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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 국가의 국시(國是)를 명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본디 오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서 언제나 하나요, 둘이 아니다. 이 하나인 우리 민족은 무엇이고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귀천 계급의 독해(毒害)가 민족을 찢었고, 빈부 등차(等差)의 폐해가 민족을 갈랐다. 지역적 관념이 생기게 된지라 민족이 그 하나를 잃게 되고, 남녀 구별이 있었던지라 민족이 그 하나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승만, ‘일민주의 개술(槪述)’)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대한민국의 국시 황금성릴게임사이트 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일민주의는 영명하신 우리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그의 혁명 투쟁을 통해 체험하신 민족 부활과 조국 광복을 찾기 위한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체계화한 민주 원론”이라 칭송했다. 이승만이 대략 얼개를 제시한 일민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독일 예나대학 철학박사인 안호상은 “우리 바다신2다운로드 민족의 지도 원리인 일민주의로 국론을 통일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일민주의를 국시는커녕 극우 반공주의자들의 정치적 이념일 뿐이라고 폄훼했다.
이승만은 특정 정당의 당수가 되기보다는 그보다는 한 단계 위인 ‘국부(國父)’이자, ‘민족의 영도자’가 되기를 바랐다. 5·10 총선 직후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되었을 때도 이승만은 “정당 수립 운동을 멈추고 대동단결해 국권 회복과 정부 수립을 위해 힘쓰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의 인준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자, 국회의 협조 없이는 어떤 정책도 추진할 수 없는 정치 현실을 인정하고 여당을 조직하는 데 돌입했다.
일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8년 우주전함야마토게임 10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발기 총회 때 이를 당시(黨是·당의 기본 방침)로 삼으면서부터였다. 이듬해 2월, 이승만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주류가 한민당과 합당해 민주국민당(민국당)이 출범했을 때도 당시(黨是)는 일민주의였다. 안호상 장관 주도로 일민주의는 문교부의 공식 교육 이념으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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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주의보급회에서 전국적으로 배포한 일민주의 홍보 포스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민주의의 주저(主著)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개술’(1949)과 양주동의 ‘일민주의의 본바탕’(1950)이었다. 여기에서 소개된 일민주의의 ‘4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부요(富饒)하게 해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2. 정치상으로는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 계급의 대우를 받게 할 것. 3. 지역의 도별(道別)을 타파하여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 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 것. 4. 남녀동등의 주의를 실천해서 우리의 화복 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똑같이 분담하게 할 것.”
인민의 경제적 안정, 민중의 정치적 지위 향상, 지역 차별 타파, 여성 권익 신장 등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목표였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정치 이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뻔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국가 중 상식적인 듯 보이는 ‘4대 강령’을 선진국 수준으로 달성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일민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이었다. 민주주의는 사상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공산주의까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민주주의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사상이 필요했다. 안호상은 “우리에게 큰 적이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사상과 주의가 없는 것이 두렵다”며 일민주의를 제안한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 통합을 강조한 일민주의는 한편으로는 파시즘으로 흐를 우려도 있었다.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해야 한다”(‘일민주의 개술’)고 역설했다. 공산주의자를 ‘제거’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었지만,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까지 ‘제거’하려 한 것은 역사적 오점이었다.
일민주의는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까지 비판했다. 안호상은 “공산주의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공산주의적 제국주의가 더 나쁘지만, 양자 모두 항상 야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까닭에 다른 민족과 나라를 지배하며 망치기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두 부류의 제국주의를 싸잡아 비판한 뒤, 그 대안이 일민주의라고 역설했다.
일민주의에서 표방한 대로 이승만은 특권계급이 아니라 기층 민중,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라를 구현하려 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지주와 특권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민국당)과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대통령 직선제와 간선제, 농지개혁, 국무총리 인준 등 주요 정치 현안마다 이승만 행정부는 한민당(민국당) 혹은 소장파 국회의원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와 대립할 때마다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정치세력은 일민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 반관반민(半官半民) ‘국민 운동 단체들’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총재였다. 국민회는 18세 이상 남녀가 모두 가입하게 돼 있었으므로 이 직책만으로도 이승만은 성인 국민 전체의 ‘대표’였다. 또한 이승만은 대한청년단과 학도호국단 총재였으므로 청년 학생의 ‘대표’였고,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후신인 대한노총 총재였으므로 노동자의 ‘대표’, 대한농총·대한어민회 총재였으므로 농어민의 ‘대표’이기도 했다. 대한부인회 총재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맡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반관반민 단체를 통해 2중, 3중으로 국민을 ‘대표’했다.
1951년 자유당은 이승만이 총재를 맡고 일민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대한노총, 대한농총 등을 기간 단체로 조직됐다. 외형상 국민 전체를 중첩해서 아우르는 ‘국민 전체의 당’이었던 셈이다. 일민주의는 1960년 4·19 혁명과 제1공화국의 붕괴로 역사적 소임을 다했지만, 1960년대까지 국민회의 지도 이념으로 남아 있었다. 안호상은 아흔 살이 넘은 1990년대까지 단군 신앙을 중심으로 한 일민주의 연구를 이어갔다.
<참고 문헌>
김수자, ‘이승만의 일민주의 제창의 논리’,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 국가의 국시(國是)를 명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본디 오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서 언제나 하나요, 둘이 아니다. 이 하나인 우리 민족은 무엇이고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귀천 계급의 독해(毒害)가 민족을 찢었고, 빈부 등차(等差)의 폐해가 민족을 갈랐다. 지역적 관념이 생기게 된지라 민족이 그 하나를 잃게 되고, 남녀 구별이 있었던지라 민족이 그 하나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승만, ‘일민주의 개술(槪述)’)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대한민국의 국시 황금성릴게임사이트 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일민주의는 영명하신 우리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그의 혁명 투쟁을 통해 체험하신 민족 부활과 조국 광복을 찾기 위한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체계화한 민주 원론”이라 칭송했다. 이승만이 대략 얼개를 제시한 일민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독일 예나대학 철학박사인 안호상은 “우리 바다신2다운로드 민족의 지도 원리인 일민주의로 국론을 통일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일민주의를 국시는커녕 극우 반공주의자들의 정치적 이념일 뿐이라고 폄훼했다.
이승만은 특정 정당의 당수가 되기보다는 그보다는 한 단계 위인 ‘국부(國父)’이자, ‘민족의 영도자’가 되기를 바랐다. 5·10 총선 직후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되었을 때도 이승만은 “정당 수립 운동을 멈추고 대동단결해 국권 회복과 정부 수립을 위해 힘쓰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의 인준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자, 국회의 협조 없이는 어떤 정책도 추진할 수 없는 정치 현실을 인정하고 여당을 조직하는 데 돌입했다.
일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8년 우주전함야마토게임 10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발기 총회 때 이를 당시(黨是·당의 기본 방침)로 삼으면서부터였다. 이듬해 2월, 이승만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주류가 한민당과 합당해 민주국민당(민국당)이 출범했을 때도 당시(黨是)는 일민주의였다. 안호상 장관 주도로 일민주의는 문교부의 공식 교육 이념으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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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주의보급회에서 전국적으로 배포한 일민주의 홍보 포스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민주의의 주저(主著)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개술’(1949)과 양주동의 ‘일민주의의 본바탕’(1950)이었다. 여기에서 소개된 일민주의의 ‘4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부요(富饒)하게 해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2. 정치상으로는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 계급의 대우를 받게 할 것. 3. 지역의 도별(道別)을 타파하여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 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 것. 4. 남녀동등의 주의를 실천해서 우리의 화복 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똑같이 분담하게 할 것.”
인민의 경제적 안정, 민중의 정치적 지위 향상, 지역 차별 타파, 여성 권익 신장 등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목표였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정치 이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뻔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국가 중 상식적인 듯 보이는 ‘4대 강령’을 선진국 수준으로 달성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일민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이었다. 민주주의는 사상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공산주의까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민주주의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사상이 필요했다. 안호상은 “우리에게 큰 적이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사상과 주의가 없는 것이 두렵다”며 일민주의를 제안한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 통합을 강조한 일민주의는 한편으로는 파시즘으로 흐를 우려도 있었다.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해야 한다”(‘일민주의 개술’)고 역설했다. 공산주의자를 ‘제거’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었지만,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까지 ‘제거’하려 한 것은 역사적 오점이었다.
일민주의는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까지 비판했다. 안호상은 “공산주의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공산주의적 제국주의가 더 나쁘지만, 양자 모두 항상 야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까닭에 다른 민족과 나라를 지배하며 망치기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두 부류의 제국주의를 싸잡아 비판한 뒤, 그 대안이 일민주의라고 역설했다.
일민주의에서 표방한 대로 이승만은 특권계급이 아니라 기층 민중,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라를 구현하려 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지주와 특권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민국당)과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대통령 직선제와 간선제, 농지개혁, 국무총리 인준 등 주요 정치 현안마다 이승만 행정부는 한민당(민국당) 혹은 소장파 국회의원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와 대립할 때마다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정치세력은 일민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 반관반민(半官半民) ‘국민 운동 단체들’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총재였다. 국민회는 18세 이상 남녀가 모두 가입하게 돼 있었으므로 이 직책만으로도 이승만은 성인 국민 전체의 ‘대표’였다. 또한 이승만은 대한청년단과 학도호국단 총재였으므로 청년 학생의 ‘대표’였고,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후신인 대한노총 총재였으므로 노동자의 ‘대표’, 대한농총·대한어민회 총재였으므로 농어민의 ‘대표’이기도 했다. 대한부인회 총재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맡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반관반민 단체를 통해 2중, 3중으로 국민을 ‘대표’했다.
1951년 자유당은 이승만이 총재를 맡고 일민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대한노총, 대한농총 등을 기간 단체로 조직됐다. 외형상 국민 전체를 중첩해서 아우르는 ‘국민 전체의 당’이었던 셈이다. 일민주의는 1960년 4·19 혁명과 제1공화국의 붕괴로 역사적 소임을 다했지만, 1960년대까지 국민회의 지도 이념으로 남아 있었다. 안호상은 아흔 살이 넘은 1990년대까지 단군 신앙을 중심으로 한 일민주의 연구를 이어갔다.
<참고 문헌>
김수자, ‘이승만의 일민주의 제창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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