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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나는 웬일인가? 생각이 내가 머리유자효 시인이 지난 16일 한국시인협회에서 20번째 펴낸 시집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있었지만 남에게 보이지 않게 다스리며 살았다”라며 “평화가 깃든 노년의 삶이 좋다”라고 했다. 박윤슬 기자
베이스 성악가처럼 울림 있는 음성에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를 만날 때마다 늘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살았다”라고 할 때 조금 놀랐다. 대부분의 문학인이 세상의 잡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픈 열망을 갖고 있지만, 그가 그런 줄은 몰랐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유자효(78) 시인. 사이다쿨접속방법 그는 방송 언론인으로 오래 활동하는 한편, 20대 때부터 자신의 생애와 시대를 시로 기록해왔다. 그가 20번째 시집 ‘AI와 詩’(황금알)를 펴냈다. 지난 16일 서울 운니동 시인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 이번 시집에 시와 시조가 함께 있더라. 둘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 시와 시조가 바다이야기꽁머니 함께 실려 있어 자연스럽게 같이 배웠고 써왔다. 시는 흔히 서양에서 온 자유시를 일컫고, 시조는 우리나라의 전통 정형시를 말한다. 형식 차이가 있지만, 시인의 영감을 바탕으로 쓴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내가 일간지에 6년째 시조를 소개하는데, 현대시조에 비해 고시조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더 좋다. 700년 된 장르의 작품들이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도 통 골드몽릴게임 한다는 걸 느낀다.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자유시보다 시조에 더 관심이 높더라. 프랑스시인협회에서 시인들에게 한국 시조를 자국어로 쓰게 했는데, 점점 확산하는 움직임이다.”
― 프랑스어로 시조를 어떻게 쓰나.
“시조 자수율을 불어로 맞춘다. 종장 첫 구는 꼭 석 자로 하는데, 상당히 잘 쓰더라.”
― 프랑 릴게임바다신2 스에도 정형시 전통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 우리가 기억하는 보들레르, 베를렌 작품들이 정형시이다. 프랑스에서 소네트가 성행했는데, 그게 영국의 셰익스피어에게서 만개한 것이다.”
― 시인협회장(2022∼2023) 시절에 프랑스에 한국 시를 소개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
“한국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바다이야기디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 시인협회를 맡았다. 현지 대학의 한국어과 입시 경쟁률이 일본어, 중국어보다 높다고 하더라. 대중문화 덕분인데 점점 한국어와 문학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국 시인들의 시를 프랑스에 소개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현대시 100선을 프랑스에서 출간했고, 이후 한국 시조 100선도 펴냈는데 반응이 좋았다.”
― 이번 시집의 표제작 앞부분은 인공지능(AI) 시대 창작자들의 두려움을 말하는데, 뒷부분에 반전이 있더라.
“AI의 긍정적 요인도 있다. 로봇과 결합해서 장애인에게 신천지를 열어주고, 정보를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전할 수 있는 것 등이다. 그런데 예술 분야에선 그 관계 정립을 엄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어느 문학단체 기관지의 작품 표절 사건에서 보듯 AI에게 시를 쓰게 하고 그걸 발표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영감으로 쓰는 것이다. 시가 언어보다 먼저 생겼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영감이 시를 창조했고, 시에 의해 언어가 탄생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료 축적으로 생성을 하는 AI에게 무슨 영감과 영혼이 있는가. 그런 시를 보고 인간이 진정으로 감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시 ‘나라를 위한 기도’ ‘무섭다’에는 남남갈등, 남북문제 등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걱정이 짙게 배어 있던데.
“다음 세대에게 미안한 것이 우리 세대에서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남북문제뿐 아니라 남남갈등이 심각하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낙관하고 있다. 크지 않은 나라에서 공통의 정서와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슬기로서 화해의 리더십을 일으켜야 한다. 광폭의 리더십을 지닌 정치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인이 못하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 갈등을 해소하려는 국민 열망을 모아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북한을 리드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화해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문인이자 언론인인 나는 글로써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 평소 목소리가 베이스 톤인데, 지금 테너로 올라갔다.
“(웃음) 그런가. 요즘 뉴스 보기가 싫다. 정치인들이 너무 증오하는 모습만 보인다. 국제 정세가 어려운 시점에서 나라 내부에서 이래서야 되겠나. 정치인들이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10대 강대국이 된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인의 역동성이다. 또 다행스럽게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택한 것이다. 나는 6·25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 우리 세대는 가방 하나 들고 세계를 누볐고, 전쟁에 몸을 던져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베트남전에서 많은 친구가 죽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조국이 선진국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내가 파리특파원으로 나갈 때 유럽은 신세계 같았다. 지금은 외국에 나갔다가 인천공항에 들어올 때 더 좋다는 걸 느낀다. 서울이 파리보다 깨끗하고 사람들도 훨씬 잘생겨 보인다.(웃음)”
― 인생의 겨울에 왔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익숙지 못해 허둥대는 이 겨울’(시 ‘마른 눈물’ 중)이라고 하지만, ‘겨울을 사랑한다’(‘겨울 행’ 중)라는 달관도 엿보이는데….
“새해에 우리 나이로 팔순이 되니 인생의 겨울에 살고 있는 게 맞다. 그러나 젊은 시절로 돌아가겠냐 하면 그러고 싶지 않다. 숱한 갈등과 번민을 겪고 가까스로 얻은 이 평화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겨울은 저물어 간다는 것도 있지만 완숙함도 있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청춘은 청춘대로 아름답고 겨울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 가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겠다.
“가을은 변화가 많다. 가을이 지나면 조용한 계절이 온다.(웃음)”
― 살면서 치욕스럽거나 후회되는 순간이 없었나.
“왜 없겠나.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을 기억으로 갖고 가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우리가 무한 생을 사는 것도 아닌데, 지나간 시간 중 내게 아픔을 주었던 사건이나 인물에 함몰돼서 자꾸 반추해서 뭐하겠나. 내게 고통을 줬던 것 이상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일들도 많았다. 살아온 세월도 감사했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은 누구인가. 친하게 지낸 문우는.
“가장 가깝게 모신 분이 미당 서정주 시인이다. 신춘문예에 입선을 시켜주고, 결혼식 주례까지 서 주셨다. 파리 특파원 할 때 선생님 부부가 오셔서 함께 여행한 적도 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가서 뵈었다. 그때 간호사를 돕느라 선생님을 두 팔로 안았는데 아기처럼 가벼워서 눈물이 났던 게 생각난다. 선생님은 과오도 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문인이다. 우리 모국어를 아름답게 빛내는 데 헌신한 것이 재조명받아야 한다. 친하게 지낸 문우는 고 김재홍 평론가를 꼽을 수 있겠다. 서울사대 문학회를 함께 했던 이문열 소설가도 생각난다.”
― 방송기자협회장을 할 정도로 오래 언론인 생활을 했는데.
“한국의 정치 격변기에 정치부 기자를 했다. 10·26, 12·12, 5·18과 같은 충격적 사건을 현장 가까이에서 접하며 참 정신없이 보냈다. 또한 40대 초 KBS 파리 특파원 때는 유럽 격변기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의해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동유럽을 취재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1988년 2월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단독 인터뷰했고, 그 방송이 KBS 전파를 타자 AFP통신이 서울발로 전 세계에 타전했다.)
― 바웬사 인터뷰는 지금도 기억에 남을 듯싶다.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항구 도시 그단스크의 집에 억류돼 있었는데, 일요일에 성당에서 인터뷰를 했다. 바웬사는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삶의 터전인 직장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노조가 순수성을 지키려면 정치에 간여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집권을 했고,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얼마 전 외신을 통해 그의 모습을 봤는데, 나를 친구라고 불렀던 그가 노인이 돼 있었다. 그가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고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지키는 수호자로 남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 앞으로도 시와 언론의 길을 함께 걷는가.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구상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시인이란 본질적으로 기자다’. 두 길이 다른 것 같지만, 압축된 언어로 세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 길이 내 속에서 화합을 이뤄 오늘까지 왔다. 앞으로도 언론인으로 시대를 볼 것이며, 시인으로 그 풍경들을 기록해갈 것이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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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집에 시와 시조가 함께 있더라. 둘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 시와 시조가 바다이야기꽁머니 함께 실려 있어 자연스럽게 같이 배웠고 써왔다. 시는 흔히 서양에서 온 자유시를 일컫고, 시조는 우리나라의 전통 정형시를 말한다. 형식 차이가 있지만, 시인의 영감을 바탕으로 쓴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내가 일간지에 6년째 시조를 소개하는데, 현대시조에 비해 고시조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더 좋다. 700년 된 장르의 작품들이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도 통 골드몽릴게임 한다는 걸 느낀다.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자유시보다 시조에 더 관심이 높더라. 프랑스시인협회에서 시인들에게 한국 시조를 자국어로 쓰게 했는데, 점점 확산하는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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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자수율을 불어로 맞춘다. 종장 첫 구는 꼭 석 자로 하는데, 상당히 잘 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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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협회장(2022∼2023) 시절에 프랑스에 한국 시를 소개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
“한국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바다이야기디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 시인협회를 맡았다. 현지 대학의 한국어과 입시 경쟁률이 일본어, 중국어보다 높다고 하더라. 대중문화 덕분인데 점점 한국어와 문학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국 시인들의 시를 프랑스에 소개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현대시 100선을 프랑스에서 출간했고, 이후 한국 시조 100선도 펴냈는데 반응이 좋았다.”
― 이번 시집의 표제작 앞부분은 인공지능(AI) 시대 창작자들의 두려움을 말하는데, 뒷부분에 반전이 있더라.
“AI의 긍정적 요인도 있다. 로봇과 결합해서 장애인에게 신천지를 열어주고, 정보를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전할 수 있는 것 등이다. 그런데 예술 분야에선 그 관계 정립을 엄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어느 문학단체 기관지의 작품 표절 사건에서 보듯 AI에게 시를 쓰게 하고 그걸 발표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영감으로 쓰는 것이다. 시가 언어보다 먼저 생겼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영감이 시를 창조했고, 시에 의해 언어가 탄생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료 축적으로 생성을 하는 AI에게 무슨 영감과 영혼이 있는가. 그런 시를 보고 인간이 진정으로 감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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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에게 미안한 것이 우리 세대에서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남북문제뿐 아니라 남남갈등이 심각하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낙관하고 있다. 크지 않은 나라에서 공통의 정서와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슬기로서 화해의 리더십을 일으켜야 한다. 광폭의 리더십을 지닌 정치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인이 못하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 갈등을 해소하려는 국민 열망을 모아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북한을 리드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화해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문인이자 언론인인 나는 글로써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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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겨울에 왔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익숙지 못해 허둥대는 이 겨울’(시 ‘마른 눈물’ 중)이라고 하지만, ‘겨울을 사랑한다’(‘겨울 행’ 중)라는 달관도 엿보이는데….
“새해에 우리 나이로 팔순이 되니 인생의 겨울에 살고 있는 게 맞다. 그러나 젊은 시절로 돌아가겠냐 하면 그러고 싶지 않다. 숱한 갈등과 번민을 겪고 가까스로 얻은 이 평화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겨울은 저물어 간다는 것도 있지만 완숙함도 있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청춘은 청춘대로 아름답고 겨울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 가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겠다.
“가을은 변화가 많다. 가을이 지나면 조용한 계절이 온다.(웃음)”
― 살면서 치욕스럽거나 후회되는 순간이 없었나.
“왜 없겠나.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을 기억으로 갖고 가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우리가 무한 생을 사는 것도 아닌데, 지나간 시간 중 내게 아픔을 주었던 사건이나 인물에 함몰돼서 자꾸 반추해서 뭐하겠나. 내게 고통을 줬던 것 이상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일들도 많았다. 살아온 세월도 감사했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은 누구인가. 친하게 지낸 문우는.
“가장 가깝게 모신 분이 미당 서정주 시인이다. 신춘문예에 입선을 시켜주고, 결혼식 주례까지 서 주셨다. 파리 특파원 할 때 선생님 부부가 오셔서 함께 여행한 적도 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가서 뵈었다. 그때 간호사를 돕느라 선생님을 두 팔로 안았는데 아기처럼 가벼워서 눈물이 났던 게 생각난다. 선생님은 과오도 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문인이다. 우리 모국어를 아름답게 빛내는 데 헌신한 것이 재조명받아야 한다. 친하게 지낸 문우는 고 김재홍 평론가를 꼽을 수 있겠다. 서울사대 문학회를 함께 했던 이문열 소설가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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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 격변기에 정치부 기자를 했다. 10·26, 12·12, 5·18과 같은 충격적 사건을 현장 가까이에서 접하며 참 정신없이 보냈다. 또한 40대 초 KBS 파리 특파원 때는 유럽 격변기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의해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동유럽을 취재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1988년 2월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단독 인터뷰했고, 그 방송이 KBS 전파를 타자 AFP통신이 서울발로 전 세계에 타전했다.)
― 바웬사 인터뷰는 지금도 기억에 남을 듯싶다.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항구 도시 그단스크의 집에 억류돼 있었는데, 일요일에 성당에서 인터뷰를 했다. 바웬사는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삶의 터전인 직장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노조가 순수성을 지키려면 정치에 간여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집권을 했고,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얼마 전 외신을 통해 그의 모습을 봤는데, 나를 친구라고 불렀던 그가 노인이 돼 있었다. 그가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고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지키는 수호자로 남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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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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