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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6.25가 나자 청주 현도지서장 신아무개는 상부 지시로 현도국민학교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70명의 보도연맹원 중 3명을 선별해, 홍아무개 순경에게 현도면 상삼리 고갯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마루(밤고개)에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상삼리 김기모와 우록리 김종협, 정종태가 제물(祭物)이 되었다. 상부의 지시를 무조건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청주 가면 다 죽어"
야마토연타
▲ 안만근 국군 수복 후에 찍은 남이지서 단체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만근지서장
ⓒ 충북역사문화연대
릴게임바다이야기
신 지서장이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얘긴 줄 모르고 청주경찰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8일이었다. 그들이 남이면 소재지를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지서에 들러서 지서장님께 인사나 하고 가세"라고 말했다. 안만근 남이지서장은 원래 현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 카카오야마토 행을 반갑게 맞이한 안만근 지서장은 이들이 청주경찰서로 간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지금 청주로 가면 다 죽어. 얼른 도망가게."
안 지서장의 소리에 현도 보도연맹원들은 기겁을 하고 면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현도면 보도연맹원 70명 중 3명만이 죽고, 전원이 살아날 수 있었 릴게임무료 다. 오경세(1935년생, 현도면 중척리)의 증언이다.
기존에 충북 청원군 현도면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학살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 신아무개 지서장이 살려주었다는 설, 둘째, 안만근 지서장의 귀띔으로 살아났다는 설, 셋째, 현도면 보도연맹원 오갑진(吳甲鎭)이 소집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작용할 수는 있었으나 결정적인 것은 안만근의 역할이었다.
안승갑이 쓴 1950년 7월 8일 일기에는 "보도연맹회원 청주 들어가던 중에 남이면에서 돌아오다"라는 기록이 있다(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남이면 보도연맹원 일부와 현도면 보도연맹원 절대 다수를 살려 준 안만근의 선행은 이후에 역사에 묻혀졌다(박만순, <박만순의 기억전쟁 1>, 2021).
세 마차 분의 쌀 돌려보내
"부모산에 나무 심으러 갑시다."
강서지서장 남정식은 나무와 삽, 괭이를 들고 부지런히 서둘렀다. 나무를 심기 위해 참여한 주민들은 산에 올랐다. 부모산은 해발 23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으로, 충북 청주시 강서동에 위치해 있다.
주민들과 보도연맹원들의 작업은 한나절 만에 마무리되었다. 나무 심기가 끝나자 남 지서장은 "오늘 하루 고생했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세요"라고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강서면 보도연맹원 50명은 자신들이 죽음의 땅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줄도 모르고 집으로 갔다. 보도연맹원들이 남 지서장의 깊은 뜻을 안 것은 여름 난리에 피난 갔다가 수복된 후였다. 인근 면인 오창면, 옥산면, 강내면 보도연맹원들이 싹쓸이하듯 집단학살 당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서면 보도연맹 책임자였던 이상덕도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순간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상덕 부친은 남지서장이 너무 고마워서 수복 후 쌀 세 마차 분을 강서지서에 보냈다. 하지만 남정식 지서장은 단호히 거부하고 쌀을 돌려보냈다. 남 지서장은 2007년 생전 인터뷰에서 "얼굴을 모두 알고 있던 순박한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 남정식 편지글 강서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남정식 지서장 편지글
ⓒ 충북역사문화연대
강서에서 조치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강외면(현재 오송읍)이 나온다. 강외지서장 권돈(혹은 김백룡)도 남정식 강내지서장과 마찬가지 판단을 했다. 상부의 명령으로 관내 보도연맹원 35명을 소집하긴 했지만, 머리가 아팠다.
'이들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모두가 죽을 텐데'라는 생각 끝에 그는 창고 문을 열고 "가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5명의 보도연맹원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들은 지서장이 이야기한 '가라'는 의미를 '청주에 있는 충북보도연맹 사무실로 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서창고(소방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30명의 보도연맹원은 집으로 갔지만, 5명은 청주 방향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던 중 강내지서 앞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앇다.
"당신들 뭐야?""강외면 보도연맹원니다."
그들은 바로 강내지서에 구금되었다가 7월 10일 탑연리 야산에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 강외면 연제리 남광희를 비롯해 강외면 보도연맹원 5명의 최후였다. 강외지서장의 의로운 행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남광희를 비롯한 3명의 연제리 보도연맹원의 시신은 사건 발생 2~3일 후에 수습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국민보도연맹사건', 2008).
공포탄을 쏴
오근장 마을 곳곳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지서로 모여들었다. 오근장은 북일면(현재 내수읍) 오근장리로 하나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1928년 조치원~충주 간 충북선 개통으로 오근장역이 신설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기차역이 만들어지면 외지인의 유입도 빈번해지고, 새로운 사상과 정보도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로 일찍이 오근장에도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었고, 6.25 직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가 많았다. 일개 리에 불과한 오근장에 2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있었으니 말이다.
도아무개는 마을 이장의 통보로 지서로 갔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 가라여'라고 생각한 이는 도씨만이 아니었다. 소집에 응한 이들은 한결같이 입이 나왔다. 하지만 지서에 모여서는 '고양이 앞의 쥐' 격으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문턱이 높은 관공서 앞에만 서면 언제나 '을'(사회적 약자)이 되는 이들은 지서장의 명령대로 기차역 인근에 있던 통운창고로 갔다.
▲ 통운창고 터 오근장 통운창고 터. 2007년도 촬영
ⓒ 박만순
통운창고에 구금된 이들은 오근장리 보도연맹원 약 200명이었다. 이들은 얼마 후 자신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갈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고 안에 구금된 이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나 좌익활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던 194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근장 마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농사꾼인 그들에게 '품앗이를 해준다'는 이야기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다.
그렇기에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이나 농민회 간부들이 "여기에 도장 찍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해 준다"고 하는 건 농촌공동체에서 배제시키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입한 것이 민애청이나 농민회였다. 그들은 이후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되었다. 도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기도나 충북 이북 지역 소식을 접하지 못한 이들은 통운창고에 갇혀 있으면서도 만사태평이었다. 하지만 통운 창고 밖에서는 안달이 났다.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의 미래가 뻔하다고 판단한 이는 의용소방대장 김대곤과 그의 동생 김태곤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데' 라는 게 그들의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김씨 형제는 정원모 지서장에게 입을 열었다.
"지서장님, 보도연맹원들을 풀어 줍시다.""...""죄없는 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민 끝에 정 지서장은 묵묵히 창고 열쇠를 내주었다. 정원모 지서장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씨 형제는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이고 통운창고 문을 열었다.
"다들 집으로 가시오.""젠장할,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돌아가는 보도연맹원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김씨 형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 정원모 지서장이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쐈다. 상부의 추궁에 대비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탈출했는데, 모두 놓쳤다고 말하려고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도씨가 전쟁 후 낳은 아들은 이후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도아무개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김대곤·김태곤 형제와 정원모 지서장의 선행 덕분이다.
▲ 청주 미담사례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청주 미담사례
ⓒ 박만순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의인들
1차로 소집된 청원군 부용면 보도연맹원들은 분터골과 피반령에서 학살당했고, 2차로 소집된 26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된 직후였다. 3차로 소집된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부강초등학교 강당에 구금된 지 5일째였다. 강당은 교실 두 칸을 헐어 행사 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계급도 없고, 군복만 입은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와 감금되어 있는 이들을 죽인다고 M1 소총에 실탄을 채우며 한 줄로 똑바로 서라고 했다. 당시 지서 주임 이아무개가 "여기 있는 분들은 내가 책임지니까 군인들은 건드리지 마라"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군인들은 퇴각했고,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집으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 김상근(1924년생) 증언).
남이면은 2차로 소집된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 이때 현도면 보도연맹원들에게 귀띔을 해 주어 67명의 생명을 사지(死地)에서 건져 준 안만근 지서장이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북일면(현 내수읍)의 상황은 내수3리에 살았던 김문섭(1925년생)의 2006년도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북일면 보도연맹원들이 전쟁 직후 내수초등학교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며칠 후 소방서 창고로 이송되었다. 소방서 창고에 감금된 이들 중 일부는 북이면 옥녀봉으로 끌려가 죽었다. 나머지는 살아났는데 한봉수 의병장 덕분이었다.
한봉수 의병장은 헌병대 대장을 만나 보도연맹원들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다. 당시 헌병대 대장은 육군 상사였는데, 한봉수 의병장이 구한말과 일제시대 의병활동을 할 때 부하였던 사람이 헌병대 대장의 할아버지였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한국전쟁기 충북 청원군에는 의인들이 다수 있었다. 상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참지서장·의용소방대장 들이었다. 아무리 전쟁 상황이라 하더라도 반인권적인 명령에 순응해 국가폭력·전쟁범죄에 동조하는 행위는 용서될 수 없는 행위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상부의 명령이라며 전쟁범죄에 가담한 독일군 장교들을 21세기 들어서도 사법처리하는 이유이다.
이승만 정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청원군 의인들은 전쟁 직후부터 현재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제라도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참경찰과 의인으로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살려준 독일인 기업가 쉰들러는 알면서, 대한민국의 의인들을 모르면 말이 되겠는가!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청원군의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있다. 청주경찰서 보도연맹원 소집 명령에 아예 응하지 않은 지서장들이다. 가덕지서와 낭성지서장이 그들이다. 그중 노상도 낭성지서장은 의용소방대원에게 "보도연맹원 명부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당시 명부를 불태운 최남현(1929년생)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쟁 발발 후 상부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지서장은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려 하지 않았다. "명단을 불태워라"는 지서장의 명령으로, 보도연맹원 명부는 지서 앞 신작로에서 태워졌다.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6.25가 나자 청주 현도지서장 신아무개는 상부 지시로 현도국민학교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70명의 보도연맹원 중 3명을 선별해, 홍아무개 순경에게 현도면 상삼리 고갯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마루(밤고개)에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상삼리 김기모와 우록리 김종협, 정종태가 제물(祭物)이 되었다. 상부의 지시를 무조건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청주 가면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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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만근 국군 수복 후에 찍은 남이지서 단체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만근지서장
ⓒ 충북역사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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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지서장이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얘긴 줄 모르고 청주경찰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8일이었다. 그들이 남이면 소재지를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지서에 들러서 지서장님께 인사나 하고 가세"라고 말했다. 안만근 남이지서장은 원래 현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 카카오야마토 행을 반갑게 맞이한 안만근 지서장은 이들이 청주경찰서로 간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지금 청주로 가면 다 죽어. 얼른 도망가게."
안 지서장의 소리에 현도 보도연맹원들은 기겁을 하고 면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현도면 보도연맹원 70명 중 3명만이 죽고, 전원이 살아날 수 있었 릴게임무료 다. 오경세(1935년생, 현도면 중척리)의 증언이다.
기존에 충북 청원군 현도면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학살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 신아무개 지서장이 살려주었다는 설, 둘째, 안만근 지서장의 귀띔으로 살아났다는 설, 셋째, 현도면 보도연맹원 오갑진(吳甲鎭)이 소집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작용할 수는 있었으나 결정적인 것은 안만근의 역할이었다.
안승갑이 쓴 1950년 7월 8일 일기에는 "보도연맹회원 청주 들어가던 중에 남이면에서 돌아오다"라는 기록이 있다(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남이면 보도연맹원 일부와 현도면 보도연맹원 절대 다수를 살려 준 안만근의 선행은 이후에 역사에 묻혀졌다(박만순, <박만순의 기억전쟁 1>, 2021).
세 마차 분의 쌀 돌려보내
"부모산에 나무 심으러 갑시다."
강서지서장 남정식은 나무와 삽, 괭이를 들고 부지런히 서둘렀다. 나무를 심기 위해 참여한 주민들은 산에 올랐다. 부모산은 해발 23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으로, 충북 청주시 강서동에 위치해 있다.
주민들과 보도연맹원들의 작업은 한나절 만에 마무리되었다. 나무 심기가 끝나자 남 지서장은 "오늘 하루 고생했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세요"라고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강서면 보도연맹원 50명은 자신들이 죽음의 땅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줄도 모르고 집으로 갔다. 보도연맹원들이 남 지서장의 깊은 뜻을 안 것은 여름 난리에 피난 갔다가 수복된 후였다. 인근 면인 오창면, 옥산면, 강내면 보도연맹원들이 싹쓸이하듯 집단학살 당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서면 보도연맹 책임자였던 이상덕도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순간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상덕 부친은 남지서장이 너무 고마워서 수복 후 쌀 세 마차 분을 강서지서에 보냈다. 하지만 남정식 지서장은 단호히 거부하고 쌀을 돌려보냈다. 남 지서장은 2007년 생전 인터뷰에서 "얼굴을 모두 알고 있던 순박한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 남정식 편지글 강서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남정식 지서장 편지글
ⓒ 충북역사문화연대
강서에서 조치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강외면(현재 오송읍)이 나온다. 강외지서장 권돈(혹은 김백룡)도 남정식 강내지서장과 마찬가지 판단을 했다. 상부의 명령으로 관내 보도연맹원 35명을 소집하긴 했지만, 머리가 아팠다.
'이들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모두가 죽을 텐데'라는 생각 끝에 그는 창고 문을 열고 "가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5명의 보도연맹원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들은 지서장이 이야기한 '가라'는 의미를 '청주에 있는 충북보도연맹 사무실로 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서창고(소방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30명의 보도연맹원은 집으로 갔지만, 5명은 청주 방향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던 중 강내지서 앞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앇다.
"당신들 뭐야?""강외면 보도연맹원니다."
그들은 바로 강내지서에 구금되었다가 7월 10일 탑연리 야산에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 강외면 연제리 남광희를 비롯해 강외면 보도연맹원 5명의 최후였다. 강외지서장의 의로운 행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남광희를 비롯한 3명의 연제리 보도연맹원의 시신은 사건 발생 2~3일 후에 수습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국민보도연맹사건', 2008).
공포탄을 쏴
오근장 마을 곳곳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지서로 모여들었다. 오근장은 북일면(현재 내수읍) 오근장리로 하나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1928년 조치원~충주 간 충북선 개통으로 오근장역이 신설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기차역이 만들어지면 외지인의 유입도 빈번해지고, 새로운 사상과 정보도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로 일찍이 오근장에도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었고, 6.25 직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가 많았다. 일개 리에 불과한 오근장에 2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있었으니 말이다.
도아무개는 마을 이장의 통보로 지서로 갔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 가라여'라고 생각한 이는 도씨만이 아니었다. 소집에 응한 이들은 한결같이 입이 나왔다. 하지만 지서에 모여서는 '고양이 앞의 쥐' 격으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문턱이 높은 관공서 앞에만 서면 언제나 '을'(사회적 약자)이 되는 이들은 지서장의 명령대로 기차역 인근에 있던 통운창고로 갔다.
▲ 통운창고 터 오근장 통운창고 터. 2007년도 촬영
ⓒ 박만순
통운창고에 구금된 이들은 오근장리 보도연맹원 약 200명이었다. 이들은 얼마 후 자신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갈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고 안에 구금된 이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나 좌익활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던 194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근장 마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농사꾼인 그들에게 '품앗이를 해준다'는 이야기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다.
그렇기에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이나 농민회 간부들이 "여기에 도장 찍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해 준다"고 하는 건 농촌공동체에서 배제시키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입한 것이 민애청이나 농민회였다. 그들은 이후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되었다. 도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기도나 충북 이북 지역 소식을 접하지 못한 이들은 통운창고에 갇혀 있으면서도 만사태평이었다. 하지만 통운 창고 밖에서는 안달이 났다.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의 미래가 뻔하다고 판단한 이는 의용소방대장 김대곤과 그의 동생 김태곤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데' 라는 게 그들의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김씨 형제는 정원모 지서장에게 입을 열었다.
"지서장님, 보도연맹원들을 풀어 줍시다.""...""죄없는 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민 끝에 정 지서장은 묵묵히 창고 열쇠를 내주었다. 정원모 지서장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씨 형제는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이고 통운창고 문을 열었다.
"다들 집으로 가시오.""젠장할,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돌아가는 보도연맹원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김씨 형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 정원모 지서장이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쐈다. 상부의 추궁에 대비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탈출했는데, 모두 놓쳤다고 말하려고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도씨가 전쟁 후 낳은 아들은 이후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도아무개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김대곤·김태곤 형제와 정원모 지서장의 선행 덕분이다.
▲ 청주 미담사례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청주 미담사례
ⓒ 박만순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의인들
1차로 소집된 청원군 부용면 보도연맹원들은 분터골과 피반령에서 학살당했고, 2차로 소집된 26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된 직후였다. 3차로 소집된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부강초등학교 강당에 구금된 지 5일째였다. 강당은 교실 두 칸을 헐어 행사 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계급도 없고, 군복만 입은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와 감금되어 있는 이들을 죽인다고 M1 소총에 실탄을 채우며 한 줄로 똑바로 서라고 했다. 당시 지서 주임 이아무개가 "여기 있는 분들은 내가 책임지니까 군인들은 건드리지 마라"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군인들은 퇴각했고,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집으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 김상근(1924년생) 증언).
남이면은 2차로 소집된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 이때 현도면 보도연맹원들에게 귀띔을 해 주어 67명의 생명을 사지(死地)에서 건져 준 안만근 지서장이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북일면(현 내수읍)의 상황은 내수3리에 살았던 김문섭(1925년생)의 2006년도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북일면 보도연맹원들이 전쟁 직후 내수초등학교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며칠 후 소방서 창고로 이송되었다. 소방서 창고에 감금된 이들 중 일부는 북이면 옥녀봉으로 끌려가 죽었다. 나머지는 살아났는데 한봉수 의병장 덕분이었다.
한봉수 의병장은 헌병대 대장을 만나 보도연맹원들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다. 당시 헌병대 대장은 육군 상사였는데, 한봉수 의병장이 구한말과 일제시대 의병활동을 할 때 부하였던 사람이 헌병대 대장의 할아버지였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한국전쟁기 충북 청원군에는 의인들이 다수 있었다. 상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참지서장·의용소방대장 들이었다. 아무리 전쟁 상황이라 하더라도 반인권적인 명령에 순응해 국가폭력·전쟁범죄에 동조하는 행위는 용서될 수 없는 행위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상부의 명령이라며 전쟁범죄에 가담한 독일군 장교들을 21세기 들어서도 사법처리하는 이유이다.
이승만 정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한 청원군 의인들은 전쟁 직후부터 현재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제라도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참경찰과 의인으로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살려준 독일인 기업가 쉰들러는 알면서, 대한민국의 의인들을 모르면 말이 되겠는가!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청원군의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있다. 청주경찰서 보도연맹원 소집 명령에 아예 응하지 않은 지서장들이다. 가덕지서와 낭성지서장이 그들이다. 그중 노상도 낭성지서장은 의용소방대원에게 "보도연맹원 명부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당시 명부를 불태운 최남현(1929년생)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쟁 발발 후 상부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지서장은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려 하지 않았다. "명단을 불태워라"는 지서장의 명령으로, 보도연맹원 명부는 지서 앞 신작로에서 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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