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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성기 배우. 씨네21
1996년 겨울 한 계절을 안성기 선배님과 함께 보냈다. 전라남도 장흥의 한 어촌 마을, 이장집에 지어진 오픈세트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축제’를 함께 촬영했다. 나는 서른을 갓 넘긴 신인 작가였고, 선배님은 이미 한국 최고의 스타 배우였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선망해 온 배우와 일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지만, 그래서 더 겁나고 어려웠다. 하지만 안선배님은 나에게도,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자신의 촬영 분량이 있든 없든 늘 현장에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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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성기 배우. 씨네21
장례를 다룬 영화라 기본 의상은 삼베로 지은 상복이었다. 그는 그 옷을 입은 채 촬영을 지켜보고, 스태프들과 어울렸으며, 아역 배우들과도 삼촌처럼 놀아주었다. 여럿이 함께 들어 옮겨야 하는 촬영용 이동 트랙을 나를 황금성오락실 때면, 상복 차림의 선배님도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트랙을 잡고 있었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함께했고, 시간이 나면 현장 앞 갯벌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앉아 계셨다.
촬영이 없는 어느 날은 조그만 어선을 빌려 함께 낚시를 나간 적도 있었다. 그날 바다는 거칠었고, 배는 좌우로 거의 45도 가까이 기울며 흔들렸다. 온라인릴게임 나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안선배님은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낚싯대만 잡고 있었다. 바다는 늘 그렇다면서 씩 웃던 그의 평온을,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격정이 평온하게 통제된 뒤에야 연기는 시작되는 것이었다.
수없이 다양한 역할을 했지만, 사석에서 기억하는 선배님의 얼굴은 언제나 양 입꼬리를 살짝 올린 미소 하나였다. 가까운 알라딘게임 선배들은 그를 ‘안스타’ 라고 불렀다. 스타라는 말을 직함처럼 불러도 될 만큼 확고한 스타였고, 동시에 그런 유머가 가능할 만큼 친근한 분이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81년 겨울, 오리지널골드몽 고등학생이던 나는 고향 도시의 극장에서 우연히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보았다. 드센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요동치고, 나무 아래에 앉은 유지인씨의 원피스도 요란하게 휘날렸다. 중국집 직원 덕배는 아름다운 여인과의 시간을 형벌처럼 어색하게 견디고 있었다. 인중을 바짝 올리고 말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배우였지만, 그 연기에는 당시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진정성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그의 얼굴은 계속 떠오르더니, 곧 볼 만한 한국 영화에는 모두 그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만다라’에도, ‘깊고 푸른 밤’에도, ‘기쁜 우리 젊은 날’에도, ‘남부군’과 ‘투캅스’에도. 그를 보며 한국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고, 영화를 꿈꾸기 시작했다.
수많은 감독들이 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고, 그 영화들이 곧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였다.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정지영, 박광수, 이명세, 곽지균, 장선우, 강우석, 이현승, 이준익 등.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시절의 감독들은 모두 그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한국 영화의 모든 창의력이 모이는 좁은 통로였고, 그것이 다시 관객과 만나는 넓은 접점이었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동시에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천직이자 의무처럼 받아들인 그의 인격과 태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순수하고 진지했으며, 소박하지만 말하지 못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위악적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고, 코믹했지만 언제나 품위가 있었다. 시대의 정서는 고스란히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감정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렇게 한국 영화의 관객들은 오랫동안 ‘안성기의 시대’를 살았다.
영화 ‘축제’.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그는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자신의 목소리로 주연 연기를 정착시킨 배우였다. 화려한 외모가 아니어도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면 배우이자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한 배우의 스타성과 연기력이 한 시대의 영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가 관객들에게 쌓아준 연기에 대한 신뢰 덕분에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같은 배우들이 다음 시대의 한국 영화를 이끌 수 있었다.
2015년, 나는 ‘화장’의 작가로 다시 안선배님을 만났다. ‘축제’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곡과 눈물 없이 연기했던 자식이었다. ‘화장’에서는 병으로 소멸해 가는 아내를 지키면서도, 불현듯 찾아오는 삶의 욕망 앞에서 번민하는 중년 남자였다. ‘축제’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 시간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60 대의 그의 얼굴은 40대 때와 거의 차이가 없이 여전히 섬세하고 사려 깊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며 배우란 혹시 영원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오늘은 그의 부음을 듣는다.
배우 안성기의 빈소가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사진공동취재단
영화는 영원하지만 배우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화도 영원하지 않다. 그가 떠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 셀룰로이드 필름의 어느 프레임 속에서 그가 아무리 환하게 웃고 있어도, 그가 존재했기에 빛났던 우리의 기억과 감정, 삶의 시간들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 배우도, 영화도 영원하지 않다. 어느 영화에 나왔던, 영국 시인 W.H. 오든의 방식대로 말하면, 그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노래였으며, 우리의 배우이며, 스타였고, 다정한 형이자, 동료였으며, 청춘이었고, 눈물이었고, 미소였고, 순수였고, 절규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영화 그 자체였다.
우리들의 안스타님, 부디 안녕히 가세요.
육상효 감독 (‘축제’, ‘화장’ 각색. ‘나의 특별한 형제’, ‘3일의 휴가’ 연출)
1996년 겨울 한 계절을 안성기 선배님과 함께 보냈다. 전라남도 장흥의 한 어촌 마을, 이장집에 지어진 오픈세트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축제’를 함께 촬영했다. 나는 서른을 갓 넘긴 신인 작가였고, 선배님은 이미 한국 최고의 스타 배우였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선망해 온 배우와 일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지만, 그래서 더 겁나고 어려웠다. 하지만 안선배님은 나에게도,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자신의 촬영 분량이 있든 없든 늘 현장에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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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성기 배우. 씨네21
장례를 다룬 영화라 기본 의상은 삼베로 지은 상복이었다. 그는 그 옷을 입은 채 촬영을 지켜보고, 스태프들과 어울렸으며, 아역 배우들과도 삼촌처럼 놀아주었다. 여럿이 함께 들어 옮겨야 하는 촬영용 이동 트랙을 나를 황금성오락실 때면, 상복 차림의 선배님도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트랙을 잡고 있었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함께했고, 시간이 나면 현장 앞 갯벌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앉아 계셨다.
촬영이 없는 어느 날은 조그만 어선을 빌려 함께 낚시를 나간 적도 있었다. 그날 바다는 거칠었고, 배는 좌우로 거의 45도 가까이 기울며 흔들렸다. 온라인릴게임 나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안선배님은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낚싯대만 잡고 있었다. 바다는 늘 그렇다면서 씩 웃던 그의 평온을,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격정이 평온하게 통제된 뒤에야 연기는 시작되는 것이었다.
수없이 다양한 역할을 했지만, 사석에서 기억하는 선배님의 얼굴은 언제나 양 입꼬리를 살짝 올린 미소 하나였다. 가까운 알라딘게임 선배들은 그를 ‘안스타’ 라고 불렀다. 스타라는 말을 직함처럼 불러도 될 만큼 확고한 스타였고, 동시에 그런 유머가 가능할 만큼 친근한 분이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81년 겨울, 오리지널골드몽 고등학생이던 나는 고향 도시의 극장에서 우연히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보았다. 드센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요동치고, 나무 아래에 앉은 유지인씨의 원피스도 요란하게 휘날렸다. 중국집 직원 덕배는 아름다운 여인과의 시간을 형벌처럼 어색하게 견디고 있었다. 인중을 바짝 올리고 말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배우였지만, 그 연기에는 당시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진정성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그의 얼굴은 계속 떠오르더니, 곧 볼 만한 한국 영화에는 모두 그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만다라’에도, ‘깊고 푸른 밤’에도, ‘기쁜 우리 젊은 날’에도, ‘남부군’과 ‘투캅스’에도. 그를 보며 한국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고, 영화를 꿈꾸기 시작했다.
수많은 감독들이 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고, 그 영화들이 곧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였다.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정지영, 박광수, 이명세, 곽지균, 장선우, 강우석, 이현승, 이준익 등.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시절의 감독들은 모두 그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한국 영화의 모든 창의력이 모이는 좁은 통로였고, 그것이 다시 관객과 만나는 넓은 접점이었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동시에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천직이자 의무처럼 받아들인 그의 인격과 태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순수하고 진지했으며, 소박하지만 말하지 못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위악적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고, 코믹했지만 언제나 품위가 있었다. 시대의 정서는 고스란히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감정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렇게 한국 영화의 관객들은 오랫동안 ‘안성기의 시대’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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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는 ‘화장’의 작가로 다시 안선배님을 만났다. ‘축제’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곡과 눈물 없이 연기했던 자식이었다. ‘화장’에서는 병으로 소멸해 가는 아내를 지키면서도, 불현듯 찾아오는 삶의 욕망 앞에서 번민하는 중년 남자였다. ‘축제’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 시간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60 대의 그의 얼굴은 40대 때와 거의 차이가 없이 여전히 섬세하고 사려 깊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며 배우란 혹시 영원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오늘은 그의 부음을 듣는다.
배우 안성기의 빈소가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사진공동취재단
영화는 영원하지만 배우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화도 영원하지 않다. 그가 떠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 셀룰로이드 필름의 어느 프레임 속에서 그가 아무리 환하게 웃고 있어도, 그가 존재했기에 빛났던 우리의 기억과 감정, 삶의 시간들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 배우도, 영화도 영원하지 않다. 어느 영화에 나왔던, 영국 시인 W.H. 오든의 방식대로 말하면, 그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노래였으며, 우리의 배우이며, 스타였고, 다정한 형이자, 동료였으며, 청춘이었고, 눈물이었고, 미소였고, 순수였고, 절규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영화 그 자체였다.
우리들의 안스타님, 부디 안녕히 가세요.
육상효 감독 (‘축제’, ‘화장’ 각색. ‘나의 특별한 형제’, ‘3일의 휴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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