경쟁 속에서, 연령대가 다른 많은 작가들의 산개와 더불어 본격 문학 자체의 장르적 확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한국문학의 지속가능한 진화의 흐름을 다시 간종그리는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제56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자가 주류에서 이탈한 독립 작가였다는 것은 그러한 추이를 적확히 반영한 현상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드라마나 가요만이 아니라 문학 쪽에서도, 한국계 외국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4년에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우일연(Ilyon Woo)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소설과 시에서 세계 각국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작가들의 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한국계 작가들은 물론 한국 작가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시련과 언어적 기반을 상당수 공유하고 있고, 또한 양방향 번역을 비롯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문학과 깊이 교류하고 있다. 이들을 한국문학 안에 포함하느냐의 여부는 한국인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나, 한국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로 마음먹은 외국인들에게나 중요한 공안이 될 것이다.
제57회 동인문학상은 꽤 묵중한 이 요동들을 안고서 출발한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할 일도 늘어났고 심사도 복잡해졌다. 출발선상에 선 마음이 매우 심란하다. 첫 번째 독회는 2025년 8~9월 기간에 출판된 책들을 대상으로 한다.
♦양면의 조개껍데기
로봇의 분열적 존재론의 스핀
로봇이 인간에 비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체성과 “정체성”(이 용어는 이 소설집의 핵심 용어다.)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은 몸과 의식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데 비해, 로봇은 그 둘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분리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분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분리를 통해서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자유롭게 변형 조립(‘트랜스포머’처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리에는 모종의 위계관계가 성립된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조정한다는 것. 바로 이 때문에 신체성과 정체성의 분리라는 ‘아젠다’를 두고 대부분의 고전적 사이파이는 신체성의 초월이라는 방향으로 서사를 전개해 나갔다. 저 옛날,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대로, 사유의 정밀성을 받쳐주기에는 몸이라는 기관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래빗홀, 2025.08)를 이채롭게 하는 것은, 그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 정체성과 신체성의 일치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한 체험을 찾아 나선다. 게다가 그들은 신체성의 장착이 최종적으로 신체의 부식과 종말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점도 수락한다. 신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필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로봇 ‘앤드류 마틴’의 태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앤드류의 목적은 인간이 되려는 것이고, 그 까닭은 자아의 실현에 근거한 인간의 존엄성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공학 3원칙’이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로봇 직무의 연장 선상에 위치한다.
반면 김초엽 소설의 로봇들의 신체성에 대한 갈망은 체험의 진실성에 근거한다. 즉 정체성만의 진행은 주체의 독단과 대상에 대한 횡포를 유발하며, 신체성은 주변 대상과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데, 이때 이 접촉은 적대와 화해 사이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만남의 사건들을 낳는다. 체험의 진실성은 이 만남의 가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김초엽 소설의 신체성 지향은 인간됨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모든 이질적 존재들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의지, 간단히 말하면, 인간적인 것과 로봇적인 것을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표출된다.
이는 사이파이에 대한 의식의 뚜렷한 진화를 가리킨다. 김초엽은 그 진화의 한 고개를 넘고 있다. 그의 차후의 행보가 더욱 호기심을 바짝 당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릉에서
경쾌하고 자유롭도다
박솔뫼의 새 소설집,『영릉에서』(민음사, 2025.08) 는 그의 소설이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삶에 기반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박솔미의 인물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건 그 각각의 개별성이다.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에 동원되는 날씨, 시간, 장소 등의 배경들도 배경이 아니라, 마치 개별화된 독립적 인물처럼 표현된다. 가령 이런 기술을 보라.
“어제의 영릉도 좋았고 오늘의 영릉도 좋으며 풀은 어제도 오늘도 짙은 연두색이지만 어쩐지 어제의 영릉은 모든 것이 선명하다고 느꼈다. 원준이는 그 차이를 팔레트의 물감의 색을 섞어서 보여 줄 수 있었다.”(pp.30-31)
그러니까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서로 어울리고 이런저런 관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려는 생각도 거의 품지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방 번호와 이름을 남기고 『미국의 송어낚시』를 빌려와 읽었고 체크아웃 시 열쇠와 함께 반납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소설을 침대 오른편 램프 옆에 두고 떠났고 누군가는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읽다 잠든 누군가는 바닥에 『미국의 송어낚시』를 떨어뜨렸고 호텔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숙박객들은 모르는 여러 움직임과 속삭임으로 송어낚시는 침대 아래로 옮겨진다. 침대 아래 한가운데의 송어낚시는 침대 위의 움직임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언제 발견되는 걸까?”(pp.39-40)
마치 무수한 인물들이 투명하게 서로를 통과하며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나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독자는 ‘지나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들이 무언가 특이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따라 올라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쏟아지는 녹색 속으로 물소리, 나무와 바람 속으로 걸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나는 그것이 정말 좋았다. 나는 그곳을 여러 번 따라 올라간다.”(p.34)
‘정목이’와 ‘원준이’는 한때 우연히 어울렸던 동무들이다. 그들이 우연히 엮이게 된 까닭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정목이 아버지를 따라 그 둘은 숲으로 갔었다. 그리고 화자 ‘나’는?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사람이다. 요컨대 둘과 어떤 진한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의 기술에서 인물들은 죄다 서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 움직임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전전 인용문에 다시 눈길을 주면,
“호텔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숙박객들은 모르는 여러 움직임과 속삭임으로 송어낚시는 침대 아래로 옮겨진다. 침대 아래 한가운데의 송어낚시는 침대 위의 움직임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언제 발견되는 걸까?”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나오는 걸까? 그걸 지문 자체가 물어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에는 끊임없이 서로를 따르고 이끄는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목표도 없고, 정해진 경로도 없다. 작품은 그런 움직임의 동작들을 투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독자는 왜 이런 의미 없는 동작들을 눈길로 좇으면서 무언가 신선한 느낌을 갖는 것일까?
우선 이 운동 속에서 독자는 일상 그 자체를 섬세하게 바라보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운동들의 접면들마다 풍부한 삶의 내용들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들에서 운동이 장소들과 부단히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부시장’, ‘미 극동공병단 부지’, ‘국립중앙의료원’, ‘스칸디나비아 기념관’, ‘동대문 상가’, ‘명동성당’, ‘초량시장’,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홋카이도’, ‘거제도’, ‘대전’... 이 지명들은 그 자체로서 공적인 등록지이면서 동시에 모종의 역사 혹은 추억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인물들은 그들이 만나는 장소의 잠재된 의미망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지우면서 나아간다. 그래서 “구석구석 접힌 서울을 청소기로 밀며 나아가는 것 같다”(p.225)는 표현이 나온다. 역사를, 추억을 환기시키되, 그것들을 지우며 나아간다?
그러한 글쓰기가 작품의 공간을 풍요롭고도 시원하게 부푼 공기로 채운다. 그에게 만남은 공이 통통 튀는 만남이다. 이 움직임 속에서 가장 넓고 긴 접면을 만드는 촉각조차도 “찬물에 세수를 하는 것처럼”(pp.63~64) 닿은 것을 씻어내며 자신의 청초한 모습을 새초롬하게 빚어낸다.
아마도 이것이 박솔뫼 글쓰기의 매력이리라. 그리고 이 매력은 분명, 세계와 조우하면서도 자신의 개별성과 자유로움을 결코 놓치지 않는 인물의 분방함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데에서 온다.
그렇다면 이것을 현대인의 ‘새로운’ 태도라고 지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최근 일군의 지식인들이 이탈로 칼비노의 『다음 천년을 위한 6개의 강의 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Houghton Mifflin Harcourt. 2016, 국역본: 『문학강의』[에디토리얼, 2025])에서 영감을 받아 주창하게 된 “에피-모더니즘”(‘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일관성’을 기본 자세로 갖는)의 한 모형, 19세기적 인간과 대조되는 21세기적 인간의 ‘경쾌한’ 모습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쾌한 태도도 무언가를 새로 낳고 어딘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나갈 때에만 존재 이유를 가질 것이다. 그 점에서 박솔뫼의 소설들은 여전히 문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경쾌한 태도가 단순한 웰빙 체조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미세한 즐거움’의 건강 효과에 대해 자주 말한다. 즉, “거창한 목표보다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찾는 것이 웰빙에 더 효과적일 수 있으니, 이러한 긍정적 경험은 미주 신경(Vagus nerve)을 활성화하여 심박수를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회복탄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또한 “‘음미하기(Savoring)’ 훈련은 뇌의 가소성을 이용해 긍정적 감정을 더 오래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다”(『BBC Science Focus,』2025년 1월호.)고도 한다.
웰빙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기제들은 오늘날 사방에 널려 있다. 문학은 그것을 반성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장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박솔뫼의 소설이 현대인의 가장 신선한 태도에 근접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더 낳아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4년 전 필자는, 제52회 동인문학상 독회평에서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기왕 소통을 시작했다면, 이 개입 속에 무언가 진실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철거당하는 순간에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인지, ‘텐트 연극’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가능한 구상을, 또는 그 최소한의 구상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라도, ‘아 이런 형태였지’라고 가정하는 대신에, 제출하고, ‘모두 자신들의 가설을 이어나갔다’라고 쓰는 대신, 그 가설들의 초안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새해의 기쁨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이 의문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영릉에서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머무는 소설
박솔뫼의 소설은 묘해서 그것에 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묘하기 때문에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고, 다 읽고 나서도 무엇 하나 확연하지 않아 여운만 길게 남는다. 그런 느낌을 묘하다고 하는 까닭은 妙라는 한자가 새롭다, 기이하다, 젊다, 뛰어나다, 아름답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째서 새롭고 기이하고 젊고 뛰어나고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또한 쉽게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일이다.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면 차라리 꼬투리라도 잡으면 어떨까 싶어 그리하기로 한다.
《영릉에서》에 실린 단편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에 서원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서원은 술을 마시다 알게 된 친구의 친구를 몇 번 만나고 함께 지내다가 그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는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160쪽)
오래 사귀어 온 친구도 아니고 술을 마시다 알게 된 친구의 친구가 한 이야기라면 흘려버릴 만도 한데 그 말을 문득 떠올리며 서원은 산책하다 말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박솔뫼답게 앞뒤 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알려달라고 하면 분명 “모른다”고 할 것이다. 독자가 궁금해할 때 박솔뫼 문장의 서술어는 “모른다”거나 “알 수 없다”이기 일쑤니까. 그래서 묘한 것은 설명되지 않은 채 묘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
이 말을 꼬투리로 잡은 까닭은 언젠가 필자의 친구가 이와 같은(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아르메니아의 시인 사야트 노바의 삶과 시 세계를 영화화한 <석류의 빛깔>을 본 뒤였을 것이다. 지루해서 반 이상 졸았다면서도 중간 중간 깨어날 때마다 스크린에는 무서운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러한 장면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는 알지 못해 다시 지루해졌다고.
친구의 말도 말이지만 박솔뫼의 소설을 읽으면서 필자는 어쩌면 그 영화를 만든 구소련의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를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는 “나는 창문으로 세상을 봅니다. 창문 너머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라고 했던 그의 말. 박솔뫼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영화감독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창문 너머의 세상은 바깥세상임이 분명한데 아닌 게 아니라 박솔뫼의 소설에는 좀처럼 창문 안의 세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바깥이고, 인물들은 정원과 길 위에 있거나 아예 나라 밖에 있다.
창문 너머 혹은 바다 건너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다른 세상은 아니다. 거기에는 을지로가 있고 국립중앙의료원이 있다. 아오모리현이 있고 국립히로사키 대학이 있다. 애리가 있고 제시가 있다. 화덕에 구운 따뜻한 빵이 있고 그걸 먹으며, 작은 이파리가 그려진 간판의 바에서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조차도 문득문득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라고 스스로 묻는다. 지루할 수밖에 없다.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루한데 이상하게 무섭다’가 된다. 뒤집을 것도 없다. 무서움과 지루함이 한몸인 문장이니까. 그것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 없이 빵을 먹고 술을 마시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스스로 묻는다. 이처럼 기괴하고 무서운 일이 있을까.
지루한 것은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러한데, 무서운 것도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러하다. 그러니 지루하지 않거나 무섭지 않으려면 이유를 알면 되겠는데 박솔뫼는 ‘모른다’거나 ‘알 수 없다’며 브라우티건적 우연들만 중뿔나게 늘어놓는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지루하고 거친 농담의 화면처럼.
창문 너머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창문 너머의 세상이란 창문 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창문 너머에 세상이 있다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할 까닭이 없다. 다른 세상이 아니라면 창문 너머의 세상은 창문 안의 세상을 양적으로 확대해 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문 너머란 창문 바깥이라는 의미일 테니 이럴 때는 아무래도 블랑쇼의 실용신안특허인 ‘바깥’을 빌려다 써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질서에 강제되거나 순화된 ‘안의 눈’으로 본 ‘바깥’은 그저 그런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안의 눈’을 깨부수며 쳐들어온 선험과 실재(the real)의 ‘바깥’은 무서운 게 될 것이다.
무섭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점차 ‘창문 너머’를 보게 된다면(그것이 뚫고 쳐들어오게 내버려 둔다면) 바깥은 새롭고 젊고 기이하며 아름다운 터전이게 되지 않을까.
박솔뫼의 소설은 묘해서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고, 다 읽고 나서도 확연하지 않아 여운만 길게 남는다고 서두에 적었는데, 필자에게 있어 그 여운이란 새롭고 기이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이나 고독에 가까운 쓸쓸함이었다. 워낙 이야기 자체가 비선형적인 데다 파편화되고 몽환적이기까지 해서, 괜스레 쓸쓸해지는 까닭 또한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세종대왕릉인 영릉, 을지로에 있던 1950년대의 미 육군 극동공병단, 아오모리 공원에 관한 스케치들이 무심하게 지나갈 때마다 시간성이라는 것이 주는 아련함이 어떤 애수를 부추겼다. 부단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소든 인간이든 그때그때 존재적 사건으로 부침하고 말 뿐이라는 전언 같아서.
이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던 차에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거의 끝 부분에 놓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가져 본 적 없는 그러나 가져본 적 없어서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내게 머물렀다.’(225쪽)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내게 머무는 순간 쓸쓸함마저도 남지 않고 투명하게 비워지는 듯한 이 느낌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양면의 조개 껍데기
김초엽의 이번 소설집에도 수 세기에 걸쳐 진지한 작가들이 해온 문학적 주제인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가 발견된다. 물론 그만의 스타일과 방식으로. 예컨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나 한 주체 안의 여러 자아에 대한 탐구는 고전적인 문학적 작업이다. 그렇지만 이 탐구는 사실 이 시대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좀 멀어진 것이 사실이다. 사회 현상이나 당대 이슈들을 추수하는 모양의 요즘 소설 경향을 생각하면 이 작가가 기울이는 이런 노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김초엽은 이 시대 가장 진지한 문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인지 모른다. 그의 소설이 갖는 의의는 가장 오래된 이 주제를 가장 첨단의 방식으로 소설화한다는 데 있다. ‘질문’과 ‘상상’, 혹은 ‘아이디어’가 그가 가진 중요한 도구일 것이다. 예컨대 그는 현상을 반영하거나 반응하는 대신 본질을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독특한 상상/아이디어를 찾아낸다. 이 상상/아이디어의 자원은 문학 외부, 무엇보다 과학 지식이다. 이 자원이 그 유구한 문학적 물음에 대한 새롭고 다른 문제 풀이를 가능하게 한다. 질문이 같다고 답이 항상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거니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내는 방법과 과정이 어떠한가이다. 그 방법과 과정의 남다름에 의해 질문의 의미가 부각되고 답이 새로운 빛으로 조명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문학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김초엽의 소설들을 통해 보고 있다.
‘기계였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기계가 되려는’ 인물의 녹슬고 싶어 하는 욕망을 통해 소설은 ‘자기와 다른 존재가 되려는 갈망’이 결국 ‘진짜 자기가 되려는 갈망’에 다름 아님을 시사한다. 자기 안의 타자아와의 불화로 힘들어하는 다른 소설 속 인물은, 개인은 타자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집단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동기화를 통해 완벽하게 소통하는 또 다른 소설 속 외계 인물이 불완전한 소통 매체인 언어를 가진 지구인의 ‘의도적으로 만든 거대한 불일치의 세계’를 의아해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효율을 위해 택한 획일주의로 인해 배제된 디테일, 개성, 차이의 가치를 성찰하게 된다. 원래도 불완전한 소통 체계(언어)에 그렇게 많은 불일치를 더해서 얻어낸 문장이 사랑의 말(“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이라는 「진동새와 손편지」의 아름다운 결말을 효율 지상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김초엽 소설의 다른 미덕은 과학 지식이 모자라거나 SF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예컨대 나 같은 독자들을 배려하는 글을 쓴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양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그의 소설이 특정 장르의 담을 넘어 보편 문학의 장 안으로 성큼 들어오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의 소설은 조밀하다. 독자들은 소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촘촘히 설계된 길을 쫓아 걷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에 도달하게 될 터인데, 그곳이 문 바깥인 줄도 알지 못한다. 소설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반듯반듯한 길일 뿐만 아니라 공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길이 세계에 대한 질문이라면 공기는 그 질문을 감싸고 있는 서정이다. 김초엽의 소설 속에서 SF의 세계가 문학적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낯설고 기이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세계가 익숙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독자로서 던지게 되는 질문도 없지 않다. 이 소설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 김초엽이 추구하는 것은 균형으로 보인다. SF적인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그것을 현실의 감각 속에다 풀어놓는 것. 그래서 익숙한 질문들. 나와 당신 그리고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거꾸로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미래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을. 그래서 그 익숙함과 편안함은 위험한가. 질문은 도돌이표로 되돌아온다.
표제작은 아니지만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에 첫 번째로 실린 단편소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그 질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있는, 반인간인 존재 수브다니가 있다. 인간의 생체적인 특성과 기계의 물리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미래의 세계에는 피부를 커스터마이즈해서 바꾸기를 소망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을 아더킨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감각하는 ‘인간’들. 인간의 몸에 갇힌, 그러나 인간이고 싶지 않은 존재들. 이들은 자신의 피부를 자신이 감각하는 다른 종의 것으로 바꾸기를 욕망한다. 수브다니는 이런 세계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인데, 자신의 피부를 금속으로 바꾸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녹슬고 싶어요.’
미래라는 배경을 걷어내고 나면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세계와 나, 타자와 나,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항. 질문이 팽팽할수록 그 질문에서 놓여나고 싶은 매우 인간적인 욕구 역시 마찬가지다. 녹슬고 싶은-죽음에 대한 욕망 역시 익숙한 문학 서사다. 그러나 여기에 김초엽만의 미래 서사적인 디테일이 들어가면 소설의 세계가 달라진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떻게 해도 녹슬지 않을 것 같은 질문들이 독자들의 세계로 들어온다.
이 작품에는 어려서 인형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천과 솜으로 만들어진 인형에게는 자해든 자기 파괴든 조금은 덜 위험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인데, 김초엽의 소설은 확실히 덜 파괴적이고 덜 위험해 보이지만, 그러나 스며드는 힘이 특별하다. 대단하기도 하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영릉에서
서사(敍事)라는 말에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하거나 기록한다는 뜻이 있다. 서사는, 시공간 속에서 인물이 수행하는 행위의 시작부터 결말까지를 기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이 이야기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 사건은 생겨나고 발전하고 종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 또는 논리적 연관을 확보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건은 반복해서 찾아오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건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행복한 시공간의 표상이 되어 이상향에 대한 희구를 위한 원천이 되기도 하며, 다른 어떤 사건은 살인 사건의 동기이자 원인으로 밝혀져 세계의 폭력적인 구조를 드러내기도 하며, 또 다른 어떤 사건은 매우 사소한 듯이 보였지만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운명의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 서사는 그 어떤 행위(운동, 움직임)를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한다.
새해 첫 심사 소견을 소설 또는 서사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박솔뫼의 소설이 가진 그 어떤 놀라움에 대해 거칠게라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솔뫼의 소설집 ‘영릉에서’에 수록된 소설들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사건들은 없다. 어떤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사건의 씨앗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계곡에 친구와 함께 놀러 간 일도 있고, 1979년에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영국 소설가 브라우티건과 관련된 전시회가 개최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어떻게 발전해서 종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끼치는 사건, 또는 인물들의 운명이나 성격과 관련된 실체적인 사건은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박솔뫼의 소설은 실체적인 사건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사건 이전의 사건, 또는 사건이 되지 못한 운동(움직임)들, 또는 과정으로서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영릉에서’를 보자. 이 소설은 20년 만에 원준이가 화자(話者)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원준이는 친구 정목이와 함께 정목이 아버지의 차를 타고 놀러 갔는데, 원래 언어 장애인인 정목이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버렸고, 원준과 정목은 다른 차를 얻어 타고 영릉까지 와서는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집까지 걸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정목 아버지는 왜 중간에 가버렸는지, 이 일은 이후 원준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는지, 또는 어떠한 사건으로 기억에 남았는지, 혹시 원준에게 근원적 공포를 각인시켜 준 사건은 아니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이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사건으로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에 소설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정목이와 원준이가 정목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13면)이다. 움직이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그 무엇. 작품의 말미에서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은, 20년이 지난 지금 원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화자 나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두 가지 서사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하며 서사를 불확정적인 지점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가능성은, 20년 전에 원준, 정목 그리고 화자 나가 함께 정목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계곡에 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원준은 화자 나가 동행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고 뭔가 따라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진술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 또 다른 가능성은, 화자 나는 20년 전의 계곡 나들이에 동행한 적은 없고 원준의 이야기 속에 완전히 자신을 이입하여 원준과 정목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야기의 가능성 중에 어느 쪽에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박솔뫼의 소설에는 사건이 없다는 것. 사건 아닌 사건, 사건 이전의 사건, 사건이 되지 못한 움직임 또는 흔들림과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소설에서 서사가 사건과 함께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박솔뫼의 소설은 비(非)사건에 대한 서사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서사적 흥미로움을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된 서사의 일반적인 문법을 벗어나, 사건 이전의 운동(움직임, 흔들림, 사라짐 등)을 서사의 대상으로 삼아서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끊임없이 옮겨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박솔뫼의 소설이 보여주는 비(非)사건과 비슷한 것들이 아닐까.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고, 나중에 크게 문제 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힐 것 같지도 않고, 이후의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 같지도 않지만, 그 일이 진행되는 시간과 공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성(운동성)으로 충만한 경험들. 어쩌면 박솔뫼의 소설은, 나의 삶은 대단한 것이라는, 소설과 관련된 모종의 강박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닐까.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는다고 해도, 별다른 사건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1월 독회 추천작은 김초엽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래빗홀)와 박솔뫼 소설집 ‘영릉에서’(민음사)입니다. 올해 첫 심사를 시작하며 정명교 위원이 심사평과 함께 동인문학상 개황을 보내와 전문을 싣습니다.
다음은 개황과 독회 심사평 전문.
릴게임종류
2025년 10월 28일 서울도서관에서 김초엽 작가. /장경식 기자
/래빗홀
릴게임
박솔뫼 작가
/민음사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 바다이야기온라인 가
♦제57회 동인문학상을 시작하며
다시 동인문학상이 새로운 회기를 맞는다. 회수로는 57회이고 해당 연도는 2026년이다. 검토 대상은 2025년 8월 1일에서 2026년 7월 31일 사이에 출간된 장편 또는 장편 분량의 소설집이다.
출발선에서 한국문학의 지형이 황금성오락실 꽤 요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압박처럼 받는다. 한국문학은 분명 어떤 변화 속에 놓여 있다. 이는 우선은 한국문학 역시 한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지난해에 두드러졌던 현상은 해외에서 소위 ‘K-힐링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모종의 대중 소설들의 판매가 약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류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론 데데 릴게임뜻 한 삶에 위로와 위안을 주는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이 공공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본격문학/대중문학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옛날처럼 두 문학 사이에 가치의 저울추가 기운다고 판단하는 건 편협한 귀족주의로 비칠 수도 있다. 이제 두 방향의 문학이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을 ‘반성형 문학’이라고 한다면, 예전의 대중 문학은 ‘도락형 문학’에서 ‘위안형 문학’으로 변신하였다. ‘반성형 문학’이 현실에 대해 비판적·부정적 인식의 심연을 판다면, ‘위안형 문학’은 현실에 대한 긍정적이고 흔쾌한 수용을 추진력으로 삼는다.
후자의 문학을 지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의 힐링 기능을 뽐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의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포기하고 거짓 위안으로 삶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데서 기운을 얻는 태도를 여전히 경계할 것이다. 문제는 문화의 모든 움직임을 긍정의 가솔린으로 빨아들이는 현실의 저항선이 워낙 강해서, 순수한 부정은 무익한 정크 DNA로 버려질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도저한 부정의 밑바닥에 반동의 에너지와 탄성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 오늘날 문학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들이 뚫어야 할 관문일 것이다.
또 다른 요동은 본격문학 자체의 지형 변화에서 온다. 20세기 말, 디지털 문화의 점령이 점점 일방적인 경향이 되어간 만큼, 문학 독자들이 세대 단위로 급격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즉 책을 읽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지는 20, 30대 대학생 독서층으로 축소되고, 예전에 폭넓은 연령대에 퍼져 있던 여성 독자층이 붕괴하였다. 그러다 보니, 21세기 들어 메이저 출판사들이 젊은 독자층과 취향이 맞는 작가들을 특별히 관리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다시 좁혀지다 보니, 메이저 출판사들 사이에서 작가들을 돌려막기하는 관행이 생겼다.
이런 현상이 한국문학을 왜소하게 만들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약진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무수한 군소 출판사들을, 글쓰기의 욕망을 토해내듯이, 배출시켰고, 그 출판사들의 경쟁 속에서, 연령대가 다른 많은 작가들의 산개와 더불어 본격 문학 자체의 장르적 확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한국문학의 지속가능한 진화의 흐름을 다시 간종그리는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제56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자가 주류에서 이탈한 독립 작가였다는 것은 그러한 추이를 적확히 반영한 현상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드라마나 가요만이 아니라 문학 쪽에서도, 한국계 외국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4년에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우일연(Ilyon Woo)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소설과 시에서 세계 각국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작가들의 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한국계 작가들은 물론 한국 작가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시련과 언어적 기반을 상당수 공유하고 있고, 또한 양방향 번역을 비롯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문학과 깊이 교류하고 있다. 이들을 한국문학 안에 포함하느냐의 여부는 한국인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나, 한국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로 마음먹은 외국인들에게나 중요한 공안이 될 것이다.
제57회 동인문학상은 꽤 묵중한 이 요동들을 안고서 출발한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할 일도 늘어났고 심사도 복잡해졌다. 출발선상에 선 마음이 매우 심란하다. 첫 번째 독회는 2025년 8~9월 기간에 출판된 책들을 대상으로 한다.
♦양면의 조개껍데기
로봇의 분열적 존재론의 스핀
로봇이 인간에 비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체성과 “정체성”(이 용어는 이 소설집의 핵심 용어다.)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은 몸과 의식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데 비해, 로봇은 그 둘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분리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분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분리를 통해서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자유롭게 변형 조립(‘트랜스포머’처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리에는 모종의 위계관계가 성립된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조정한다는 것. 바로 이 때문에 신체성과 정체성의 분리라는 ‘아젠다’를 두고 대부분의 고전적 사이파이는 신체성의 초월이라는 방향으로 서사를 전개해 나갔다. 저 옛날,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대로, 사유의 정밀성을 받쳐주기에는 몸이라는 기관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래빗홀, 2025.08)를 이채롭게 하는 것은, 그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 정체성과 신체성의 일치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한 체험을 찾아 나선다. 게다가 그들은 신체성의 장착이 최종적으로 신체의 부식과 종말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점도 수락한다. 신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필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로봇 ‘앤드류 마틴’의 태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앤드류의 목적은 인간이 되려는 것이고, 그 까닭은 자아의 실현에 근거한 인간의 존엄성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공학 3원칙’이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로봇 직무의 연장 선상에 위치한다.
반면 김초엽 소설의 로봇들의 신체성에 대한 갈망은 체험의 진실성에 근거한다. 즉 정체성만의 진행은 주체의 독단과 대상에 대한 횡포를 유발하며, 신체성은 주변 대상과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데, 이때 이 접촉은 적대와 화해 사이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만남의 사건들을 낳는다. 체험의 진실성은 이 만남의 가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김초엽 소설의 신체성 지향은 인간됨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모든 이질적 존재들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의지, 간단히 말하면, 인간적인 것과 로봇적인 것을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표출된다.
이는 사이파이에 대한 의식의 뚜렷한 진화를 가리킨다. 김초엽은 그 진화의 한 고개를 넘고 있다. 그의 차후의 행보가 더욱 호기심을 바짝 당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릉에서
경쾌하고 자유롭도다
박솔뫼의 새 소설집,『영릉에서』(민음사, 2025.08) 는 그의 소설이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삶에 기반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박솔미의 인물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건 그 각각의 개별성이다.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에 동원되는 날씨, 시간, 장소 등의 배경들도 배경이 아니라, 마치 개별화된 독립적 인물처럼 표현된다. 가령 이런 기술을 보라.
“어제의 영릉도 좋았고 오늘의 영릉도 좋으며 풀은 어제도 오늘도 짙은 연두색이지만 어쩐지 어제의 영릉은 모든 것이 선명하다고 느꼈다. 원준이는 그 차이를 팔레트의 물감의 색을 섞어서 보여 줄 수 있었다.”(pp.30-31)
그러니까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서로 어울리고 이런저런 관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려는 생각도 거의 품지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방 번호와 이름을 남기고 『미국의 송어낚시』를 빌려와 읽었고 체크아웃 시 열쇠와 함께 반납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소설을 침대 오른편 램프 옆에 두고 떠났고 누군가는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읽다 잠든 누군가는 바닥에 『미국의 송어낚시』를 떨어뜨렸고 호텔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숙박객들은 모르는 여러 움직임과 속삭임으로 송어낚시는 침대 아래로 옮겨진다. 침대 아래 한가운데의 송어낚시는 침대 위의 움직임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언제 발견되는 걸까?”(pp.39-40)
마치 무수한 인물들이 투명하게 서로를 통과하며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나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독자는 ‘지나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들이 무언가 특이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따라 올라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쏟아지는 녹색 속으로 물소리, 나무와 바람 속으로 걸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나는 그것이 정말 좋았다. 나는 그곳을 여러 번 따라 올라간다.”(p.34)
‘정목이’와 ‘원준이’는 한때 우연히 어울렸던 동무들이다. 그들이 우연히 엮이게 된 까닭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정목이 아버지를 따라 그 둘은 숲으로 갔었다. 그리고 화자 ‘나’는?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사람이다. 요컨대 둘과 어떤 진한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의 기술에서 인물들은 죄다 서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 움직임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전전 인용문에 다시 눈길을 주면,
“호텔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숙박객들은 모르는 여러 움직임과 속삭임으로 송어낚시는 침대 아래로 옮겨진다. 침대 아래 한가운데의 송어낚시는 침대 위의 움직임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언제 발견되는 걸까?”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나오는 걸까? 그걸 지문 자체가 물어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에는 끊임없이 서로를 따르고 이끄는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목표도 없고, 정해진 경로도 없다. 작품은 그런 움직임의 동작들을 투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독자는 왜 이런 의미 없는 동작들을 눈길로 좇으면서 무언가 신선한 느낌을 갖는 것일까?
우선 이 운동 속에서 독자는 일상 그 자체를 섬세하게 바라보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운동들의 접면들마다 풍부한 삶의 내용들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들에서 운동이 장소들과 부단히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부시장’, ‘미 극동공병단 부지’, ‘국립중앙의료원’, ‘스칸디나비아 기념관’, ‘동대문 상가’, ‘명동성당’, ‘초량시장’,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홋카이도’, ‘거제도’, ‘대전’... 이 지명들은 그 자체로서 공적인 등록지이면서 동시에 모종의 역사 혹은 추억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인물들은 그들이 만나는 장소의 잠재된 의미망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지우면서 나아간다. 그래서 “구석구석 접힌 서울을 청소기로 밀며 나아가는 것 같다”(p.225)는 표현이 나온다. 역사를, 추억을 환기시키되, 그것들을 지우며 나아간다?
그러한 글쓰기가 작품의 공간을 풍요롭고도 시원하게 부푼 공기로 채운다. 그에게 만남은 공이 통통 튀는 만남이다. 이 움직임 속에서 가장 넓고 긴 접면을 만드는 촉각조차도 “찬물에 세수를 하는 것처럼”(pp.63~64) 닿은 것을 씻어내며 자신의 청초한 모습을 새초롬하게 빚어낸다.
아마도 이것이 박솔뫼 글쓰기의 매력이리라. 그리고 이 매력은 분명, 세계와 조우하면서도 자신의 개별성과 자유로움을 결코 놓치지 않는 인물의 분방함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데에서 온다.
그렇다면 이것을 현대인의 ‘새로운’ 태도라고 지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최근 일군의 지식인들이 이탈로 칼비노의 『다음 천년을 위한 6개의 강의 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Houghton Mifflin Harcourt. 2016, 국역본: 『문학강의』[에디토리얼, 2025])에서 영감을 받아 주창하게 된 “에피-모더니즘”(‘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일관성’을 기본 자세로 갖는)의 한 모형, 19세기적 인간과 대조되는 21세기적 인간의 ‘경쾌한’ 모습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쾌한 태도도 무언가를 새로 낳고 어딘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나갈 때에만 존재 이유를 가질 것이다. 그 점에서 박솔뫼의 소설들은 여전히 문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경쾌한 태도가 단순한 웰빙 체조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미세한 즐거움’의 건강 효과에 대해 자주 말한다. 즉, “거창한 목표보다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찾는 것이 웰빙에 더 효과적일 수 있으니, 이러한 긍정적 경험은 미주 신경(Vagus nerve)을 활성화하여 심박수를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회복탄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또한 “‘음미하기(Savoring)’ 훈련은 뇌의 가소성을 이용해 긍정적 감정을 더 오래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다”(『BBC Science Focus,』2025년 1월호.)고도 한다.
웰빙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기제들은 오늘날 사방에 널려 있다. 문학은 그것을 반성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장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박솔뫼의 소설이 현대인의 가장 신선한 태도에 근접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더 낳아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4년 전 필자는, 제52회 동인문학상 독회평에서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기왕 소통을 시작했다면, 이 개입 속에 무언가 진실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철거당하는 순간에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인지, ‘텐트 연극’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가능한 구상을, 또는 그 최소한의 구상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라도, ‘아 이런 형태였지’라고 가정하는 대신에, 제출하고, ‘모두 자신들의 가설을 이어나갔다’라고 쓰는 대신, 그 가설들의 초안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새해의 기쁨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이 의문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영릉에서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머무는 소설
박솔뫼의 소설은 묘해서 그것에 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묘하기 때문에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고, 다 읽고 나서도 무엇 하나 확연하지 않아 여운만 길게 남는다. 그런 느낌을 묘하다고 하는 까닭은 妙라는 한자가 새롭다, 기이하다, 젊다, 뛰어나다, 아름답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째서 새롭고 기이하고 젊고 뛰어나고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또한 쉽게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일이다.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면 차라리 꼬투리라도 잡으면 어떨까 싶어 그리하기로 한다.
《영릉에서》에 실린 단편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에 서원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서원은 술을 마시다 알게 된 친구의 친구를 몇 번 만나고 함께 지내다가 그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는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160쪽)
오래 사귀어 온 친구도 아니고 술을 마시다 알게 된 친구의 친구가 한 이야기라면 흘려버릴 만도 한데 그 말을 문득 떠올리며 서원은 산책하다 말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박솔뫼답게 앞뒤 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알려달라고 하면 분명 “모른다”고 할 것이다. 독자가 궁금해할 때 박솔뫼 문장의 서술어는 “모른다”거나 “알 수 없다”이기 일쑤니까. 그래서 묘한 것은 설명되지 않은 채 묘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
이 말을 꼬투리로 잡은 까닭은 언젠가 필자의 친구가 이와 같은(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아르메니아의 시인 사야트 노바의 삶과 시 세계를 영화화한 <석류의 빛깔>을 본 뒤였을 것이다. 지루해서 반 이상 졸았다면서도 중간 중간 깨어날 때마다 스크린에는 무서운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러한 장면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는 알지 못해 다시 지루해졌다고.
친구의 말도 말이지만 박솔뫼의 소설을 읽으면서 필자는 어쩌면 그 영화를 만든 구소련의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를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는 “나는 창문으로 세상을 봅니다. 창문 너머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라고 했던 그의 말. 박솔뫼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영화감독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창문 너머의 세상은 바깥세상임이 분명한데 아닌 게 아니라 박솔뫼의 소설에는 좀처럼 창문 안의 세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바깥이고, 인물들은 정원과 길 위에 있거나 아예 나라 밖에 있다.
창문 너머 혹은 바다 건너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다른 세상은 아니다. 거기에는 을지로가 있고 국립중앙의료원이 있다. 아오모리현이 있고 국립히로사키 대학이 있다. 애리가 있고 제시가 있다. 화덕에 구운 따뜻한 빵이 있고 그걸 먹으며, 작은 이파리가 그려진 간판의 바에서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조차도 문득문득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라고 스스로 묻는다. 지루할 수밖에 없다.
무서운데 이상하게 지루하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루한데 이상하게 무섭다’가 된다. 뒤집을 것도 없다. 무서움과 지루함이 한몸인 문장이니까. 그것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 없이 빵을 먹고 술을 마시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스스로 묻는다. 이처럼 기괴하고 무서운 일이 있을까.
지루한 것은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러한데, 무서운 것도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러하다. 그러니 지루하지 않거나 무섭지 않으려면 이유를 알면 되겠는데 박솔뫼는 ‘모른다’거나 ‘알 수 없다’며 브라우티건적 우연들만 중뿔나게 늘어놓는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지루하고 거친 농담의 화면처럼.
창문 너머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창문 너머의 세상이란 창문 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창문 너머에 세상이 있다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할 까닭이 없다. 다른 세상이 아니라면 창문 너머의 세상은 창문 안의 세상을 양적으로 확대해 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문 너머란 창문 바깥이라는 의미일 테니 이럴 때는 아무래도 블랑쇼의 실용신안특허인 ‘바깥’을 빌려다 써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질서에 강제되거나 순화된 ‘안의 눈’으로 본 ‘바깥’은 그저 그런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안의 눈’을 깨부수며 쳐들어온 선험과 실재(the real)의 ‘바깥’은 무서운 게 될 것이다.
무섭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점차 ‘창문 너머’를 보게 된다면(그것이 뚫고 쳐들어오게 내버려 둔다면) 바깥은 새롭고 젊고 기이하며 아름다운 터전이게 되지 않을까.
박솔뫼의 소설은 묘해서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고, 다 읽고 나서도 확연하지 않아 여운만 길게 남는다고 서두에 적었는데, 필자에게 있어 그 여운이란 새롭고 기이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이나 고독에 가까운 쓸쓸함이었다. 워낙 이야기 자체가 비선형적인 데다 파편화되고 몽환적이기까지 해서, 괜스레 쓸쓸해지는 까닭 또한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세종대왕릉인 영릉, 을지로에 있던 1950년대의 미 육군 극동공병단, 아오모리 공원에 관한 스케치들이 무심하게 지나갈 때마다 시간성이라는 것이 주는 아련함이 어떤 애수를 부추겼다. 부단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소든 인간이든 그때그때 존재적 사건으로 부침하고 말 뿐이라는 전언 같아서.
이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던 차에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거의 끝 부분에 놓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가져 본 적 없는 그러나 가져본 적 없어서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내게 머물렀다.’(225쪽)
건조한 산뜻함이 추위처럼 내게 머무는 순간 쓸쓸함마저도 남지 않고 투명하게 비워지는 듯한 이 느낌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양면의 조개 껍데기
김초엽의 이번 소설집에도 수 세기에 걸쳐 진지한 작가들이 해온 문학적 주제인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가 발견된다. 물론 그만의 스타일과 방식으로. 예컨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나 한 주체 안의 여러 자아에 대한 탐구는 고전적인 문학적 작업이다. 그렇지만 이 탐구는 사실 이 시대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좀 멀어진 것이 사실이다. 사회 현상이나 당대 이슈들을 추수하는 모양의 요즘 소설 경향을 생각하면 이 작가가 기울이는 이런 노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김초엽은 이 시대 가장 진지한 문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인지 모른다. 그의 소설이 갖는 의의는 가장 오래된 이 주제를 가장 첨단의 방식으로 소설화한다는 데 있다. ‘질문’과 ‘상상’, 혹은 ‘아이디어’가 그가 가진 중요한 도구일 것이다. 예컨대 그는 현상을 반영하거나 반응하는 대신 본질을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독특한 상상/아이디어를 찾아낸다. 이 상상/아이디어의 자원은 문학 외부, 무엇보다 과학 지식이다. 이 자원이 그 유구한 문학적 물음에 대한 새롭고 다른 문제 풀이를 가능하게 한다. 질문이 같다고 답이 항상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거니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내는 방법과 과정이 어떠한가이다. 그 방법과 과정의 남다름에 의해 질문의 의미가 부각되고 답이 새로운 빛으로 조명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문학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김초엽의 소설들을 통해 보고 있다.
‘기계였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기계가 되려는’ 인물의 녹슬고 싶어 하는 욕망을 통해 소설은 ‘자기와 다른 존재가 되려는 갈망’이 결국 ‘진짜 자기가 되려는 갈망’에 다름 아님을 시사한다. 자기 안의 타자아와의 불화로 힘들어하는 다른 소설 속 인물은, 개인은 타자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집단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동기화를 통해 완벽하게 소통하는 또 다른 소설 속 외계 인물이 불완전한 소통 매체인 언어를 가진 지구인의 ‘의도적으로 만든 거대한 불일치의 세계’를 의아해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효율을 위해 택한 획일주의로 인해 배제된 디테일, 개성, 차이의 가치를 성찰하게 된다. 원래도 불완전한 소통 체계(언어)에 그렇게 많은 불일치를 더해서 얻어낸 문장이 사랑의 말(“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이라는 「진동새와 손편지」의 아름다운 결말을 효율 지상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김초엽 소설의 다른 미덕은 과학 지식이 모자라거나 SF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예컨대 나 같은 독자들을 배려하는 글을 쓴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양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그의 소설이 특정 장르의 담을 넘어 보편 문학의 장 안으로 성큼 들어오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의 소설은 조밀하다. 독자들은 소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촘촘히 설계된 길을 쫓아 걷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에 도달하게 될 터인데, 그곳이 문 바깥인 줄도 알지 못한다. 소설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반듯반듯한 길일 뿐만 아니라 공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길이 세계에 대한 질문이라면 공기는 그 질문을 감싸고 있는 서정이다. 김초엽의 소설 속에서 SF의 세계가 문학적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낯설고 기이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세계가 익숙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독자로서 던지게 되는 질문도 없지 않다. 이 소설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 김초엽이 추구하는 것은 균형으로 보인다. SF적인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그것을 현실의 감각 속에다 풀어놓는 것. 그래서 익숙한 질문들. 나와 당신 그리고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거꾸로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미래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을. 그래서 그 익숙함과 편안함은 위험한가. 질문은 도돌이표로 되돌아온다.
표제작은 아니지만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에 첫 번째로 실린 단편소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그 질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있는, 반인간인 존재 수브다니가 있다. 인간의 생체적인 특성과 기계의 물리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미래의 세계에는 피부를 커스터마이즈해서 바꾸기를 소망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을 아더킨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감각하는 ‘인간’들. 인간의 몸에 갇힌, 그러나 인간이고 싶지 않은 존재들. 이들은 자신의 피부를 자신이 감각하는 다른 종의 것으로 바꾸기를 욕망한다. 수브다니는 이런 세계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인데, 자신의 피부를 금속으로 바꾸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녹슬고 싶어요.’
미래라는 배경을 걷어내고 나면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세계와 나, 타자와 나,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항. 질문이 팽팽할수록 그 질문에서 놓여나고 싶은 매우 인간적인 욕구 역시 마찬가지다. 녹슬고 싶은-죽음에 대한 욕망 역시 익숙한 문학 서사다. 그러나 여기에 김초엽만의 미래 서사적인 디테일이 들어가면 소설의 세계가 달라진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떻게 해도 녹슬지 않을 것 같은 질문들이 독자들의 세계로 들어온다.
이 작품에는 어려서 인형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천과 솜으로 만들어진 인형에게는 자해든 자기 파괴든 조금은 덜 위험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인데, 김초엽의 소설은 확실히 덜 파괴적이고 덜 위험해 보이지만, 그러나 스며드는 힘이 특별하다. 대단하기도 하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영릉에서
서사(敍事)라는 말에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하거나 기록한다는 뜻이 있다. 서사는, 시공간 속에서 인물이 수행하는 행위의 시작부터 결말까지를 기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이 이야기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 사건은 생겨나고 발전하고 종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 또는 논리적 연관을 확보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건은 반복해서 찾아오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건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행복한 시공간의 표상이 되어 이상향에 대한 희구를 위한 원천이 되기도 하며, 다른 어떤 사건은 살인 사건의 동기이자 원인으로 밝혀져 세계의 폭력적인 구조를 드러내기도 하며, 또 다른 어떤 사건은 매우 사소한 듯이 보였지만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운명의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 서사는 그 어떤 행위(운동, 움직임)를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한다.
새해 첫 심사 소견을 소설 또는 서사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박솔뫼의 소설이 가진 그 어떤 놀라움에 대해 거칠게라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솔뫼의 소설집 ‘영릉에서’에 수록된 소설들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사건들은 없다. 어떤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사건의 씨앗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계곡에 친구와 함께 놀러 간 일도 있고, 1979년에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영국 소설가 브라우티건과 관련된 전시회가 개최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어떻게 발전해서 종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끼치는 사건, 또는 인물들의 운명이나 성격과 관련된 실체적인 사건은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박솔뫼의 소설은 실체적인 사건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사건 이전의 사건, 또는 사건이 되지 못한 운동(움직임)들, 또는 과정으로서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영릉에서’를 보자. 이 소설은 20년 만에 원준이가 화자(話者)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원준이는 친구 정목이와 함께 정목이 아버지의 차를 타고 놀러 갔는데, 원래 언어 장애인인 정목이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버렸고, 원준과 정목은 다른 차를 얻어 타고 영릉까지 와서는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집까지 걸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정목 아버지는 왜 중간에 가버렸는지, 이 일은 이후 원준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는지, 또는 어떠한 사건으로 기억에 남았는지, 혹시 원준에게 근원적 공포를 각인시켜 준 사건은 아니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이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사건으로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에 소설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정목이와 원준이가 정목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13면)이다. 움직이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그 무엇. 작품의 말미에서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은, 20년이 지난 지금 원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화자 나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두 가지 서사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하며 서사를 불확정적인 지점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가능성은, 20년 전에 원준, 정목 그리고 화자 나가 함께 정목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계곡에 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원준은 화자 나가 동행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고 뭔가 따라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진술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 또 다른 가능성은, 화자 나는 20년 전의 계곡 나들이에 동행한 적은 없고 원준의 이야기 속에 완전히 자신을 이입하여 원준과 정목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야기의 가능성 중에 어느 쪽에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박솔뫼의 소설에는 사건이 없다는 것. 사건 아닌 사건, 사건 이전의 사건, 사건이 되지 못한 움직임 또는 흔들림과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소설에서 서사가 사건과 함께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박솔뫼의 소설은 비(非)사건에 대한 서사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서사적 흥미로움을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된 서사의 일반적인 문법을 벗어나, 사건 이전의 운동(움직임, 흔들림, 사라짐 등)을 서사의 대상으로 삼아서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끊임없이 옮겨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박솔뫼의 소설이 보여주는 비(非)사건과 비슷한 것들이 아닐까.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고, 나중에 크게 문제 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힐 것 같지도 않고, 이후의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 같지도 않지만, 그 일이 진행되는 시간과 공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성(운동성)으로 충만한 경험들. 어쩌면 박솔뫼의 소설은, 나의 삶은 대단한 것이라는, 소설과 관련된 모종의 강박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닐까.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는다고 해도, 별다른 사건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