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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그 골라본다. 3개월쯤 받거니 는/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박진경 대령은 경남 남해 출신입니다. 학창 시절 늘 우등생이었고 어른스러워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고 동창들은 증언합니다. 특히 진주고보에 다닐 때부터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4년 일본 오사카외국어대 영어학과에 다니다 학도병으로 끌려가 예비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고위 하사관으로 있었습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귀국한 박진경은 군인이 돼서 국가 건설에 기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웬만한 경력이면 장교로 임관되던 시절이지만 1946년 1월 5연대 창설 때 사병으로 백경게임 입대했고, 백선엽 연대장의 추천으로 미군정이 장교를 양성하려고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특채 임관됐습니다.
박진경은 유능함과 정직함으로 창설 초기의 군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미군정 장관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장차 한국 육군을 이끌 인재는 백선엽과 박진경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영어에 능통한 박진경은 미군 오션파라다이스게임 정과 원활한 소통으로 군의 기틀을 닦는데 크게 기여했고, 1947년 9월 핵심 요직인 국방경비대 인사과장에 발탁됩니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국군의 명칭은 국방경비대). 그런데 어떻게 박진경은 4·3 사건이 일어난 제주에 부임하게 된 것일까요.
/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948년 남로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5·10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 4·3 사건을 일으킵니다. 남로당 지하 총책 박갑동은 저서 ‘박헌영’에서 “단독 총선 보이콧 지령에 따라 대대적인 무장 폭동 장소로 제주도를 택한 것은 지리적 특수성으로 해방 직후부터 우주전함야마토게임 공산당의 조직 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도민의 사상이 자못 기울어져 경찰은 사면초가의 입장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방 후 제주도에는 일제 징용자, 군속, 중국 공산당의 의용군과 팔로군 출신 등 5만여 명이 갑자기 유입된 상태였습니다. 일제가 미국과의 최후 결전 장소로 제주도를 택한 탓에 참호, 군사 시설,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도 많았습니다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
1948년 4월 3일 일요일 새벽 2시, 한라산 정상을 시작으로 89개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자 소총, 권총, 수류탄, 죽창, 곤봉, 농기구로 무장한 남로당 인민유격대가 제주도 14개 지서 중 12개 지서와 민가를 공격해 경찰관과 우익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1947년부터 군사 훈련을 받아온 무장 조직이었습니다. 4·3사건, 여수·순천사건 등에서 모두 경찰이 첫 번째 표적이었던 것은 당시 남한 치안 유지의 주력이 경찰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의 예비대 성격이었던 국방경비대보다 대체로 인력과 장비 수준이 높았던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무시했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이 친일 출신이라며 백안시했습니다. 남로당이 군에 많이 침투해 있었던 것도 군경 간 반목의 요인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제주도 모슬포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9연대는 남로당이 깊이 파고든 연대 중 하나였습니다. 남로당 군 총책인 육사 2기 오일균 소령이 2대대장이었고, 육사 3기 문상길 중위, 연대 정보관 이윤락 중위, 고승옥 하사 등이 9연대의 남로당 핵심이었습니다. 훗날 한국군 베트남전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소위는 4·3 사건 발발 직후인 4월 10일 육사를 졸업하자마자 9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소대원은 모두 42명, 84개 눈동자가 살기등등했다. 적의와 증오에 찬 눈초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 소대원들을 이끌고 어떻게 4·3 사건을 진압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유격대의 세력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미군정이 경찰 8개 중대 1700명을 제주도에 급파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인민유격대는 우익이나 선거관리위원 집안이라는 이유로 부녀자와 소녀들까지 참혹하게 학살했고, 방화, 윤간, 생매장이 자행됐습니다.(조병옥 경무부장 발표, 1948년 6월 9일 대동신문) 총선에서 투표하지 못하게 하려고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수원까지 남하하고 있으니 한 달만 참으면 제주도는 해방된다. 그러면 해방군이 경찰이 되고 토지도 나눠줘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 선전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상황이 심각해지자 4월 10일 제주 경찰 총수인 김영배 감찰청장이 9연대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치안 상황에 군이 개입할 수 없고, 상부에서 지시가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대대장 오일균은 “폭동 사태는 경찰과 주민 간 충돌이니 경비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4월 17일 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9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남로당원들의 내통으로 작전 계획은 미리 알려졌고, 어쩌다 마주치면 서로 공격하지 않고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인민유격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9연대가 맡겠다고 자처해 경찰이 아예 출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9연대장 김익렬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며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4월 28일 ‘평화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은 이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원들이 남긴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9연대장 김익렬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교묘히 이를 이용한다면 국경(국방경비대)의 산(山)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군책(김달삼)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금번 구국 항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 특히 인민과 국경(국방경비대)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 일치를 보아, 김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음.”
그러나 협상 직후인 4월 29일과 30일 인민유격대가 임산부까지 포함된 우익 주민들을 납치, 살해하고, 이에 분노한 우익 청년들이 5월 1일 좌익 청년들의 집에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합니다. 5월 3일에는 오라리 부근에서 귀순하던 주민들이 정체불명의 무장대원들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합니다. 미군정 조사 결과, 무장대원들은 경찰을 가장한 남로당원들로, 경찰과 미군, 국방경비대를 이간하기 위한 소행이었습니다. 평화 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김익렬은 5월 5일 대책 회의에서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과 육박전을 벌이다 해임됐습니다.
5월 6일 김익렬의 후임으로 9연대장에 부임한 사람이 바로 박진경입니다. 박진경은 해방 당시 일본군 제주도 부대에 근무해 지리에 능통했고 일본군이 축성해 놓은 진지와 지형을 숙달하고 있었습니다. 진압에 소극적이던 김익렬 대신 유능한 군인으로 알려진 박진경이 부임한 것은 인민유격대에 큰 악재였습니다. 박진경 부임 나흘 뒤인 5월 10일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이런 결정 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대의 힘을 다해 상호간(9연대와 인민유격대 간)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그리고 연대 내의 탈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남로당의 전국적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총선은 순조롭게 실시됩니다. 오직 제주도만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갑(43%)과 을(46.5%)의 투표율이 50%에 미달해 남제주군에서만 제헌 의원 1명이 당선됐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수원 11연대의 지원을 받아 실병력이 1개 대대뿐이었던 9연대를 3개 대대로 강화하고 참모부를 보강했습니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사건을 진압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먼저 입산자의 하산을 독려하는 선무 활동을 벌인 뒤, 내려오지 않자 5월 12일부터 27일까지 3126명을 체포하고, 저항하는 8명을 사살했습니다. 체포된 주민의 다수는 투표를 못 하도록 남로당이 강제 입산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좌파 세력은 박진경이 노인과 소년까지 3000명을 체포했다며 강경 진압의 주역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는 강제 입산된 주민들을 인민유격대와 분리시킨 조치였습니다. 체포된 주민 대부분은 미군과 군경의 합동 심문을 받은 뒤 석방됐습니다. 좌파는 박진경이 학살 주범이라고 주장하지만, 박진경 연대장 재임 시절 군과 교전하던 인민유격대 25명이 사살됐을 뿐,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는 전무했습니다. (1995년 제민일보 특별취재반 저 ‘4.3은 말한다’) 노무현정부가 발간한 ‘제주도4.3사건 진상보고서’에도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경찰 56명, 우익과 그 가족 235명이 살해되고 시위자(인민유격대) 28명이 사망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군 전사자도 없었고 제주 양민도 희생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박진경 연대장 부임 후 인민유격대가 수세에 몰리자 5월 20일 문상길 중위는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남로당원 41명을 탈영시킵니다. 박진경 연대장을 해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탈영병들은 M1 소총과 구형 99식 소총 등 총기 67정과 실탄 만 4천발을 탈취한 뒤 대정지서를 습격해 경찰관 5명을 사살했습니다. 대정면 중산간의 민가에서 밥을 먹다가 주민의 신고로 국방경비대에 포위되자 21명은 도주해 인민유격대에 합류했고, 20명은 체포돼 총살형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탈취해 간 총기와 탄약은 인민유격대가 장기전을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김달삼이 내린 다음 지령은 박진경 암살이었습니다. 문상길 중위는 정보계 선임 하사인 상사 양회천에게 이를 하달했고, 양회천은 하사 손선호, 중사 신상우, 중사 강자규, 하사 배경용에게 행동 지령을 내렸습니다. “6월 17일 저녁, 술을 많이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해 다시는 경비대가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신상우는 부대 정문에서 연대장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강자규는 배경용, 손선호에게 알리고, 배경용은 손전등으로 불을 밝혀주고, 손선호는 총을 쏘는데 머리에 딱 한 발로 끝내라. 그래야 시체가 험하지 않고 증오심이 적을 것이다. 실수로 잡히면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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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은 진압 작전 성공의 공로로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습니다. 6월 17일 도내 기관장과 연대 참모들을 제주읍 관덕정의 요정 옥성정에 초청해 진급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술을 잘 못하는 박진경도 그날은 많이 마시고 취해 6월 18일 새벽 1시쯤 제주농업학교에 주둔 중인 연대본부 연대장실로 돌아온 뒤 옷을 입은 채 잠들었습니다. 남로당원들은 연대장이 깊이 잠들 때까지 2시간을 기다렸다가 새벽 3시 15분 M1 소총 두 발로 박진경을 암살했습니다. 총탄은 심장과 두개골을 관통했습니다. 박진경 대령의 나이 28세, 9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여 만이었습니다.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시신을 알코올로 닦았는데 그가 바로 박진경에게 총을 쏜 하사 손선호였습니다.
6월 22일 오후 2시 서울의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사령부에서 박진경 대령의 장례식이 엄수됐습니다. 박진경을 무척 아꼈던 윌리엄 딘 미군정 장관은 직접 제주도에 가서 C-47 수송기에 유해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젊은 부인의 오열이 장내를 숙연하게 했습니다. 정부 수립 전이어서 장군으로의 추서도 이뤄지지 못했고, 1950년에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유해는 고향에 묻혔다가 21년이 지난 1969년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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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방첩대 CIC까지 투입돼 암살범을 찾기 위한 총력 수사가 펼쳐졌습니다. 제주도 내 M1 소총 전수·감정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도록 단서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연대 정보참모 김종평에게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전해졌습니다. “아프다며 모슬포의 처가에 누워 있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 최모 상사를 잡으면 사건 전모를 알 수 있다.” 문상길, 최모 상사, 문상길의 약혼녀이자 서귀포 남로당 총책의 딸인 고양숙 등이 연행됐습니다. 문상길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계속된 심문에 결국 전모를 자백했습니다. 가슴에 붙인 붉은 부적이 땀에 젖어 옷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조사관이 “연대장을 죽이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 부적을 붙인 것 아니냐?”고 추궁하자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석 달 뒤인 1948년 9월 23일 수색 기지에서 문상길과 손선호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호로 집행된 사형이었습니다. 19세인 하사 배경용과 20세인 중사 신상우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됐고, 상사 양회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곱상한 얼굴에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23세 문상길이 그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는 부대 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9연대 부대대장으로 문상길의 직속상관이었던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문상길이 범인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고, 며칠 후 체포된 문상길을 만났을 때 자신도 암살하려 했다는 고백을 듣고 더 놀랐다’고 회고록에서 밝혔습니다.
문상길은 약혼녀 고양숙까지 희생시키면서도 남로당 군 총책인 오일균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일균도 결국 1949년 국군 숙군 때 붙잡혀 사형당했습니다. 박진경 대령에게 총을 쏜 손선호는 경북 경주 출신으로 22세였습니다. 남로당의 첫 번째 폭력 투쟁인 1946년 대구 10월 사건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입대한 자였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이 희생된 뒤 군경의 진압 작전은 강화됐고 7, 8월에는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눈에 띄게 약화됐습니다. 김달삼은 꼼짝 못 하고 산에 숨어 있다가 8월 월북했습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지서 습격 45회 이상, 전선 절단 893개소, 도로 파괴 79개소, 570명 이상 살상’이라고 4·3사건 성과를 발표해 열광적 갈채를 받고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진정되는 듯했던 제주도 상황은 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9월부터 경찰, 국군, 우익 주민들에 대한 살해와 방화를 다시 자행하면서 재점화됐습니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됐고, 이에 배속된 여수14연대의 남로당 장병들이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과 좌익 세력이 전남 전역으로 진군하자 기세가 오른 이덕구는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제주도 곳곳에 조선인민공화국기가 게양됐습니다. 11월 2일 인민유격대는 국군 9연대 2대대 6중대를 공격해 중대장 등 21명이 사망했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계엄 선포 기간 동안 강경한 진압 작전이 전개됐습니다. 제주 남로당은 조직이 궤멸될 정도의 타격을 입었고, 4·3사건으로 희생된 양민들의 대다수도 이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박진경 대령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군인들의 증언은 거의 일치합니다. 모두가 ‘장차 참모총장을 했어야 할 분’이라며 인품과 실력을 극찬하던 군인이 박진경이었습니다. 양민 학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부당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해 남로당이 일으킨 4·3사건은 정당하다는 역사관을 가진 김달삼, 문상길, 손선호 같은 자들에게 박진경은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민유격대 진압에 미온적이었던 전임자와 대비되는 군인이고,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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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로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5·10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 4·3 사건을 일으킵니다. 남로당 지하 총책 박갑동은 저서 ‘박헌영’에서 “단독 총선 보이콧 지령에 따라 대대적인 무장 폭동 장소로 제주도를 택한 것은 지리적 특수성으로 해방 직후부터 우주전함야마토게임 공산당의 조직 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도민의 사상이 자못 기울어져 경찰은 사면초가의 입장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방 후 제주도에는 일제 징용자, 군속, 중국 공산당의 의용군과 팔로군 출신 등 5만여 명이 갑자기 유입된 상태였습니다. 일제가 미국과의 최후 결전 장소로 제주도를 택한 탓에 참호, 군사 시설,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도 많았습니다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
1948년 4월 3일 일요일 새벽 2시, 한라산 정상을 시작으로 89개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자 소총, 권총, 수류탄, 죽창, 곤봉, 농기구로 무장한 남로당 인민유격대가 제주도 14개 지서 중 12개 지서와 민가를 공격해 경찰관과 우익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1947년부터 군사 훈련을 받아온 무장 조직이었습니다. 4·3사건, 여수·순천사건 등에서 모두 경찰이 첫 번째 표적이었던 것은 당시 남한 치안 유지의 주력이 경찰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의 예비대 성격이었던 국방경비대보다 대체로 인력과 장비 수준이 높았던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무시했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이 친일 출신이라며 백안시했습니다. 남로당이 군에 많이 침투해 있었던 것도 군경 간 반목의 요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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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모슬포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9연대는 남로당이 깊이 파고든 연대 중 하나였습니다. 남로당 군 총책인 육사 2기 오일균 소령이 2대대장이었고, 육사 3기 문상길 중위, 연대 정보관 이윤락 중위, 고승옥 하사 등이 9연대의 남로당 핵심이었습니다. 훗날 한국군 베트남전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소위는 4·3 사건 발발 직후인 4월 10일 육사를 졸업하자마자 9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소대원은 모두 42명, 84개 눈동자가 살기등등했다. 적의와 증오에 찬 눈초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 소대원들을 이끌고 어떻게 4·3 사건을 진압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유격대의 세력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미군정이 경찰 8개 중대 1700명을 제주도에 급파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인민유격대는 우익이나 선거관리위원 집안이라는 이유로 부녀자와 소녀들까지 참혹하게 학살했고, 방화, 윤간, 생매장이 자행됐습니다.(조병옥 경무부장 발표, 1948년 6월 9일 대동신문) 총선에서 투표하지 못하게 하려고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수원까지 남하하고 있으니 한 달만 참으면 제주도는 해방된다. 그러면 해방군이 경찰이 되고 토지도 나눠줘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 선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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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심각해지자 4월 10일 제주 경찰 총수인 김영배 감찰청장이 9연대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치안 상황에 군이 개입할 수 없고, 상부에서 지시가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대대장 오일균은 “폭동 사태는 경찰과 주민 간 충돌이니 경비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4월 17일 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9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남로당원들의 내통으로 작전 계획은 미리 알려졌고, 어쩌다 마주치면 서로 공격하지 않고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인민유격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9연대가 맡겠다고 자처해 경찰이 아예 출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9연대장 김익렬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며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4월 28일 ‘평화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은 이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원들이 남긴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9연대장 김익렬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교묘히 이를 이용한다면 국경(국방경비대)의 산(山)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군책(김달삼)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금번 구국 항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 특히 인민과 국경(국방경비대)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 일치를 보아, 김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음.”
그러나 협상 직후인 4월 29일과 30일 인민유격대가 임산부까지 포함된 우익 주민들을 납치, 살해하고, 이에 분노한 우익 청년들이 5월 1일 좌익 청년들의 집에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합니다. 5월 3일에는 오라리 부근에서 귀순하던 주민들이 정체불명의 무장대원들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합니다. 미군정 조사 결과, 무장대원들은 경찰을 가장한 남로당원들로, 경찰과 미군, 국방경비대를 이간하기 위한 소행이었습니다. 평화 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김익렬은 5월 5일 대책 회의에서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과 육박전을 벌이다 해임됐습니다.
5월 6일 김익렬의 후임으로 9연대장에 부임한 사람이 바로 박진경입니다. 박진경은 해방 당시 일본군 제주도 부대에 근무해 지리에 능통했고 일본군이 축성해 놓은 진지와 지형을 숙달하고 있었습니다. 진압에 소극적이던 김익렬 대신 유능한 군인으로 알려진 박진경이 부임한 것은 인민유격대에 큰 악재였습니다. 박진경 부임 나흘 뒤인 5월 10일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이런 결정 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대의 힘을 다해 상호간(9연대와 인민유격대 간)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그리고 연대 내의 탈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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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의 전국적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총선은 순조롭게 실시됩니다. 오직 제주도만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갑(43%)과 을(46.5%)의 투표율이 50%에 미달해 남제주군에서만 제헌 의원 1명이 당선됐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수원 11연대의 지원을 받아 실병력이 1개 대대뿐이었던 9연대를 3개 대대로 강화하고 참모부를 보강했습니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사건을 진압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먼저 입산자의 하산을 독려하는 선무 활동을 벌인 뒤, 내려오지 않자 5월 12일부터 27일까지 3126명을 체포하고, 저항하는 8명을 사살했습니다. 체포된 주민의 다수는 투표를 못 하도록 남로당이 강제 입산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좌파 세력은 박진경이 노인과 소년까지 3000명을 체포했다며 강경 진압의 주역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는 강제 입산된 주민들을 인민유격대와 분리시킨 조치였습니다. 체포된 주민 대부분은 미군과 군경의 합동 심문을 받은 뒤 석방됐습니다. 좌파는 박진경이 학살 주범이라고 주장하지만, 박진경 연대장 재임 시절 군과 교전하던 인민유격대 25명이 사살됐을 뿐,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는 전무했습니다. (1995년 제민일보 특별취재반 저 ‘4.3은 말한다’) 노무현정부가 발간한 ‘제주도4.3사건 진상보고서’에도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경찰 56명, 우익과 그 가족 235명이 살해되고 시위자(인민유격대) 28명이 사망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군 전사자도 없었고 제주 양민도 희생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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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연대장 부임 후 인민유격대가 수세에 몰리자 5월 20일 문상길 중위는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남로당원 41명을 탈영시킵니다. 박진경 연대장을 해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탈영병들은 M1 소총과 구형 99식 소총 등 총기 67정과 실탄 만 4천발을 탈취한 뒤 대정지서를 습격해 경찰관 5명을 사살했습니다. 대정면 중산간의 민가에서 밥을 먹다가 주민의 신고로 국방경비대에 포위되자 21명은 도주해 인민유격대에 합류했고, 20명은 체포돼 총살형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탈취해 간 총기와 탄약은 인민유격대가 장기전을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김달삼이 내린 다음 지령은 박진경 암살이었습니다. 문상길 중위는 정보계 선임 하사인 상사 양회천에게 이를 하달했고, 양회천은 하사 손선호, 중사 신상우, 중사 강자규, 하사 배경용에게 행동 지령을 내렸습니다. “6월 17일 저녁, 술을 많이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해 다시는 경비대가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신상우는 부대 정문에서 연대장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강자규는 배경용, 손선호에게 알리고, 배경용은 손전등으로 불을 밝혀주고, 손선호는 총을 쏘는데 머리에 딱 한 발로 끝내라. 그래야 시체가 험하지 않고 증오심이 적을 것이다. 실수로 잡히면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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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은 진압 작전 성공의 공로로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습니다. 6월 17일 도내 기관장과 연대 참모들을 제주읍 관덕정의 요정 옥성정에 초청해 진급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술을 잘 못하는 박진경도 그날은 많이 마시고 취해 6월 18일 새벽 1시쯤 제주농업학교에 주둔 중인 연대본부 연대장실로 돌아온 뒤 옷을 입은 채 잠들었습니다. 남로당원들은 연대장이 깊이 잠들 때까지 2시간을 기다렸다가 새벽 3시 15분 M1 소총 두 발로 박진경을 암살했습니다. 총탄은 심장과 두개골을 관통했습니다. 박진경 대령의 나이 28세, 9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여 만이었습니다.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시신을 알코올로 닦았는데 그가 바로 박진경에게 총을 쏜 하사 손선호였습니다.
6월 22일 오후 2시 서울의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사령부에서 박진경 대령의 장례식이 엄수됐습니다. 박진경을 무척 아꼈던 윌리엄 딘 미군정 장관은 직접 제주도에 가서 C-47 수송기에 유해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젊은 부인의 오열이 장내를 숙연하게 했습니다. 정부 수립 전이어서 장군으로의 추서도 이뤄지지 못했고, 1950년에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유해는 고향에 묻혔다가 21년이 지난 1969년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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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방첩대 CIC까지 투입돼 암살범을 찾기 위한 총력 수사가 펼쳐졌습니다. 제주도 내 M1 소총 전수·감정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도록 단서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연대 정보참모 김종평에게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전해졌습니다. “아프다며 모슬포의 처가에 누워 있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 최모 상사를 잡으면 사건 전모를 알 수 있다.” 문상길, 최모 상사, 문상길의 약혼녀이자 서귀포 남로당 총책의 딸인 고양숙 등이 연행됐습니다. 문상길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계속된 심문에 결국 전모를 자백했습니다. 가슴에 붙인 붉은 부적이 땀에 젖어 옷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조사관이 “연대장을 죽이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 부적을 붙인 것 아니냐?”고 추궁하자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석 달 뒤인 1948년 9월 23일 수색 기지에서 문상길과 손선호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호로 집행된 사형이었습니다. 19세인 하사 배경용과 20세인 중사 신상우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됐고, 상사 양회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곱상한 얼굴에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23세 문상길이 그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는 부대 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9연대 부대대장으로 문상길의 직속상관이었던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문상길이 범인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고, 며칠 후 체포된 문상길을 만났을 때 자신도 암살하려 했다는 고백을 듣고 더 놀랐다’고 회고록에서 밝혔습니다.
문상길은 약혼녀 고양숙까지 희생시키면서도 남로당 군 총책인 오일균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일균도 결국 1949년 국군 숙군 때 붙잡혀 사형당했습니다. 박진경 대령에게 총을 쏜 손선호는 경북 경주 출신으로 22세였습니다. 남로당의 첫 번째 폭력 투쟁인 1946년 대구 10월 사건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입대한 자였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이 희생된 뒤 군경의 진압 작전은 강화됐고 7, 8월에는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눈에 띄게 약화됐습니다. 김달삼은 꼼짝 못 하고 산에 숨어 있다가 8월 월북했습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지서 습격 45회 이상, 전선 절단 893개소, 도로 파괴 79개소, 570명 이상 살상’이라고 4·3사건 성과를 발표해 열광적 갈채를 받고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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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되는 듯했던 제주도 상황은 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9월부터 경찰, 국군, 우익 주민들에 대한 살해와 방화를 다시 자행하면서 재점화됐습니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됐고, 이에 배속된 여수14연대의 남로당 장병들이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과 좌익 세력이 전남 전역으로 진군하자 기세가 오른 이덕구는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제주도 곳곳에 조선인민공화국기가 게양됐습니다. 11월 2일 인민유격대는 국군 9연대 2대대 6중대를 공격해 중대장 등 21명이 사망했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계엄 선포 기간 동안 강경한 진압 작전이 전개됐습니다. 제주 남로당은 조직이 궤멸될 정도의 타격을 입었고, 4·3사건으로 희생된 양민들의 대다수도 이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박진경 대령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군인들의 증언은 거의 일치합니다. 모두가 ‘장차 참모총장을 했어야 할 분’이라며 인품과 실력을 극찬하던 군인이 박진경이었습니다. 양민 학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부당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해 남로당이 일으킨 4·3사건은 정당하다는 역사관을 가진 김달삼, 문상길, 손선호 같은 자들에게 박진경은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민유격대 진압에 미온적이었던 전임자와 대비되는 군인이고,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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