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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사무실에서 수 고개를 아닌가? 없었는데10년 전 ‘노란집’(서울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제퇴거 당한 주민 박철관(가명)씨가 지난 11월10일 친구의 방에서 그가 남긴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6월 그는 베개에 피를 토한 채 사망한 친구를 사흘 만에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문영 기자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 모바일릴게임 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
(가난의경로 10년 ①증발하는 사람들 에서 이어 바다이야기프로그램 집니다)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그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동자동(서울시 용산구)엔 아무도 없었다.
“아냐, 아냐, 그럴 리 없다니까.”
‘노란집’(쪽방 건물)에 살던 10년 전 박철관(가명· 골드몽사이트 87)과 최중호(가명·69)는 2층 첫 방과 마지막 방의 세입자였다. 박철관에게 최중호는 “징글징글한 웬수”였다. “인생 똑바로 살라”고 욕은 했지만 끝내 외면하진 못했다. 2015년 ‘강제퇴거 사태’로 그 집 주민 45명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최중호는 ‘철관 형님’에게 매달렸다. “출소하면 찾아갈 테니 내 짐 좀 맡아달라”고 옥중 편지를 써서 간청했다. 바다이야기다운로드 “나오기만 해보라”며 치를 떨면서도 박철관은 자신의 작고 좁은 방으로 최중호의 짐을 끌고 들어갔다. 최중호가 출소했을 땐 건물주에게 말해 옆방을 얻어줬다.
그 방에서도 최중호는 수감과 출소를 ‘중독처럼’ 반복했다. 며칠 안 보인다 싶으면 그의 구치소 수감을 알리는 문자가 박철관에게 날아왔고, 형기를 채운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박철관에게 왔다. ‘사태 5년’ 되던 2020년에도 최중호는 교도소에 있었고, 10년을 채운 지난 10월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박철관은 그가 교도소에 있는 줄 알았다. “들어간 지 1년쯤 됐으니 찾아올 때가 머지않았다”고 날짜를 꼽던 박철관은 “그 웬수가 ‘나왔다’는 말도 없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나한테 오지도 않고 종로에서?”
마지막 출소 뒤 최중호는 동자동으로 오는 대신 돈의동(종로구) 쪽방으로 갔다. 그의 수감 이유가 ‘공표’되면서 “더는 동자동에서 방을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박철관은 뒤늦게 추측했다. 박철관은 물론 동자동 사람 누구도 모르게 지난 2월21일 최중호는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 행정기관이 찾아낸 가족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3월19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무연고 장례를 치렀다. 화장돼 유택동산에 뿌려졌다.
“그냥 노숙하지 뭐.”
지난 7월14일 사망한 ‘노란집’ 옛 주민 김공호(가명·왼쪽)씨의 위패가 8월26일 서울시립승화원 무연고 사망자 빈소에 다른 두명의 고인들과 함께 모셔져 있다. 구재영 목사 제공
13명 중 2명만
박철관의 ‘웬수’는 최중호 말고도 많았다. 강제퇴거 통보가 붙은 뒤 박철관이 “어떡할 거냐”고 물을 때마다 202호 권영진(가명)은 남 일처럼 말했다. “웬수들과 얽힌 팔자”를 한탄하며 박철관이 직접 방을 찾고 계약을 도왔다. 이삿짐도 박철관이 날랐다. 노란집에서 나와 각자 다른 건물로 들어간 뒤부터 박철관은 “그 인간이 살든 죽든 신경을 껐”다. 권영진이 이미 숨을 거둬 동자동에 없다는 것도 박철관은 2년 동안 모르고 있었다. 그의 죽음(2023년 5월10일)을 알았을 때 박철관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더니만.”
권영진(당시 86)의 가족은 행정기관도 찾지 못했다. 화장(6월23일) 뒤 시립승화원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5년간 유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산골)됐다. 가난이 가족이고 친구였던 삶들이 배웅하거나 애도하는 사람 없이 사라졌다. 그들을 지우기에 10년은 충분했다. 말수 적고 조용했던 207호 이준길(가명)의 ‘조용한 죽음’(2022년 8월18일)도 기억하는 사람 없이 시간에 묻혔다.
주민 6명이 연희동(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집단이사’하던 날(2015년 5월) 이준길은 복잡한 표정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도 그들과 같은 주택에 방을 배정받았으나 입주를 포기했다. 지하철역과 한참 떨어진 새 거처를 “길눈이 어두운”(2015년 4월 인터뷰) 그는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란집에서 나와 85m 떨어진 쪽방으로 옮긴 그는 10개월 뒤 등촌동(강서구) 영구임대아파트로 재이사(2016년 3월)했다.
“9월9일 이준길님의 장례가….”
동자동에서 잊힌 그 이름이 2022년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당시 80) 화장 일정에 떴다. 노란집 쪽방보다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26.37㎡ ☞3회 ‘그들은 어디에’)에서 6년을 살다 그해 8월21일 요양병원에서 생을 멈췄다. 사인은 급성호흡부전이었다. 동자동엔 부고가 닿지 않았다.
“여기가 내 인생 첫 집인데.”
10년 전 노란집에서 짐을 빼며 103호 김공호(가명·71)는 낙담했다.
2015년 강제퇴거 된 그 집 주민 중 지금까지 최소 13명(28.9%)이 고인이 됐다. 가족이 시신을 모셔간 사람은 2명뿐이었다. 최근 5년간 사망한 4명도 모두 ‘무연고 처리’됐다. 누군가 장례를 지켜본 사람은 김공호밖에 없었다.
그는 중학생 때 가난한 부모의 짐을 덜어주려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2015년 5월 인터뷰)다. 식당에서 일하고 노숙도 하다가 시력을 잃고 정신질환을 얻었다. 14년을 산 노란집에서 쫓겨나 아래 건물 1층의 깊고 습한 방으로 옮겼다. 그 방에서 10년을 꼬박 살았을 때(지난 7월14일) 복도를 끼고 대각선 방의 동생(61)이 그를 발견했다. 아침마다 교회에 밥 먹으러 가자며 깨웠던 동생이 방문을 열자 “형님이 반듯이 누운 자세로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구재영 목사가 달려왔을 땐 “이미 몸이 차갑게 식은 상태”(심장마비 추정)였다. 전날 저녁 방으로 찾아간 구재영에게 김공호는 “목사님 만나 행복했다”며 과거형으로 말했다. 산골장(8월26일 공영장례)에 뼛가루를 뿌리며 목사는 “천국에선 부디 아프지 마시길” 기도했다.
이준길은 2022년 전국 무연고 사망자 4842명(보건복지부)에 포함됐고, 권영진은 이듬해 5543명(2024년은 6366명) 중 1명이었다. 최중호가 추가되면서 2025년 상반기는 3436명이 됐고, 김공호가 속한 하반기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다. 2021년(3603명) 이후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와 닿지 않거나, 연고자는 있지만 시신 인수가 거부된 고인이 5년 새 두배로 늘었다. 죽음에 종착하는 ‘가난의 경로’가 해를 넘길수록 무성해지고 있었다.
노란집에서 쫓겨나 10년을 꼬박 거주해온 방에 박철관(가명)씨가 깨끗하게 세탁해서 다려둔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가 걸려 있다. 87살의 그는 지금도 그 옷을 입고 가끔 ‘염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문영 기자
동자동을 못 떠나는 이유
“지팡이 짚는 순간 죽는 거야.”
술·담배를 하지 않는 박철관은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는 지난 30년간 동자동에서 사당동(동작구) 무료급식소까지 걸어서 밥을 먹으러 다녔다. 한강 다리를 건너 왕복 6시간을 두발로 오간 세월이 그의 ‘건강 밑천’이었다. 악착같이 버텨온 길에서 그는 여전히 허리가 꼿꼿했다.
‘방 관리’로는 그가 동자동에서 1등이었다. 물 새고 천장 주저앉은 방을 직접 고쳐 광나게 쓸고 닦았다. 벽엔 깨끗하게 세탁해서 칼줄을 세운 검은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 장의사로 일했던 그는 지금도 한달에 한두 차례 염 아르바이트를 했다. 타인의 마지막을 정리할 땐 “옷차림에도 최대한 예를 갖춰야” 했다. 박철관은 자신의 마지막 자리도 늘 살폈다. “주민센터에서 생사 확인 전화를 할 때마다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권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방만 좋아지면 뭐 해. 거기선 혼자 죽으면 구더기가 슬도록 발견 안 돼. 그래도 여기선 사나흘 안 보이면 누가 문은 열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죽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눈에 띄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가 동자동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박철관이 발견해준 죽음이 많았다. 강제퇴거 딱지가 붙고 열흘 뒤 사망한 노란집 209호 나환수(가명·당시 74)를 그가 발견했고, 지금 살고 있는 건물의 건넛방 “술쟁이 친구”(지난해 사망 당시 67)도 그가 발견해 신고했다. 박철관의 “맞은편 방 영감”은 “올여름 술 먹고 골목 아래 계단에서 굴러서 죽었”다. 그 방을 건물주가 아닌 박철관이 직접 치우고 청소했다. “웬수”가 출소해서 나오면 그 방에 살게 할 생각이었다. 사망 8개월 뒤(지난 10월20일)에야 소식을 듣고 박철관이 방문을 열었다. 어둠 가득한 빈방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 모바일릴게임 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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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냐, 그럴 리 없다니까.”
‘노란집’(쪽방 건물)에 살던 10년 전 박철관(가명· 골드몽사이트 87)과 최중호(가명·69)는 2층 첫 방과 마지막 방의 세입자였다. 박철관에게 최중호는 “징글징글한 웬수”였다. “인생 똑바로 살라”고 욕은 했지만 끝내 외면하진 못했다. 2015년 ‘강제퇴거 사태’로 그 집 주민 45명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최중호는 ‘철관 형님’에게 매달렸다. “출소하면 찾아갈 테니 내 짐 좀 맡아달라”고 옥중 편지를 써서 간청했다. 바다이야기다운로드 “나오기만 해보라”며 치를 떨면서도 박철관은 자신의 작고 좁은 방으로 최중호의 짐을 끌고 들어갔다. 최중호가 출소했을 땐 건물주에게 말해 옆방을 얻어줬다.
그 방에서도 최중호는 수감과 출소를 ‘중독처럼’ 반복했다. 며칠 안 보인다 싶으면 그의 구치소 수감을 알리는 문자가 박철관에게 날아왔고, 형기를 채운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박철관에게 왔다. ‘사태 5년’ 되던 2020년에도 최중호는 교도소에 있었고, 10년을 채운 지난 10월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박철관은 그가 교도소에 있는 줄 알았다. “들어간 지 1년쯤 됐으니 찾아올 때가 머지않았다”고 날짜를 꼽던 박철관은 “그 웬수가 ‘나왔다’는 말도 없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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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숙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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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진(당시 86)의 가족은 행정기관도 찾지 못했다. 화장(6월23일) 뒤 시립승화원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5년간 유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산골)됐다. 가난이 가족이고 친구였던 삶들이 배웅하거나 애도하는 사람 없이 사라졌다. 그들을 지우기에 10년은 충분했다. 말수 적고 조용했던 207호 이준길(가명)의 ‘조용한 죽음’(2022년 8월18일)도 기억하는 사람 없이 시간에 묻혔다.
주민 6명이 연희동(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집단이사’하던 날(2015년 5월) 이준길은 복잡한 표정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도 그들과 같은 주택에 방을 배정받았으나 입주를 포기했다. 지하철역과 한참 떨어진 새 거처를 “길눈이 어두운”(2015년 4월 인터뷰) 그는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란집에서 나와 85m 떨어진 쪽방으로 옮긴 그는 10개월 뒤 등촌동(강서구) 영구임대아파트로 재이사(2016년 3월)했다.
“9월9일 이준길님의 장례가….”
동자동에서 잊힌 그 이름이 2022년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당시 80) 화장 일정에 떴다. 노란집 쪽방보다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26.37㎡ ☞3회 ‘그들은 어디에’)에서 6년을 살다 그해 8월21일 요양병원에서 생을 멈췄다. 사인은 급성호흡부전이었다. 동자동엔 부고가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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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노란집에서 짐을 빼며 103호 김공호(가명·71)는 낙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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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학생 때 가난한 부모의 짐을 덜어주려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2015년 5월 인터뷰)다. 식당에서 일하고 노숙도 하다가 시력을 잃고 정신질환을 얻었다. 14년을 산 노란집에서 쫓겨나 아래 건물 1층의 깊고 습한 방으로 옮겼다. 그 방에서 10년을 꼬박 살았을 때(지난 7월14일) 복도를 끼고 대각선 방의 동생(61)이 그를 발견했다. 아침마다 교회에 밥 먹으러 가자며 깨웠던 동생이 방문을 열자 “형님이 반듯이 누운 자세로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구재영 목사가 달려왔을 땐 “이미 몸이 차갑게 식은 상태”(심장마비 추정)였다. 전날 저녁 방으로 찾아간 구재영에게 김공호는 “목사님 만나 행복했다”며 과거형으로 말했다. 산골장(8월26일 공영장례)에 뼛가루를 뿌리며 목사는 “천국에선 부디 아프지 마시길” 기도했다.
이준길은 2022년 전국 무연고 사망자 4842명(보건복지부)에 포함됐고, 권영진은 이듬해 5543명(2024년은 6366명) 중 1명이었다. 최중호가 추가되면서 2025년 상반기는 3436명이 됐고, 김공호가 속한 하반기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다. 2021년(3603명) 이후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와 닿지 않거나, 연고자는 있지만 시신 인수가 거부된 고인이 5년 새 두배로 늘었다. 죽음에 종착하는 ‘가난의 경로’가 해를 넘길수록 무성해지고 있었다.
노란집에서 쫓겨나 10년을 꼬박 거주해온 방에 박철관(가명)씨가 깨끗하게 세탁해서 다려둔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가 걸려 있다. 87살의 그는 지금도 그 옷을 입고 가끔 ‘염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문영 기자
동자동을 못 떠나는 이유
“지팡이 짚는 순간 죽는 거야.”
술·담배를 하지 않는 박철관은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는 지난 30년간 동자동에서 사당동(동작구) 무료급식소까지 걸어서 밥을 먹으러 다녔다. 한강 다리를 건너 왕복 6시간을 두발로 오간 세월이 그의 ‘건강 밑천’이었다. 악착같이 버텨온 길에서 그는 여전히 허리가 꼿꼿했다.
‘방 관리’로는 그가 동자동에서 1등이었다. 물 새고 천장 주저앉은 방을 직접 고쳐 광나게 쓸고 닦았다. 벽엔 깨끗하게 세탁해서 칼줄을 세운 검은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 장의사로 일했던 그는 지금도 한달에 한두 차례 염 아르바이트를 했다. 타인의 마지막을 정리할 땐 “옷차림에도 최대한 예를 갖춰야” 했다. 박철관은 자신의 마지막 자리도 늘 살폈다. “주민센터에서 생사 확인 전화를 할 때마다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권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방만 좋아지면 뭐 해. 거기선 혼자 죽으면 구더기가 슬도록 발견 안 돼. 그래도 여기선 사나흘 안 보이면 누가 문은 열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죽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눈에 띄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가 동자동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박철관이 발견해준 죽음이 많았다. 강제퇴거 딱지가 붙고 열흘 뒤 사망한 노란집 209호 나환수(가명·당시 74)를 그가 발견했고, 지금 살고 있는 건물의 건넛방 “술쟁이 친구”(지난해 사망 당시 67)도 그가 발견해 신고했다. 박철관의 “맞은편 방 영감”은 “올여름 술 먹고 골목 아래 계단에서 굴러서 죽었”다. 그 방을 건물주가 아닌 박철관이 직접 치우고 청소했다. “웬수”가 출소해서 나오면 그 방에 살게 할 생각이었다. 사망 8개월 뒤(지난 10월20일)에야 소식을 듣고 박철관이 방문을 열었다. 어둠 가득한 빈방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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