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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도우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2-14 15:40조회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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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3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강당에서 열린 궐기대회 때 단상에서 발언하는 원풍모방노조 방용석 지부장. 장남수 제공
지난해 출간한 김명인 선생의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를 읽으며 특히 오래 머문 대목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나는 노동 현장에서, 공간과 경험은 다르지만, 동년배로서의 시대적 공감이 컸는데, 특히 1980년 봄의 그 유명한 ‘대학생 서울역 회군’ 대목은 같고도 달랐던 날의 회상을 불러왔다.
서울의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해 행진하던 뽀빠이릴게임 1980년 그 시간, 노동자들은 여의도의 노총회관에 집결해 있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졌으니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꽃피울 ‘서울의 봄’을 기대하며 세상이 부풀어 있던 때다. 감방문이 열리는가 하면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두고 여론이 분분했다. 입만 뻥긋해도 감옥행이던 ‘유신헌법 철폐’를 서로 질세라 외쳤고, 민주화 부 한국릴게임 르짖다 감옥 못 다녀온 사람은 주눅 들 정도로 정세는 급변했다. 정당은 헌법 개정 공청회를 하고, 사북 동국제강 등에서는 쟁의가 터지고, 신규노조 결성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꽃은 만개하고 초목은 기세를 더해 푸르렀다.
그동안 ‘어용’으로 지탄받던 한국노총이 앗 뜨거라 했는지 느닷없이 노동기본권쟁취 궐기대회를 한다고 했다. 당시 민주노조 릴게임5만 활동가들은 이 장을 제대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궐기대회가 개최된 80년 5월13일, 평일 낮이었지만 노동자들은 대회장을 꽉 채웠다. 당시 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복직투쟁 중이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도 일부 강당으로 합류했다. 와이에이치(YH),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등 익숙했던 얼굴뿐 아니라 처음 보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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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3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강당에서 열린 궐기대회 때 농성 중인 노동자들. 장남수 제공
주최 측은 적지 아니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대회 순서 안내와 궐기사가 쓰인 유인물을 흔들며 누군가 큰 소리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이걸 노동자 보라고 만든 거야?” 한자가 너무 많아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맞장구치는 대거리가 몇 마디 이어졌으나 곧 입을 닫고 자리를 잡았다. 빼곡한 열기와 단상을 뚫을 듯한 눈빛에 긴장한 듯 보이는 노총 위원장의 궐기사를 시작으로 몇몇 순서가 감흥 없이 지나가고 대회가 종료되려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마에 띠를 두른 원풍모방노조 방용석 지부장이 무대로 뛰어 올라가 마이크를 거머쥐었다. 체구가 황소만 한 노총 임원이 방 지부장을 밀어내려 했으나 우리가 말벌 떼같이 와와 소리 질렀다. “막지 마, 막지 마!” 기세에 눌렸는지 남자가 물러섰다.
“존경하는 조합원 여러분”을 시작으로 방 지부장은 ‘오늘 이 행사를 형식적으로 끝내지 말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때까지 투쟁하자’는 요지로, 노총이 주장한 궐기사를 조목조목 근거로 들었다. “훌륭한 말씀이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지금껏 이 문제로 싸움 한 번 못 한 게 사실 아니냐, 그러니 지금부터 제대로 하자”고 주장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옳소” 외쳤다.
노총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 “그렇지 않아도 오늘 대회 마친 후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서명 운동할 예정이다. 질문한 동일방직 해고자 문제 해결이나 동국제강 사북사태로 구속된 동지들 구제 운동도 하겠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답하는데 장황했다. 보다 못한 방 지부장이 다시 단상에 올라갔다.
“지금 위원장의 답은 답이 아닙니다. 서명운동이나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 노동자 결의대회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면 됩니다. 대회 아닙니까? 대회!”
“와!” 우리는 손뼉 치며 강력한 동의를 보냈고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노총 간부들은 굳어졌다. 그이들은 울지도 웃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앉아 있었고, 점잖았던 대회장은 그대로 투쟁을 촉구하는 농성장으로 이어졌다. 며칠째 이어진 농성에 3교대 근무 형태인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교대로 참석했으나 당시 노조 대의원이었던 나는 아예 휴가를 낸 후 자리 잡고 앉아버렸다. 나 같은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원풍 탈춤반 친구들이 그랬다. 노동절 탈춤 공연 때 ‘말단이’ 역을 맡은 후 말단이로 불린 우스개 잘하는 친구가 단상에서 오락을 진행했고 우리는 힘차게 노래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 만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야야야야 야야야야/ 강당이 터져나가도록 목소리를 합쳤다. “노총 위원장도 노래 한번 하시오.” 어느 남자 노동자가 소리쳤다. 말단이가 노총 위원장을 무대에 모셨다. 위원장은 아는 노래가 없다며 뒤로 뺐다. “노총가는 알 거 아니오, 노총가 부르시오.” “아니 노총 위원장님이 노총가도 모르신다네요. 이게 말이 돼요?” 길어지니 누군가 소리쳤다. “산토끼나 부르라 하세요.” “예 그럼, 산토끼 한번 부르세요.”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위원장은 산토끼를 불렀다. 그날 이후 우리에게 그는 ‘산토끼 위원장’이 되었다.
어느새 노총 간부들은 화장실 가는 듯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으나 그들의 양복은 어차피 농성장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노조 활동가들로 재편된 농성장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많고 재담꾼도 넘쳤다. 와이에이치 최순영 위원장, 동일방직 이총각 위원장 등도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단상에 올라갔고 이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며 열기는 고조되었다. 원풍 탈춤반은 즉석에서 노동기본권을 반드시 쟁취하자는 대본을 구성해 심야공연을 했다. 밤은 깊은데 눈동자는 빛나고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다음 날로 기억한다. 대학가의 데모가 격렬해지고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건물 밖에서 함성이 들려 창밖을 보니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우리를 향해 팔을 휘젓고 있었다. ‘4월 혁명 완수’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우리는 창가에 달라붙어 있는 대로 손을 내밀어 흔들며 “힘내!” “승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이상하게 농성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든 언론이 학생들의 집회에 쏠려 노총회관에서 철야 농성 중인 우리는 동그마니 외딴섬에 고립되는 느낌이었다. 휴가를 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출근하면서 빈자리도 늘어났다.
16일 오후, 농성을 이끄는 지도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장소에서 한참을 회의하던 각 조직의 대표들이 굳은 얼굴로 돌아오더니 방 지부장이 단상에 올랐다. 밖의 분위기와 여러 상황을 설명한 후 해산을 결정했다며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해 다시 모이자 했다. 일부 노동자들이 계속 투쟁하자며 항의했다. 설전이 오간 끝에 결국 전체 가부를 물었고 다수가 해산에 동의하며 나흘 만에 투쟁은 막을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원풍모방 3백여 명 조합원들은 방 지부장을 선두로 그냥 걸었다. 공장까지는 6㎞쯤, 줄을 지어 걷는데 누군가 낮게 노래를 시작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 비를 맞으며 여의도를 벗어나 대방동 지하도를 지날 때 굴속에서 노래하는 우리 목소리가 벽에 막혀 웅웅 돌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노동운동은 참 외로운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쳤다.
해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껏 타오른 우리의 결의를 꺾은 건 비겁하고 우유부단한 노총 간부들이 아니라 전두환과 수하들이 저지른 광란의 칼바람이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가 운동권을 포함한 민주인사들이 한밤중에 대거 연행되었다. 시국은 얼어붙었고, 다음 날 광주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 봄, 우리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장남수
지난해 출간한 김명인 선생의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를 읽으며 특히 오래 머문 대목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나는 노동 현장에서, 공간과 경험은 다르지만, 동년배로서의 시대적 공감이 컸는데, 특히 1980년 봄의 그 유명한 ‘대학생 서울역 회군’ 대목은 같고도 달랐던 날의 회상을 불러왔다.
서울의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해 행진하던 뽀빠이릴게임 1980년 그 시간, 노동자들은 여의도의 노총회관에 집결해 있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졌으니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꽃피울 ‘서울의 봄’을 기대하며 세상이 부풀어 있던 때다. 감방문이 열리는가 하면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두고 여론이 분분했다. 입만 뻥긋해도 감옥행이던 ‘유신헌법 철폐’를 서로 질세라 외쳤고, 민주화 부 한국릴게임 르짖다 감옥 못 다녀온 사람은 주눅 들 정도로 정세는 급변했다. 정당은 헌법 개정 공청회를 하고, 사북 동국제강 등에서는 쟁의가 터지고, 신규노조 결성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꽃은 만개하고 초목은 기세를 더해 푸르렀다.
그동안 ‘어용’으로 지탄받던 한국노총이 앗 뜨거라 했는지 느닷없이 노동기본권쟁취 궐기대회를 한다고 했다. 당시 민주노조 릴게임5만 활동가들은 이 장을 제대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궐기대회가 개최된 80년 5월13일, 평일 낮이었지만 노동자들은 대회장을 꽉 채웠다. 당시 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복직투쟁 중이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도 일부 강당으로 합류했다. 와이에이치(YH),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등 익숙했던 얼굴뿐 아니라 처음 보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바다이야기5만
1980년 5월13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강당에서 열린 궐기대회 때 농성 중인 노동자들. 장남수 제공
주최 측은 적지 아니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대회 순서 안내와 궐기사가 쓰인 유인물을 흔들며 누군가 큰 소리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이걸 노동자 보라고 만든 거야?” 한자가 너무 많아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맞장구치는 대거리가 몇 마디 이어졌으나 곧 입을 닫고 자리를 잡았다. 빼곡한 열기와 단상을 뚫을 듯한 눈빛에 긴장한 듯 보이는 노총 위원장의 궐기사를 시작으로 몇몇 순서가 감흥 없이 지나가고 대회가 종료되려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마에 띠를 두른 원풍모방노조 방용석 지부장이 무대로 뛰어 올라가 마이크를 거머쥐었다. 체구가 황소만 한 노총 임원이 방 지부장을 밀어내려 했으나 우리가 말벌 떼같이 와와 소리 질렀다. “막지 마, 막지 마!” 기세에 눌렸는지 남자가 물러섰다.
“존경하는 조합원 여러분”을 시작으로 방 지부장은 ‘오늘 이 행사를 형식적으로 끝내지 말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때까지 투쟁하자’는 요지로, 노총이 주장한 궐기사를 조목조목 근거로 들었다. “훌륭한 말씀이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지금껏 이 문제로 싸움 한 번 못 한 게 사실 아니냐, 그러니 지금부터 제대로 하자”고 주장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옳소” 외쳤다.
노총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 “그렇지 않아도 오늘 대회 마친 후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서명 운동할 예정이다. 질문한 동일방직 해고자 문제 해결이나 동국제강 사북사태로 구속된 동지들 구제 운동도 하겠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답하는데 장황했다. 보다 못한 방 지부장이 다시 단상에 올라갔다.
“지금 위원장의 답은 답이 아닙니다. 서명운동이나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 노동자 결의대회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면 됩니다. 대회 아닙니까? 대회!”
“와!” 우리는 손뼉 치며 강력한 동의를 보냈고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노총 간부들은 굳어졌다. 그이들은 울지도 웃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앉아 있었고, 점잖았던 대회장은 그대로 투쟁을 촉구하는 농성장으로 이어졌다. 며칠째 이어진 농성에 3교대 근무 형태인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교대로 참석했으나 당시 노조 대의원이었던 나는 아예 휴가를 낸 후 자리 잡고 앉아버렸다. 나 같은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원풍 탈춤반 친구들이 그랬다. 노동절 탈춤 공연 때 ‘말단이’ 역을 맡은 후 말단이로 불린 우스개 잘하는 친구가 단상에서 오락을 진행했고 우리는 힘차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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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노총 간부들은 화장실 가는 듯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으나 그들의 양복은 어차피 농성장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노조 활동가들로 재편된 농성장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많고 재담꾼도 넘쳤다. 와이에이치 최순영 위원장, 동일방직 이총각 위원장 등도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단상에 올라갔고 이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며 열기는 고조되었다. 원풍 탈춤반은 즉석에서 노동기본권을 반드시 쟁취하자는 대본을 구성해 심야공연을 했다. 밤은 깊은데 눈동자는 빛나고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다음 날로 기억한다. 대학가의 데모가 격렬해지고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건물 밖에서 함성이 들려 창밖을 보니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우리를 향해 팔을 휘젓고 있었다. ‘4월 혁명 완수’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우리는 창가에 달라붙어 있는 대로 손을 내밀어 흔들며 “힘내!” “승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이상하게 농성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든 언론이 학생들의 집회에 쏠려 노총회관에서 철야 농성 중인 우리는 동그마니 외딴섬에 고립되는 느낌이었다. 휴가를 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출근하면서 빈자리도 늘어났다.
16일 오후, 농성을 이끄는 지도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장소에서 한참을 회의하던 각 조직의 대표들이 굳은 얼굴로 돌아오더니 방 지부장이 단상에 올랐다. 밖의 분위기와 여러 상황을 설명한 후 해산을 결정했다며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해 다시 모이자 했다. 일부 노동자들이 계속 투쟁하자며 항의했다. 설전이 오간 끝에 결국 전체 가부를 물었고 다수가 해산에 동의하며 나흘 만에 투쟁은 막을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원풍모방 3백여 명 조합원들은 방 지부장을 선두로 그냥 걸었다. 공장까지는 6㎞쯤, 줄을 지어 걷는데 누군가 낮게 노래를 시작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 비를 맞으며 여의도를 벗어나 대방동 지하도를 지날 때 굴속에서 노래하는 우리 목소리가 벽에 막혀 웅웅 돌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노동운동은 참 외로운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쳤다.
해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껏 타오른 우리의 결의를 꺾은 건 비겁하고 우유부단한 노총 간부들이 아니라 전두환과 수하들이 저지른 광란의 칼바람이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가 운동권을 포함한 민주인사들이 한밤중에 대거 연행되었다. 시국은 얼어붙었고, 다음 날 광주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 봄, 우리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장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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