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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박기형]
심사위원이 한 입을 삼키고는 오랜 시간 씹는다. 표정을 쉽게 짓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맛있다고 답할 텐데, 그런 반응조차 늦다. 대신 "무엇을 했는지"부터 확인한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 불을 어떻게 썼는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한 문장을 남긴다. "이건 이런 의도였죠?"
안성재라는 사람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흑백요리사>에서 우리는 요리, 그 요리를 만드는 과정, 거기에 동반되는 수많은 기술을 본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만나는 건 한 접시에 담긴 음식 뒤에 놓인 노고(勞苦)를 읽어 릴게임방법 주는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묻고 그에 관한 답을 듣는 과정에서 도전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반추한다. 하나의 음식이 나오기까지 들인 오랜 고민, 숱한 연습, 그 시간들이 한데 들어있다. 그 시간에 담긴 의미가 상대방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질 때, 도전자들은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기뻐한다.
바다이야기오락실 설명 불가능해진 노동의 세계
▲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 중 한 장면.
골드몽사이트
ⓒ 넷플릭스 코리아
"저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못 하겠어요."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같은 이 릴게임종류 름을 제목으로 한 책에서 '불쉿잡(Bullshit Job)'을 이렇게 정의한다.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다. 그가 고용되려면 그 직업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데도 말이다.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오늘날 노동의 변화에서 그레이버가 강조하는 지점은 말문이 막히는 상태다. 내가 온종일 한 일을, 나 자신에게도 이해시키기 어려운 상태 말이다.
불쉿잡은 특정 직업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 같은 장면들도 포함된다. 고객 문제를 해결한 사람보다, 해결 과정을 정연한 보고서 형식으로 잘 포장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학교나 연구에서도 무엇을 알아냈는가보다 어떤 기준 하에 얼마의 성과로 환산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때 노동은 '지표'를 만족시키는 행위로 바뀐다. 지표를 만들기 위해 일을 한다. 목표가 전도되고, 노동자의 만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는 건, 과정을 담아낼 언어가 죽었기 때문이다. 지표는 결과를 단순히 요약할 뿐이다. 노동의 의미는 대개 과정에 있다. 하나의 음식을 낼 때, 왜 이 재료를 골랐는지, 왜 저 순서를 택했는지, 어떤 실패를 겪으면서 이 레시피를 만들었는지 등. 이런 말들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평점, 생존한 라운드의 숫자 뿐이다.
또한, 노동과정을 수행하는 주체와 판단하는 주체가 분리되었다. 관리자와 작업자의 명확한 분리 때문에 노동현장의 구체적 생동감을 잃어버린다. 관리자는 추상화된 평가지표들만 본다. 작업자는 그 지표에 자기 노동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둘 모두 실제 노동 과정을 이야기로 만들 능력을 잃어버린다. 맥락을 설명하지 못하며, 그 맥락이 눈에 띈다 해도 읽어낼 시간이 부족하다. 노동에 이야기를 붙일 시간조차 줄여야 할 비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수치심을 느낀다. 아닌 척 애쓰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애써 그 모든 걸 가려야 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조너선 코브(Jonathan Cobb)는 <계급의 숨은 상처>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계급의 의식을 탐구하였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상처가 가난이라는 물질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본다.
더 중요한 것은 수치심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가 내건 기준에 부응할 때 비로소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는다. 능력자를 상징하는 일종의 '배지'들이 곳곳에서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자기 노동에서 존엄을 얻기 힘들다.
흑백요리사가 '읽는' 것
▲ 흑백요리사2
ⓒ 넷플릭스
이런 사회에서 탈락은 곧 굴욕이 된다. 대부분의 경쟁 프로그램은 이 굴욕을 팔아 시청률을 얻는다. 반대로 능력 있는 자의 성취를 화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흑백요리사>는 이걸 살짝 비튼다. 심사가 '무능의 배지'를 부여하는 평가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 탈락이 곧 실패이자 무능력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심사위원의 해석이 끼어든다. 패배를 수치심으로 만드는 통로를 잠시 막는다. 세네트는 <장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인 정신은 일을 잘하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구다."
이 문장은 그저 장인의 마음가짐을 묘사한 걸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어쩌면, 이 문장은 조건문이 아닐까? <흑백요리사>에서 우리는 '그 자체를 위해'가 성립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① 기준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 기준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좋은 작업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② 과정이 기록되고 피드백이 이뤄져야 한다. 피드백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명확히 남아야 한다. 이걸 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③ 그 이야기를 읽을 시간과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경청하고 독해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가능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이 전문성과 권위를 가진 외부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어선 안 된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심사 과정과 심사 의견 앞뒤로 심사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배치된다. 자기 요리, 그 요리를 만드는 과정, 자기 삶에 대해 요리사 스스로 설명한다. 두 시선이 교차한다. 심사평이 친절하지도 상세하지도 않다. 때론 혹독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참가 요리사들은 먼저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쉽고 화가 날 테지만, 대체로 수긍한다. 이게 권위에 대한 복종일까? 미슐랭3스타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하는 부분은 그와 같은 자세와 섬세한 '읽기'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불쉿잡'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불쉿잡'의 세계에서는 능력을 입증할 기회조차 사라진다. 일은 세분화되고 절차화된다. 누군가의 애씀은 보이지 않게 된다. 노동자는 자기 일을 통해 존엄을 얻기는커녕, 능력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오직 내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수치심을 알게 모르게 안고 살아갈 뿐이다.
왜 냉정한 평가에도 내 의도를 읽어주었다는 사실을, 곧 내 노력을 누군가가 알아주었다는 걸로 소중하게 받아들일까.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어서일까. <흑백요리사>에서 심사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이유는 승패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읽고 읽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쉿잡'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어떤 결핍과 공허함을 잠시나마 채워주기 때문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심사위원이 한 입을 삼키고는 오랜 시간 씹는다. 표정을 쉽게 짓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맛있다고 답할 텐데, 그런 반응조차 늦다. 대신 "무엇을 했는지"부터 확인한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 불을 어떻게 썼는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한 문장을 남긴다. "이건 이런 의도였죠?"
안성재라는 사람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흑백요리사>에서 우리는 요리, 그 요리를 만드는 과정, 거기에 동반되는 수많은 기술을 본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만나는 건 한 접시에 담긴 음식 뒤에 놓인 노고(勞苦)를 읽어 릴게임방법 주는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묻고 그에 관한 답을 듣는 과정에서 도전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반추한다. 하나의 음식이 나오기까지 들인 오랜 고민, 숱한 연습, 그 시간들이 한데 들어있다. 그 시간에 담긴 의미가 상대방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질 때, 도전자들은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기뻐한다.
바다이야기오락실 설명 불가능해진 노동의 세계
▲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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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코리아
"저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못 하겠어요."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같은 이 릴게임종류 름을 제목으로 한 책에서 '불쉿잡(Bullshit Job)'을 이렇게 정의한다.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다. 그가 고용되려면 그 직업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데도 말이다.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오늘날 노동의 변화에서 그레이버가 강조하는 지점은 말문이 막히는 상태다. 내가 온종일 한 일을, 나 자신에게도 이해시키기 어려운 상태 말이다.
불쉿잡은 특정 직업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 같은 장면들도 포함된다. 고객 문제를 해결한 사람보다, 해결 과정을 정연한 보고서 형식으로 잘 포장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학교나 연구에서도 무엇을 알아냈는가보다 어떤 기준 하에 얼마의 성과로 환산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때 노동은 '지표'를 만족시키는 행위로 바뀐다. 지표를 만들기 위해 일을 한다. 목표가 전도되고, 노동자의 만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는 건, 과정을 담아낼 언어가 죽었기 때문이다. 지표는 결과를 단순히 요약할 뿐이다. 노동의 의미는 대개 과정에 있다. 하나의 음식을 낼 때, 왜 이 재료를 골랐는지, 왜 저 순서를 택했는지, 어떤 실패를 겪으면서 이 레시피를 만들었는지 등. 이런 말들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평점, 생존한 라운드의 숫자 뿐이다.
또한, 노동과정을 수행하는 주체와 판단하는 주체가 분리되었다. 관리자와 작업자의 명확한 분리 때문에 노동현장의 구체적 생동감을 잃어버린다. 관리자는 추상화된 평가지표들만 본다. 작업자는 그 지표에 자기 노동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둘 모두 실제 노동 과정을 이야기로 만들 능력을 잃어버린다. 맥락을 설명하지 못하며, 그 맥락이 눈에 띈다 해도 읽어낼 시간이 부족하다. 노동에 이야기를 붙일 시간조차 줄여야 할 비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수치심을 느낀다. 아닌 척 애쓰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애써 그 모든 걸 가려야 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조너선 코브(Jonathan Cobb)는 <계급의 숨은 상처>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계급의 의식을 탐구하였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상처가 가난이라는 물질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본다.
더 중요한 것은 수치심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가 내건 기준에 부응할 때 비로소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는다. 능력자를 상징하는 일종의 '배지'들이 곳곳에서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자기 노동에서 존엄을 얻기 힘들다.
흑백요리사가 '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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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에서 탈락은 곧 굴욕이 된다. 대부분의 경쟁 프로그램은 이 굴욕을 팔아 시청률을 얻는다. 반대로 능력 있는 자의 성취를 화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흑백요리사>는 이걸 살짝 비튼다. 심사가 '무능의 배지'를 부여하는 평가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 탈락이 곧 실패이자 무능력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심사위원의 해석이 끼어든다. 패배를 수치심으로 만드는 통로를 잠시 막는다. 세네트는 <장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인 정신은 일을 잘하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구다."
이 문장은 그저 장인의 마음가짐을 묘사한 걸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어쩌면, 이 문장은 조건문이 아닐까? <흑백요리사>에서 우리는 '그 자체를 위해'가 성립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① 기준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 기준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좋은 작업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② 과정이 기록되고 피드백이 이뤄져야 한다. 피드백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명확히 남아야 한다. 이걸 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③ 그 이야기를 읽을 시간과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경청하고 독해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가능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이 전문성과 권위를 가진 외부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어선 안 된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심사 과정과 심사 의견 앞뒤로 심사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배치된다. 자기 요리, 그 요리를 만드는 과정, 자기 삶에 대해 요리사 스스로 설명한다. 두 시선이 교차한다. 심사평이 친절하지도 상세하지도 않다. 때론 혹독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참가 요리사들은 먼저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쉽고 화가 날 테지만, 대체로 수긍한다. 이게 권위에 대한 복종일까? 미슐랭3스타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하는 부분은 그와 같은 자세와 섬세한 '읽기'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불쉿잡'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불쉿잡'의 세계에서는 능력을 입증할 기회조차 사라진다. 일은 세분화되고 절차화된다. 누군가의 애씀은 보이지 않게 된다. 노동자는 자기 일을 통해 존엄을 얻기는커녕, 능력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오직 내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수치심을 알게 모르게 안고 살아갈 뿐이다.
왜 냉정한 평가에도 내 의도를 읽어주었다는 사실을, 곧 내 노력을 누군가가 알아주었다는 걸로 소중하게 받아들일까.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어서일까. <흑백요리사>에서 심사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이유는 승패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읽고 읽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쉿잡'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어떤 결핍과 공허함을 잠시나마 채워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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