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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준정희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2-18 10:03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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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라. 소설가 이경란은 출판사로부터 창사 10주년 기념 앤솔로지에 실을 단편소설 원고 청탁을 받았다. 청탁은 그 동안 출판사에서 소설을 출간했던 작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가 이전에 이 출판사에서 장편소설 『디어 마이 송골매』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책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써달라는 것. 뭘 쓰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다가, 책이란 책의 물성과 본질적 기능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책이라는 물성과 함께 문자 텍스트를 통해 동시대 또는 후대 사람들과 소통하는 본질적인 기능 역시 있다는 것을. 소설의 실타래가 풀 바다이야기고래 리기 시작했다. 책의 물성과 본질적인 기능을 동시에 다루는 이야기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책에서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로의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는 소설로.
“소설 속에서 화자인 ‘나’는 처음 책을 물성으로만 취급합니다. 책을 무시하기 위해 일 바다이야기2 부러 도배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배 퍼포먼스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이나 카페 손님의 반응을 통해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라는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게 되지요.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착안해 쓰게 된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고 있는데, 책의 본질에 대한 찬사나 추앙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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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도 깊은 문장으로 묘파해온 이경란 작가가 앤솔로지로 발표된 단편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를 표제작으로 최근 발표한 단편 8편을 엮은 소설집(강)을 펴냈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이번 소설집에는 소년들이 자라서 도달한 지점, 그러니까 이제는 ‘K-아재들’이 된 모습이 릴게임바다이야기 다양하게 형상화돼 있다. 그런데 소년들이 “소외와 비애를 훈장처럼 달고 도착한 거리는 낡은 가부장제의 잔해와 자본주의의 비정한 영수증이 나뒹구는 춥고 어두운 뒷골목”이다. 작가는 바로 ‘루저가 된 K-아재들’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들의 몰락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 됐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황금성릴게임사이트 이경란은 왜 한국의 중년 남성, 이른바 ‘K-아재들’의 문제를 한국 사회의 그늘로 응시하게 됐을까. 그가 그리고 있는 K-아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작가를 지난 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왜 K-아재들을 그린 작품들을 쓰게 된 것인가.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작가의 말」에서 ‘처음부터 K-아재 시리즈를 쓰겠다고 계획하지는 않았다. 한편씩 써나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꼭 뭔가에 흘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소설이라는 매체가 사람 사이의 소통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을 쓰면서 중년 남성들을 좀 이해하고 싶어서 쓰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알아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쓰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는 작고한 남편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 소설들을 쓴 건가, 하고 뒤늦게 되짚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표제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는 해외에서 이십년을 떠돌다가 귀국해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낡은 단독주택을 카페로 개조해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책 이야기가 따로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한 지점에 포개지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카페 이벤트로 남겨진 책의 낱장을 찢어 벽에 바르는 도배 퍼포먼스를 하지만, 책 내용에 흥미를 보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책에 흥미를 갖게 된다. 아버지가 작가인 것으로 보이는 책을 통해 어긋난 사랑 때문에 실패한 아버지의 세계를 보게 되는데.
“빌어먹을. 책장을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잠시 후 꺼내 폈다가 잘게 찢어서 다시 버렸다. 영감은 끝까지 나를 엿 먹이는 중이었다. 영감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 예상하고 유유히 실버타운 행을 택한 걸까?….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마음이란 건 게임보다 책의 내용에, ‘호’와 ‘나’에게 자꾸 쏠렸다.”(36쪽)
―처음에는 소설 안의 책 내용에 관심 없다가 점점 책 속의 ‘나’와 ‘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묘한 경험으로 이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아버지가 ‘나’와 불화하게 된 원인도 아버지가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시대에 성소수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참혹했겠나. 결국 결혼하게 되고, 결혼에서 실패하고, 아들과도 불화하게 된다. 아들은 외국으로 떠나버렸다가 나중에야 돌아오게 된다. 소설은 어떻게 보면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아버지와 내가 화해로 가는 여정 같은 것이다. 나는 계속 책을 무시하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잘 안 된다. 결국 책이라는 것은 소통이 아닌가.”
―그런데 소년들은 자라서 다 어디로 가는가(웃음).
“사람들은 술집으로 간다, 군대에 간다, 군대 가기 전에 피시방 간다, 피시방 가기 전에 편의점에 먼저 간다, 이런 농담을 하더라(웃음). 개인적으로 성소수자 모티브를 처음 반영해 본 소설이라 고민이 좀 많았다. 성소수자가 10% 정도로 통계로 잡힌다고 하는데, 통계에 안 잡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느냐.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발화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편 「밥 한 번 먹어요」에선 경제적 곤궁함은 없지만 결혼 한 번 못해본 정서적 허기를 가진 50대 남성을 만날 수 있다. 바닷가 마을에 집을 지은 남성은 어느 날 로시난테라는 카페에서 우연히 한정이라는 여성을 만나 연정을 품게 됐다가 예상치 못한 전개를 맞는데. K-아재가 품은 뒤늦은 연정과 그에 수반되는 착각, 결국 깨닫게 되는 현실의 뒷맛을 탁월한 상징과 심리 묘사로 풀어낸다.
“있죠. 저 나무만 좀 다르게 생긴 거 같지 않아요? 몰랐어요? 나도 알겠는데. 한정은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한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돌아서자 잔디 위에 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롤 케이크 같은 게 아닐까 막연히 기대하며 열었을 때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상자 안에 든 건 잔멸치였다.”(97쪽)
―소설 속 남성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같은데, 상대에 대한 기본적 예의나 배려와 사랑 간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 경계가 참 어려운 것 같다. 나아가야 할지 말지, 제대로 포착하는 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린 라이트라는 말이 있는데, 상대방 행동을 그린라이트로 착각하기도 한다. 소설은 ‘친절하게 대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밈에서 착안했다. 소설 속 한정의 모델 역시 있다. 어떤 분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나무를 심어놓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고 해 정남이가 뚝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무를 심다니. 너무 재미있어 써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써도 된다고 해서 나무 장면을 넣게 된 것이다.(한정이 관계를 분명히 밝혀도 좋지 않을까) 한정의 입장에선 자신의 사생활을 굳이 다 밝혀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동네 카페에서 가끔 보는 사람한테 자신의 사생활을 시시콜콜 다 얘기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사이좋은 이웃, 더 나아가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데, 남자는 너무 성급하게 나아간 경우로 생각된다.(관계가 참 어렵다) 이것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상 같은 것으로, 사실은 연애 감정의 본질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소설집에는 중년 남성 백호종의 돌봄 노동을 다룬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 「소파인간 외출하다」 세 편의 단편도 담겨 있다. 「삐이유우우웅」이 백이 병원에 입원한 장모 준자씨를 간병하는 내용이고 「소파인간 외출하다」가 장모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면, 「K-아재의 가자미근」은 백이 병원에서 퇴원한 준자 씨의 집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내용을 그린다. 특히 「K-아재의 가자미근」은 돌봄 노동의 슬픈 숙명을 잘 보여주는 한편, 백이 우연히 냉장고에서 검은 봉투에 담겨진 지폐 다발을 발견하고 벌이는 웃픈 소동극을 담고 있다.
“엄마? 백 서방? 은영이 준자 씨를 깨울까 봐, 방문을 열까 봐 백은 손잡이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발을 뻗어 지폐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지폐는 바닥과 발에 붙어 순순히 모아지지 않았다. 종아리에 쥐가 나도록 뻗어도 백의 짧고 뻣뻣한 다리로는 애초에 무리였다.”(169쪽)
―돌봄 노동의 모습이 리얼하다. 이들 소설은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제가 간병을 좀 했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모시기 전에 자매들과 나눠 간병했고, 아버지 역시 당번을 짜서 돌봄을 하고 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출퇴근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부모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짐을 싸서 병원생활을 했다. 돌봄 노동을 하다 보면 이 세계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와 약속 한 번 편하게 못하고, 영화도 마음대로 보러가지 못한다. 언제나 신경이 곤두 서 있다. 바깥 세계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소외감이 든다. 고달픈 일이고, 자기를 온전히 받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보면, 간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자들이더라. 왜 돌봄은 꼭 여성이 해야 되나. 남성도 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 약간의 반발심에다가 돌봄 노동까지 할 수밖에 없는 선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남성이 간병을 하면 문학적으로 ‘낯설게 하기’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돼 쓰게 됐다. 소설이 실감난다는 반응은 아마 간병이 제 생활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겪은 일이 많고, 제 안에 들어와 있는 무수한 돌보는 사람 이야기를 좀 풀어놓고 싶었다. 돌봄 3부작은 병원에서 간병할 때 쓰거나, 간병과 간병 사이 컨디션이 좋을 때 쓰거나, 간병 당번이 아닐 때 썼다.”
―백이라는 남성이 너무 재미있는 인물인데, 어디서 왔는지.
“모델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다. 만약 남자라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생활에 임할 것이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그의 입장이 돼 생각해봤다. 영어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본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냥 이 사람이 한번 돼보자고 한 것이다.”
「K-아재의 깨물근」에선 실직 상태로 아내 눈치 보기에 골머리를 썩이며 사둔 주식이 반 토막이 나는 바람에 무력감을 겪는 예순넷의 은퇴자 이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대학 동기 세 명과 함께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가려다가 집까지 팔아넘긴 친구를 보며 피할 수 없는 무력감과 소외를 느낀다.
“임대사업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저만치 가던 제3의 아재가 뒤돌아보았다. 빨리 와! 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간다고. 갈 거야. 갈 건데, 그런데… 이 새끼가 집을 팔았다잖냐. 집을 팔았대. 재산이라곤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 하나뿐인 놈이 그걸 팔았다네? …이제 이탁의 손은 툭, 툭, 제2의 아재 어깨를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치고 있었다. 끄억, 끄억, 이탁이 툭, 툭, 칠 때마다 소맥잔이 넘쳐흐르듯 제2의 아재 목에서 울음이 꿀럭꿀럭 흘러나왔다.”(212쪽)
―이 소설은 어떻게 왔는지.
“등단하기 전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됐다. 남편 친구들이 자꾸 외곽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왜 이사를 갔나 했더니, 집을 팔아 자식들을 결혼하는 데 보태주고 자신들은 외곽으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이 미쳐가지고 젊은이들은 집을 살 수도 없어 결국 부모들이 이렇게 해주는구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중에 어쩌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다. 이런 생각들이 스스로 조합을 하는 것 같다.”
―제목에 들어간 ‘가자미근’이나 ‘깨물근’이라는 단어는 직관적이고 매우 시각적인데.
“「K-아재의 깨물근」을 먼저 썼는데, 깨물근은 씹을 때 사용하는 근육인 저작근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의 중장년 남성들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가정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 평생을 열심히 일해 가족을 벌어 먹였는데, 퇴직해 집으로 돌아왔더니 자신의 자리는 없고 오히려 왜 집에만 있느냐며 무시당하는 것 같고 자리를 못 찾아간다.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잃어버렸고, 경제적 능력도 튼튼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사교성이 강한 것도 아니어서, 어떻게 보면 참 가엾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힘이 빠졌다고 할 텐데, 힘이 빠진 것을 우리가 흔히 호랑이 이빨 빠졌다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이들에게 치아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소설을 쓰던 무렵 제가 아는 선배 몇몇 분들이 웃으면 이가 없는 게 다 보이는 것을 자주 봤다. 이 중장 남성들을 지탱하는 삶의 근육이라는 것이 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치아가 빠진 상태가 자꾸 떠오르더라. 깨물근이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근육 이름을 써보는 게 재미있어 가자미근도 쓰게 됐다. 가자미근은 종아리 뒤의 근육을 가리키는데, 역시 재미있는 말이다.”
―결국 소설을 다 쓰고 난 뒤 알게 된 K-아재들의 진실은 무엇인가.
“결국은 끝까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잘 되지 않는 숙제 같은 것 같다. 그럼에도 알려고 하는 자세야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혹시 K-아재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중년의 남성들도 이제 자신의 껍질을 좀 깼으면 좋겠다. 술집에 가면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들은 대체로 50대 후반에서 70대가 되기 전 남성들인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무의식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스스로 먼저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쪽으로 가면 본인도 훨씬 편하고 삶도 더 나아질 것 같다. 그것이 잘 되는 사람이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K-아재들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거듭 비관한다. “몇 편의 소설을 썼다고 해서 K-아재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완전한 이해란 지상의 몫이 아닌 듯하다. 그러니 오해는 오해로 남겨둘 밖에. 그 오해들 사이에서 다만 부딪히고 체념하고 희구하려 한다. 그것이 산 자의 몫일 터이니.”(253쪽) 그것은 어쩌면 완전한 이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됐을 수 있겠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작가로서는 소설집을 또 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고 했던 마음이 어느 책보다도 강하지 않았나, 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또 작가로서의 욕심은 지난번 작품보다 조금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고, 지난번보다 조금 더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
예전의 소녀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고교 졸업 25주년을 맞아 한 호텔에서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세파에 지쳐 있던 사십 대의 이경란도 참석했다. 동기들과 당시 교사들을 만나 추억을 소환하면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초록색이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구나.
불현 듯 자신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이때 한없이 무력해 있었고 우울한 상태였다.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까지 하면서 뒷바라지 했던 딸아이가 대학에 진학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손에 잡히지 않던 시기였다.
“네 나이 마흔 다섯이면 글쓰기에 너무 좋은 나이인데,” 그런데 행사장에서 재회한 국어를 가르치던 담임선생은 그와 따로 만나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너도 이제 인생이 뭔지 알 나이가 됐는데, 글을 쓰지 그러냐.”
소설을 써보라는 소중한 격려였다. 한국 나이로 마흔 다섯, 만 나이로 마흔 넷. 자신의 나이를 헤아린 뒤, 그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되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집 근처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만화에 매료됐고 소설 읽기를 좋아했지만,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986년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해 재학 중 소설을 읽는 모임에 가입해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소설을 쓰는 건 전혀 다른 세계였다. 대신 넷째 딸로 집에서 생활비를 받아쓸 수도 없는 처지라 취직을 서둘러야 했다. 그에게 작가의 세계는 먼 세계였고, 소설을 쓰는 사람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래, 소설을 한번 써보자. 이경란은 소설을 써보리라고 생각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 있던 그에게 소설을 쓴다는 건 돈을 안 들이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11년 10월, 그는 첫 습작을 써낼 수 있었다. 나중에 발표될 장편소설 『디어 마이 송골매』의 단편이었다.
“직장생활을 한 10년쯤 했는데,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몸에 맞는 옷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써보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세상에서 해 본 어떤 것보다도 재미있었죠. 첫 소설을 쓰고 나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됐다고. 소설을 한 편이라도 써본 사람은 안 써본 사람과 좀 다른 사람이라고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썼다. 필사도 열심히 했다. 혼자서 2년 동안 10편쯤 습작을 썼을 때, 자신이 불량품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4년부터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에서 방현석, 정지아, 손홍규, 전성태, 백가흠 등 좋은 작가들로부터 소설을 배우며 썼다.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경란은 2018년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탑」이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디어 마이 송골매』 를 발표했고,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사막과 럭비』 등을 펴냈다.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는지.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인물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된다. (책임을 진다?)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그냥 자극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무책임하게 악인을 설정하거나, 어떤 근거도 없이 현실에 기반 하지 않고 흥미를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을 항상 점검한다. 내가 이 사람에 무책임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사람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닌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소설이라는 게 결국 삶하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인물은 어떻게 연구하는지) 제가 사람을 만나러 다니진 못한다. 부모를 돌봄 한 지는 10년이 넘었고, 약속을 잘 못한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하면 소설을 쓸 시간이 없다. 만나자는 사람도 거의 없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다녀온다. 등단이 조금 늦었고, 살아온 삶이 있어서 조금 낫지 않을까 싶다. 글만 쓰는 건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하면서 여러 경험도 한다. 소설을 쓰기 전에 했던 일, 소설을 쓰고 나서 했던 일 모두 도움이 된다. 이거 다 소설 쓰라고 이렇게 살았나 보다,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로서 비전이나 포부는.
“글을 쓰고 책을 계속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마음 깊은 곳에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 못 쓰게 되지 않으면 계속 쓰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의 진정성과 문학적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한 작가로 기억되면 좋겠다. 내용도 좋고, 소설이라는 틀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는 작가. 어쩌면 굉장한 욕심일 수 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두 가지를 인정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도 많이 팔리면 좋겠다(웃음).”
조금 늦게 일어나는 편인 그는 일정한 생활 루틴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해 생활에 변화가 너무 많기도 했고. 루틴을 잡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경직된 일정으로 마음이 힘들어지고 쉽게 포기하게 되니까.
대신 생활의 중심을 읽고 쓰는 데 둔다. 틈날 때마다 어떻게든 쓰려고 노력한다. 보통 오후부터 초저녁까지, 컨디션이 가장 좋은 시간에 글을 쓴다. 작품을 쓸 때는 탁상 달력에 매일 목표 매수를 써놓는다. 상황이 어떠하든 목표 매수를 지키기 위해서다. 건강관리를 위해 산책도 자주 한다. 시간은 따로 정해놓지 않지만, 겨울에는 주로 오후에 나가고 여름에는 주로 밤에.
소설가 이경란은 쓰고 또 쓴다. 천천히 뛰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일반 사람이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속도로 42.19km를 뛰는 마라톤 선수처럼. 어느 날 그의 옆에는 누추하고 비루한 K-아재도 함께 뛰고 있을지도.
“말하자면 비루하고 치사한 일이지만, 그에게도 남들 다 갖추고 사는 요령이 몇 개 장착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술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일행 중 가장 늦게 출입문 쪽으로 가는 것이다. 요컨대 계산대 앞을 가장 늦게 지나치는 것…. 이런 각고의 노력으로 이탁은 어떻게든 승자가 될 수 있었지만 글쎄, 그걸 승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다. 비루하다 해야 할까, 너절하다 해야 할까, 한마디로 상처뿐인 영광, 아니, 영광 없는 승리라고나 할까. 그만하면 어엿한 대한민국 제1의 아재라 할 만했다.”(200~20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제원 선임기자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다가, 책이란 책의 물성과 본질적 기능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책이라는 물성과 함께 문자 텍스트를 통해 동시대 또는 후대 사람들과 소통하는 본질적인 기능 역시 있다는 것을. 소설의 실타래가 풀 바다이야기고래 리기 시작했다. 책의 물성과 본질적인 기능을 동시에 다루는 이야기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책에서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로의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는 소설로.
“소설 속에서 화자인 ‘나’는 처음 책을 물성으로만 취급합니다. 책을 무시하기 위해 일 바다이야기2 부러 도배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배 퍼포먼스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이나 카페 손님의 반응을 통해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라는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게 되지요.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착안해 쓰게 된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고 있는데, 책의 본질에 대한 찬사나 추앙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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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도 깊은 문장으로 묘파해온 이경란 작가가 앤솔로지로 발표된 단편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를 표제작으로 최근 발표한 단편 8편을 엮은 소설집(강)을 펴냈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이번 소설집에는 소년들이 자라서 도달한 지점, 그러니까 이제는 ‘K-아재들’이 된 모습이 릴게임바다이야기 다양하게 형상화돼 있다. 그런데 소년들이 “소외와 비애를 훈장처럼 달고 도착한 거리는 낡은 가부장제의 잔해와 자본주의의 비정한 영수증이 나뒹구는 춥고 어두운 뒷골목”이다. 작가는 바로 ‘루저가 된 K-아재들’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들의 몰락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 됐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황금성릴게임사이트 이경란은 왜 한국의 중년 남성, 이른바 ‘K-아재들’의 문제를 한국 사회의 그늘로 응시하게 됐을까. 그가 그리고 있는 K-아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작가를 지난 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왜 K-아재들을 그린 작품들을 쓰게 된 것인가.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작가의 말」에서 ‘처음부터 K-아재 시리즈를 쓰겠다고 계획하지는 않았다. 한편씩 써나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꼭 뭔가에 흘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소설이라는 매체가 사람 사이의 소통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을 쓰면서 중년 남성들을 좀 이해하고 싶어서 쓰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알아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쓰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는 작고한 남편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 소설들을 쓴 건가, 하고 뒤늦게 되짚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표제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는 해외에서 이십년을 떠돌다가 귀국해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낡은 단독주택을 카페로 개조해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책 이야기가 따로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한 지점에 포개지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카페 이벤트로 남겨진 책의 낱장을 찢어 벽에 바르는 도배 퍼포먼스를 하지만, 책 내용에 흥미를 보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책에 흥미를 갖게 된다. 아버지가 작가인 것으로 보이는 책을 통해 어긋난 사랑 때문에 실패한 아버지의 세계를 보게 되는데.
“빌어먹을. 책장을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잠시 후 꺼내 폈다가 잘게 찢어서 다시 버렸다. 영감은 끝까지 나를 엿 먹이는 중이었다. 영감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 예상하고 유유히 실버타운 행을 택한 걸까?….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마음이란 건 게임보다 책의 내용에, ‘호’와 ‘나’에게 자꾸 쏠렸다.”(36쪽)
―처음에는 소설 안의 책 내용에 관심 없다가 점점 책 속의 ‘나’와 ‘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묘한 경험으로 이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아버지가 ‘나’와 불화하게 된 원인도 아버지가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시대에 성소수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참혹했겠나. 결국 결혼하게 되고, 결혼에서 실패하고, 아들과도 불화하게 된다. 아들은 외국으로 떠나버렸다가 나중에야 돌아오게 된다. 소설은 어떻게 보면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아버지와 내가 화해로 가는 여정 같은 것이다. 나는 계속 책을 무시하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잘 안 된다. 결국 책이라는 것은 소통이 아닌가.”
―그런데 소년들은 자라서 다 어디로 가는가(웃음).
“사람들은 술집으로 간다, 군대에 간다, 군대 가기 전에 피시방 간다, 피시방 가기 전에 편의점에 먼저 간다, 이런 농담을 하더라(웃음). 개인적으로 성소수자 모티브를 처음 반영해 본 소설이라 고민이 좀 많았다. 성소수자가 10% 정도로 통계로 잡힌다고 하는데, 통계에 안 잡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느냐.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발화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편 「밥 한 번 먹어요」에선 경제적 곤궁함은 없지만 결혼 한 번 못해본 정서적 허기를 가진 50대 남성을 만날 수 있다. 바닷가 마을에 집을 지은 남성은 어느 날 로시난테라는 카페에서 우연히 한정이라는 여성을 만나 연정을 품게 됐다가 예상치 못한 전개를 맞는데. K-아재가 품은 뒤늦은 연정과 그에 수반되는 착각, 결국 깨닫게 되는 현실의 뒷맛을 탁월한 상징과 심리 묘사로 풀어낸다.
“있죠. 저 나무만 좀 다르게 생긴 거 같지 않아요? 몰랐어요? 나도 알겠는데. 한정은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한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돌아서자 잔디 위에 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롤 케이크 같은 게 아닐까 막연히 기대하며 열었을 때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상자 안에 든 건 잔멸치였다.”(97쪽)
―소설 속 남성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같은데, 상대에 대한 기본적 예의나 배려와 사랑 간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 경계가 참 어려운 것 같다. 나아가야 할지 말지, 제대로 포착하는 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린 라이트라는 말이 있는데, 상대방 행동을 그린라이트로 착각하기도 한다. 소설은 ‘친절하게 대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밈에서 착안했다. 소설 속 한정의 모델 역시 있다. 어떤 분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나무를 심어놓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고 해 정남이가 뚝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무를 심다니. 너무 재미있어 써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써도 된다고 해서 나무 장면을 넣게 된 것이다.(한정이 관계를 분명히 밝혀도 좋지 않을까) 한정의 입장에선 자신의 사생활을 굳이 다 밝혀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동네 카페에서 가끔 보는 사람한테 자신의 사생활을 시시콜콜 다 얘기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사이좋은 이웃, 더 나아가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데, 남자는 너무 성급하게 나아간 경우로 생각된다.(관계가 참 어렵다) 이것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상 같은 것으로, 사실은 연애 감정의 본질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소설집에는 중년 남성 백호종의 돌봄 노동을 다룬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 「소파인간 외출하다」 세 편의 단편도 담겨 있다. 「삐이유우우웅」이 백이 병원에 입원한 장모 준자씨를 간병하는 내용이고 「소파인간 외출하다」가 장모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면, 「K-아재의 가자미근」은 백이 병원에서 퇴원한 준자 씨의 집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내용을 그린다. 특히 「K-아재의 가자미근」은 돌봄 노동의 슬픈 숙명을 잘 보여주는 한편, 백이 우연히 냉장고에서 검은 봉투에 담겨진 지폐 다발을 발견하고 벌이는 웃픈 소동극을 담고 있다.
“엄마? 백 서방? 은영이 준자 씨를 깨울까 봐, 방문을 열까 봐 백은 손잡이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발을 뻗어 지폐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지폐는 바닥과 발에 붙어 순순히 모아지지 않았다. 종아리에 쥐가 나도록 뻗어도 백의 짧고 뻣뻣한 다리로는 애초에 무리였다.”(169쪽)
―돌봄 노동의 모습이 리얼하다. 이들 소설은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제가 간병을 좀 했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모시기 전에 자매들과 나눠 간병했고, 아버지 역시 당번을 짜서 돌봄을 하고 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출퇴근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부모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짐을 싸서 병원생활을 했다. 돌봄 노동을 하다 보면 이 세계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와 약속 한 번 편하게 못하고, 영화도 마음대로 보러가지 못한다. 언제나 신경이 곤두 서 있다. 바깥 세계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소외감이 든다. 고달픈 일이고, 자기를 온전히 받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보면, 간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자들이더라. 왜 돌봄은 꼭 여성이 해야 되나. 남성도 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 약간의 반발심에다가 돌봄 노동까지 할 수밖에 없는 선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남성이 간병을 하면 문학적으로 ‘낯설게 하기’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돼 쓰게 됐다. 소설이 실감난다는 반응은 아마 간병이 제 생활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겪은 일이 많고, 제 안에 들어와 있는 무수한 돌보는 사람 이야기를 좀 풀어놓고 싶었다. 돌봄 3부작은 병원에서 간병할 때 쓰거나, 간병과 간병 사이 컨디션이 좋을 때 쓰거나, 간병 당번이 아닐 때 썼다.”
―백이라는 남성이 너무 재미있는 인물인데, 어디서 왔는지.
“모델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다. 만약 남자라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생활에 임할 것이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그의 입장이 돼 생각해봤다. 영어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본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냥 이 사람이 한번 돼보자고 한 것이다.”
「K-아재의 깨물근」에선 실직 상태로 아내 눈치 보기에 골머리를 썩이며 사둔 주식이 반 토막이 나는 바람에 무력감을 겪는 예순넷의 은퇴자 이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대학 동기 세 명과 함께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가려다가 집까지 팔아넘긴 친구를 보며 피할 수 없는 무력감과 소외를 느낀다.
“임대사업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저만치 가던 제3의 아재가 뒤돌아보았다. 빨리 와! 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간다고. 갈 거야. 갈 건데, 그런데… 이 새끼가 집을 팔았다잖냐. 집을 팔았대. 재산이라곤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 하나뿐인 놈이 그걸 팔았다네? …이제 이탁의 손은 툭, 툭, 제2의 아재 어깨를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치고 있었다. 끄억, 끄억, 이탁이 툭, 툭, 칠 때마다 소맥잔이 넘쳐흐르듯 제2의 아재 목에서 울음이 꿀럭꿀럭 흘러나왔다.”(212쪽)
―이 소설은 어떻게 왔는지.
“등단하기 전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됐다. 남편 친구들이 자꾸 외곽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왜 이사를 갔나 했더니, 집을 팔아 자식들을 결혼하는 데 보태주고 자신들은 외곽으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이 미쳐가지고 젊은이들은 집을 살 수도 없어 결국 부모들이 이렇게 해주는구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중에 어쩌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다. 이런 생각들이 스스로 조합을 하는 것 같다.”
―제목에 들어간 ‘가자미근’이나 ‘깨물근’이라는 단어는 직관적이고 매우 시각적인데.
“「K-아재의 깨물근」을 먼저 썼는데, 깨물근은 씹을 때 사용하는 근육인 저작근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의 중장년 남성들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가정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 평생을 열심히 일해 가족을 벌어 먹였는데, 퇴직해 집으로 돌아왔더니 자신의 자리는 없고 오히려 왜 집에만 있느냐며 무시당하는 것 같고 자리를 못 찾아간다.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잃어버렸고, 경제적 능력도 튼튼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사교성이 강한 것도 아니어서, 어떻게 보면 참 가엾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힘이 빠졌다고 할 텐데, 힘이 빠진 것을 우리가 흔히 호랑이 이빨 빠졌다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이들에게 치아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소설을 쓰던 무렵 제가 아는 선배 몇몇 분들이 웃으면 이가 없는 게 다 보이는 것을 자주 봤다. 이 중장 남성들을 지탱하는 삶의 근육이라는 것이 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치아가 빠진 상태가 자꾸 떠오르더라. 깨물근이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근육 이름을 써보는 게 재미있어 가자미근도 쓰게 됐다. 가자미근은 종아리 뒤의 근육을 가리키는데, 역시 재미있는 말이다.”
―결국 소설을 다 쓰고 난 뒤 알게 된 K-아재들의 진실은 무엇인가.
“결국은 끝까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잘 되지 않는 숙제 같은 것 같다. 그럼에도 알려고 하는 자세야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혹시 K-아재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중년의 남성들도 이제 자신의 껍질을 좀 깼으면 좋겠다. 술집에 가면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들은 대체로 50대 후반에서 70대가 되기 전 남성들인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무의식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스스로 먼저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쪽으로 가면 본인도 훨씬 편하고 삶도 더 나아질 것 같다. 그것이 잘 되는 사람이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K-아재들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거듭 비관한다. “몇 편의 소설을 썼다고 해서 K-아재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완전한 이해란 지상의 몫이 아닌 듯하다. 그러니 오해는 오해로 남겨둘 밖에. 그 오해들 사이에서 다만 부딪히고 체념하고 희구하려 한다. 그것이 산 자의 몫일 터이니.”(253쪽) 그것은 어쩌면 완전한 이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됐을 수 있겠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작가로서는 소설집을 또 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고 했던 마음이 어느 책보다도 강하지 않았나, 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또 작가로서의 욕심은 지난번 작품보다 조금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고, 지난번보다 조금 더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
예전의 소녀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고교 졸업 25주년을 맞아 한 호텔에서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세파에 지쳐 있던 사십 대의 이경란도 참석했다. 동기들과 당시 교사들을 만나 추억을 소환하면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초록색이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구나.
불현 듯 자신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이때 한없이 무력해 있었고 우울한 상태였다.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까지 하면서 뒷바라지 했던 딸아이가 대학에 진학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손에 잡히지 않던 시기였다.
“네 나이 마흔 다섯이면 글쓰기에 너무 좋은 나이인데,” 그런데 행사장에서 재회한 국어를 가르치던 담임선생은 그와 따로 만나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너도 이제 인생이 뭔지 알 나이가 됐는데, 글을 쓰지 그러냐.”
소설을 써보라는 소중한 격려였다. 한국 나이로 마흔 다섯, 만 나이로 마흔 넷. 자신의 나이를 헤아린 뒤, 그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되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집 근처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만화에 매료됐고 소설 읽기를 좋아했지만,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986년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해 재학 중 소설을 읽는 모임에 가입해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소설을 쓰는 건 전혀 다른 세계였다. 대신 넷째 딸로 집에서 생활비를 받아쓸 수도 없는 처지라 취직을 서둘러야 했다. 그에게 작가의 세계는 먼 세계였고, 소설을 쓰는 사람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래, 소설을 한번 써보자. 이경란은 소설을 써보리라고 생각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 있던 그에게 소설을 쓴다는 건 돈을 안 들이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11년 10월, 그는 첫 습작을 써낼 수 있었다. 나중에 발표될 장편소설 『디어 마이 송골매』의 단편이었다.
“직장생활을 한 10년쯤 했는데,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몸에 맞는 옷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써보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세상에서 해 본 어떤 것보다도 재미있었죠. 첫 소설을 쓰고 나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됐다고. 소설을 한 편이라도 써본 사람은 안 써본 사람과 좀 다른 사람이라고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썼다. 필사도 열심히 했다. 혼자서 2년 동안 10편쯤 습작을 썼을 때, 자신이 불량품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4년부터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에서 방현석, 정지아, 손홍규, 전성태, 백가흠 등 좋은 작가들로부터 소설을 배우며 썼다.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경란은 2018년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탑」이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디어 마이 송골매』 를 발표했고,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사막과 럭비』 등을 펴냈다.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는지.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인물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된다. (책임을 진다?)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그냥 자극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무책임하게 악인을 설정하거나, 어떤 근거도 없이 현실에 기반 하지 않고 흥미를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을 항상 점검한다. 내가 이 사람에 무책임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사람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닌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소설이라는 게 결국 삶하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인물은 어떻게 연구하는지) 제가 사람을 만나러 다니진 못한다. 부모를 돌봄 한 지는 10년이 넘었고, 약속을 잘 못한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하면 소설을 쓸 시간이 없다. 만나자는 사람도 거의 없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다녀온다. 등단이 조금 늦었고, 살아온 삶이 있어서 조금 낫지 않을까 싶다. 글만 쓰는 건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하면서 여러 경험도 한다. 소설을 쓰기 전에 했던 일, 소설을 쓰고 나서 했던 일 모두 도움이 된다. 이거 다 소설 쓰라고 이렇게 살았나 보다,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로서 비전이나 포부는.
“글을 쓰고 책을 계속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마음 깊은 곳에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 못 쓰게 되지 않으면 계속 쓰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의 진정성과 문학적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한 작가로 기억되면 좋겠다. 내용도 좋고, 소설이라는 틀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는 작가. 어쩌면 굉장한 욕심일 수 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두 가지를 인정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도 많이 팔리면 좋겠다(웃음).”
조금 늦게 일어나는 편인 그는 일정한 생활 루틴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해 생활에 변화가 너무 많기도 했고. 루틴을 잡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경직된 일정으로 마음이 힘들어지고 쉽게 포기하게 되니까.
대신 생활의 중심을 읽고 쓰는 데 둔다. 틈날 때마다 어떻게든 쓰려고 노력한다. 보통 오후부터 초저녁까지, 컨디션이 가장 좋은 시간에 글을 쓴다. 작품을 쓸 때는 탁상 달력에 매일 목표 매수를 써놓는다. 상황이 어떠하든 목표 매수를 지키기 위해서다. 건강관리를 위해 산책도 자주 한다. 시간은 따로 정해놓지 않지만, 겨울에는 주로 오후에 나가고 여름에는 주로 밤에.
소설가 이경란은 쓰고 또 쓴다. 천천히 뛰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일반 사람이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속도로 42.19km를 뛰는 마라톤 선수처럼. 어느 날 그의 옆에는 누추하고 비루한 K-아재도 함께 뛰고 있을지도.
“말하자면 비루하고 치사한 일이지만, 그에게도 남들 다 갖추고 사는 요령이 몇 개 장착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술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일행 중 가장 늦게 출입문 쪽으로 가는 것이다. 요컨대 계산대 앞을 가장 늦게 지나치는 것…. 이런 각고의 노력으로 이탁은 어떻게든 승자가 될 수 있었지만 글쎄, 그걸 승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다. 비루하다 해야 할까, 너절하다 해야 할까, 한마디로 상처뿐인 영광, 아니, 영광 없는 승리라고나 할까. 그만하면 어엿한 대한민국 제1의 아재라 할 만했다.”(200~20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제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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