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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수여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10-0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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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정 기자]









▲ 공심채 지인이 텃밭에서 잔뜩 따다 준 공심채


ⓒ 송유정




"고구마 줄기 드실래요?"
"공심채도 조금 드릴까요?"

텃밭을 파산선고결정 가꾸는 지인의 다급한 요청이 있었다. 지인의 '조금'은 내가 아는 그것과 달랐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자라나는 텃밭 작물은 이미 지인 혼자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인을 따라 텃밭에 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수확해 집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 두 개를 가득 채운 고구마줄기와 공심채를 보면서 심호흡을 119머니 했다. 만만치 않은 양이었지만 내게는 이들을 해결할 오래된 취미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부이자 아내, 엄마로 살면서 나를 더 단단하고 깊은 존재로 만들어준 취미는 바로, '담그기'다.
장, 장아찌, 김치 등 '담그다'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것들을 다 담그고 있다. 조폭 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표현이 아니라, 식탁, 인간관계, 삶 햇살론 금리 특히 나의 내면을 풍요롭게 해주는 취미이다. 담그기의 가장 큰 효용은 뭐니 뭐니 해도 풍성해지는 식탁이다.

머릿속을 비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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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에 담그는 된장 아파트지만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서 된장은 잘 익어간다.


ⓒ 송유정




늦은 겨울과 초봄 사이에 전세자금지원 는 장을 담근다. 된장 사업을 하는 지인에게 메주를 받으면 소금과 숯, 짚, 고추, 대추, 항아리를 준비한다. 소독하고 깨끗이 닦은 항아리에 재료를 넣고 염도를 맞춘 소금물을 넣어주고 나서 두 달이 지나고 나면 장 가르기를 한 후 숙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사계절을 함께 지낸 이듬해에는 1년 밥상을 책임질 수 있는 맛 좋은 된장, 간장이 된다.

철마다 나오는 각종 채소는 김치, 장아찌 담그기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두릅, 마늘, 양파, 고추, 오이, 대파, 쪽파, 매실, 배추, 무, 깻잎 등 대부분의 채소가 김치, 장아찌로 변신 가능하다. 김치 한두 종류와 장아찌 한두 개만 있으면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밥 한 공기를 비울 수 있다. 과도한 나트륨 섭취를 막기 위해 염도를 낮춰 심심하게 담그는 게 포인트다.

담그기는 인간 관계에도 도움을 준다. 돌아보면 별거 아닌 일로 말다툼을 한 남편이라든가, 엄마의 잔소리로 방문을 닫아버린 아들 때문에 집안 공기가 어색해졌을 때는 김치를 담근다. 퇴근한 남편이 현관문을 들어설 때 코끝에 진동하는 진한 김치 양념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방문을 걸어 잠갔던 아들도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부엌을 쓰윽 염탐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










▲ 배추김치 배추 통김치를 담글 때면 노란 배춧잎에 속을 싸먹는 재미가 있다.


ⓒ 송유정




김치 속을 버무리는 내 옆에 우두커니 서서 침을 꼴깍 삼키고 애타는 눈망울을 한 남편과 아들에게 노랗고 여린 배추 속잎을 하나 떼어내 김치 속을 얹어 입에 넣어주면 엄지 척 한 방을 날리며 또 입을 내민다. 그러다 보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골들을 냈는지는 잊어버리게 되고 노글노글해진 마음만 남는다.


잘 익은 장아찌나 장을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반찬을 얻어먹었을 때, 부탁을 할 때, 신세를 졌을 때, 위로와 응원을 받았을 때, 사과를 할 때 등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때 그만이다. 잘 숙성된 장과 장아찌를 식탁에 올리며 나를 한 번 더 떠올려줄 수도 있고 말이다.










▲ 소분한 된장 맛있게 익은 된장은 마음을 나누기에 좋은 선물이 된다.


ⓒ 송유정




담그기가 가진 가장 큰 효용은 뭐니 뭐니 해도 나를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생기는 여러 심난한 일들,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비우는 데는 담그기만 한 게 없다. 재료를 장만하고 손질해서 본격적으로 담그는 과정은 복잡해 보이지만 의외로 단조롭다.


자주 담그지 않으면 엄두가 안 날 일이지만 알고 보면 크게 신경 쓸 일 없고 멍 때리기에 좋다. 담그기 과정은 재료 손질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뜩 쌓아놓은 쪽파를 다듬거나, 마늘을 까거나, 고구마 줄기를 까는 시간은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맘껏 웃기 좋은 시간이 된다.










▲ 고구마줄기김치 지인의 밭에서 따온 고구마줄기로 김치를 만들었다.


ⓒ 송유정




단순한 작업을 하며 오로지 '맛'만 생각하는 시간에 잠시 빠지다 보면 복잡해서 미칠 것 같던 뇌에게 휴식을 선물할 수도 있다. 머릿속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상대를 향해 뾰족하게 세웠던 촉수를 거두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말이다. 복잡하던 일들이 단순하게 여겨지고 의외의 간단한 해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담그기가 끝날 때쯤이면 한층 편안해진 마음과 성숙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 좋은 시간
요즘 들어 느끼는 담그기의 또 다른 효용은 고독을 즐길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장성한 자식들과 여전히 바쁜 남편 덕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칫 고립감과 외로움에 울적해질 수도 있겠지만, 담그기를 하다 보면 혼자 있어도 분주해지고 에너지가 생긴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혼잣말이 늘어난 탓에 문밖에서 누군가 몰래 엿듣는다면 필시 서너 명은 모여 있나 보다 생각할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있어보자~~~ 고춧가루가 어디 있더라~~?""여기 있잖아~~ 꼭 이런다니까? 코앞에 두고도 못 찾아요~""으이구으이구 넌 왜 자꾸 이렇게 흘리냐~~? 그렇게 조심 좀 하면서 일하래도 참 말을 안 들어요.""어머 어머 어머. 이번 김치 왜 이렇게 맛있어? 또 먹어 또 먹어. 맛있을 때 먹어야 돼.""보자 보자 보자~ 이번에는 뭘 또 담가볼까나~~"
지친 나를 달래주고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는 다른 방법들도 많다. 책을 읽거나 따스한 볕을 쏘며 걷는 것, 지인들과 수다 떠는 것, 풍경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유명한 식당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는 것,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며 추억을 쌓는 것.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보아도 밑바닥에서 올라올 줄 모르는 처진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이는 일이 특효였다. 특히, 장, 장아찌, 김치 등의 담금 요리는 우리 식탁에서 절대 빠지는 법이 없으니 그 자체로도 생산적일 뿐 아니라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해줬다.










▲ 공심채 장아찌 지인이 따다 준 공심채와 고추로 만든 장아찌


ⓒ 송유정




속이 시끄러울 때 이불 홑청을 다 뜯어 방망이로 두드려가며 손빨래를 하고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하던 옛날 어머니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심난할 때는 서랍에 있는 옷을 다 꺼내 차곡차곡 다시 정리한다거나 온 집안을 뒤집어 꼼꼼히 대청소를 한다는 이들도 나와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어떤 외부 자극이든 안으로 끌고 들어와 다듬고 담그는 시간 동안 내 마음도 성숙해졌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장, 장아찌, 김치가 익어가는 동안 내 마음이 깊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결혼 25년 동안 계속되어 온 취미 덕분에 날 섰던 신혼 시기, 자식들의 사춘기, 남편의 갱년기를 무사히 지나왔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담그기 스킬 하나면 어떤 근심, 걱정, 고난, 시련도 다 담가버릴 수 있을 것 같다.


《 group 》 내향인으로 살아남기 : https://omn.kr/group/intro


'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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