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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술여행- 55]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지난 여름 가장 완벽했던 하루의 종착지는 덴마크에 위치한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입니다. 오전에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바삐 만나고 늦은 점심에 훔레벡(Humlebæk)에 도착했죠. 일반적으로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훔레벡으로 기차를 타고 온 뒤 15분 정도를 걸어야 미술관에 닿습니다.
저는 남북을 오가며 완행버스를 탄 덕분에 경치가 좋은 해안도로를 달려 미술관 코앞에서 내렸습니다. 배는 고팠고, 이미 지쳐있던 상황이었죠. 제가 런던에서 미술계 종사 사이다쿨 자들에게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여행지는 코펜하겐이었고, 미술관은 루이지애나였습니다. 앞서 만난 오드럽가드가 근사했고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든 우려는 그저 기우였어요. 이곳은 무엇을 기대해도 그 이상인 곳이었거든요.
미술관의 간판인 알리샤 크바데의 모바일야마토 돌 지구본 [Pars pro Toto] ©김슬기
허세가 아닌 영혼이 깃든 미술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의 입구. 담쟁이 덩굴로 뒤덮 바다이야기프로그램다운로드 인 작은 건물이 맞아준다. ©김슬기
담쟁이로 뒤덮인 숲속 미술관을 떠난 지 1시간 만에 나타난 미술관의 첫 인상은 비슷했습니다. 초록초록한 작은 저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유명한 미술관이 이렇게 작을리가 없는데…. 혼잣말을 하며 실내로 들어갔더니 티켓 판매소와 안내 바다이야기게임 를 위한 로비가 있더군요.
여행 기간 내내 정말 알뜰살뜰 사용했던 코펜하겐 카드를 보여주고,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180도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작은 저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입구를 통과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바다이야기 을 따라 내려가면 꽤 큰 규모의 서점과 아트숍이 꾸며져 있더군요. 1층의 목이 좋은 곳에는 열 권 남짓한 책이 탑처럼 잘 보이게 쌓여 있었는데요. 늦여름 8월에 열리는 문학 축제에 초대된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탑이었습니다.
<인터메초>로 온 유럽을 휩쓸고 있는 슈퍼스타 샐리 루니, 미국의 아프리카계 문학을 이끄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이 그 해 루이지애나를 찾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이런 (거짓말 조금 더해서) 노벨문학상급 라인업의 문학축제를 여는 건 반칙아닙니까. 예정된 행사 프로그램을 보니 황석영 선생님도 계시더군요.
칼더와 외레순 해협이 보이는 바다뷰 ©김슬기
문을 열고 탁트인 정원으로 나오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그대로 자연 속의 미술관이 펼쳐졌거든요. 광활한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이 아늑한 정원에는 눈을 돌리면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외레순 해협의 바다가 보였고요.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증부터 생겼죠.
미국도 아닌 북유럽에 붙여진 루이지애나란 이름이 낯설었습니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의 이전 소유주였던 왕실사냥단의 장교였던 귀족 알렉산더 브룬의 세 아내 이름이 모두 ‘루이즈(Louise)’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겁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놀라운 사연이라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1958년 세워졌습니다. 치즈 사업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크누드 W. 젠슨(Knud W. Jensen, 1916~2000)은 1955년 덴마크 해안의 25에이커(3만평) 규모 부지에 자리한 ‘놀라운 사연을 가진’ 루이지애나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처음부터 젠슨은 대중이 예술을 허세스러운 것이 아니라 관람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도록, ‘영혼이 깃든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대 미술을 덴마크인들에게 더 친숙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개관 이후 1995년까지 40년 가까이 미술관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루이지애나를 “덴마크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많이 찾는 문화 중심지”(뉴욕타임스)로 키워냈습니다. 건축가 요르겐 보(Jørgen Bo)와 빌헬름 볼레르트(Wilhelm Wohlert)와 협력해, 건물과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설계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빌라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건물을 레고처럼 하나씩 덧붙여 나갔죠.
각기 다른 개성의 건물은 마치 바느질로 하나로 꿴 태피스트리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집니다. 자연 속에서 튀지 않도록 지하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2층 이상으로 높이지 않아, 건물들은 전혀 존재감을 뽐내지 않습니다. 덕분에 건축과 자연, 예술은 완벽하게 어우러집니다.
사우나 원칙이 뭐예요?
서점과 아트숍. ©김슬기
게다가 처음에는 덴마크 예술에 집중하려 했으나, 이후 국제적인 현대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하여 루이지애나를 세계적인 현대 미술의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미술계에 화두를 던지는 선구안이 좋은 전시를 꾸준히 하면서 이 덴마크 시골 미술관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죠. 스웨덴의 힐마 아프 클린트를 2014년 가장 먼저 대규모로 국외에서 소개한 미술관도 이곳이었습니다.
덴마크 현지 언론은 “크누드 W. 옌센은 덴마크인들의 박물관 관람과 미술 감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훔레벡에 있는 그의 웅장한 박물관은 전국 박물관의 모델이 되었다”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부단한 노력 덕분에 기적처럼 코펜하겐에서 1시간 거리의 미술관은 덴마크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으로 성장했습니다.
젠슨이 남긴 재미있는 유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우나 원칙(Sauna Principle)입니다. 이 원칙은 관람객에게 뜨거운 온탕과 차가운 냉탕을 번갈아 경험하듯 상반된 매력을 제공해 몰입도를 높이도록 원칙을 세웠죠.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이 원칙에 따라 연간 6~10회의 전시를 기획하며, 자코메티, 쿠사마 야요이 같은 거장(Hot)과 젊고 전위적인 현대 작가(Cold)의 전시를 균형 있게 구성하는 현대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중과 이완은 예술과 자연을 번갈아 경험하는 동안에도 작동해, 우리의 감각을 깨우도록(Refresh) 설계되었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종일 걷고 지쳤던 저는 카페로 달려가 오션뷰에 자리를 잡고 허기를 채웠습니다. 저처럼 연어 요리에 맥주를 마셔도 좋고, 덴마크 가정식 오픈 샌드위치인 스뢰레브뢰와 함께 커피를 마셔도 좋습니다. 카페에 앉아서 보는 바다 풍경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의 비밀
헨리 무어 [누워 있는 인물 5호(시그램)] ©Louisiana
리처드 세라 [협곡의 문] ©Louisiana
배를 채웠으니 모험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100개가 넘는 미술관을 헤맨 끝에 여행의 끝자락에 찾은 이 미술관은 ‘발견의 기쁨’을 알려준 곳입니다. 흔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진 이 미술관 조각 공원의 짜임새와 수준이 ‘넘사벽’이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지대가 높은 해변 언덕에 자리잡아 말그대로 바다 위에 떠 있는듯한 미술관입니다. 부지는 놀랍게도 호수와 숲을 모두 끼고 있고요. 28종의 나무로 조경한 나무 지도가 세워져 있는데요. 반세기 이상 세심하게 가꾼 정원의 나무들은 울창하게 자라 숲을 거니는 것 같았습니다.
50여개의 조각이 부지 전체에 숨어 있는 조각 공원은 미술관의 상징입니다. 각 작품을 찾아 헤매는 경험은 정말 특별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눈에 띄지만, 어떤 작품들은 숨어 있고, 주변 환경에 신비롭게 녹아들어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조각들은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작품이 많았죠. 여기엔 창립자의 특별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훌륭한 조각품은 언제나 견고함의 시험을 통과한다.”
젠슨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이 만든 무언가가 더해지지 않으면 지나치게 지배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각을 만지고 뛰어놀기도 하고, 거센 눈과 비바람에 마모되면서도 이곳을 지키게 된 이유죠.
미술관을 거니는 동안 헨리 무어, 리히텐슈타인, 칼더, 리처드 세라 같은 거장들이 낯설고 신기한 조각과 어우러지는 걸 봤습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인 알리샤 크바데의 지구 모양의 돌조각은 숲 속에 불시착한 태양계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공수한 다양한 암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이 ‘미니어처 태양계’는 휴먼 스케일의 익숙한 환경 속에 배치되어 경외감을 주는 동시에, 우주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제가 만난 루이지애나는 모험하는 미술관이었습니다. 좁은 비탈길을 오르내리고, 심지어 미끄럼틀을 타거나, 부두의 숨은 의자까지도 모험하듯 만나야 미술관의 모든 얼굴을 보게 되거든요. 심지어 장 누벨이 바닷가 부두에 벤치로 세워 놓은 작품에는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이 누워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야간개장
로버트 룽고의 전시 ©김슬기
실내로 들어가보니 소장품도 방대했지만 오늘의 가장 트렌디한 작가의 개인전 3개를 동시에 열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전시를 봤던 너무 잘나가는 작가 로버트 룽고는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요. 근사한 공간에 펼쳐진 대작들을 보니 다시 보이더군요. 특유의 목탄 페인팅은 많은 변화를 거쳐왔음을 목격했습니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탱크들이 만든 대지의 궤적을 나란히 목탄 페인팅으로 재현해 걸어놓은 모습에서 저는 이 작가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느끼게 됐습니다.
모로코 작가 보우크라 칼릴리(Bouchra Khalili)는 이민자들의 이주 경로를 별자리처럼 그려내는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시의성 있는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카리 업손은 주목받은 여성 작가의 파괴력 있는 설치 작업을 보여줬고요. 신체 일부를 연상시키거나 아주 사적인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낸 작품들은 신체, 욕망, 트라우마, 가족 등 작가 특유의 주제를 거대한 스케일로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요절한 작가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죠.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룽고와 함께 여성-이민자 예술을 한자리에 모으는 기획력이 탁월했습니다.
호수가 보이는 자코메티의 방. 모두가 이 곳에서 인생 사진을 남긴다. ©김슬기
헤롤드 엔카트와 피터 도이그가 걸려 있다. ©김슬기
3000점이 넘는다는 컬렉션을 소개하는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정상급 작품을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이라이트인 자코메티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방에선 필립 거스턴의 초기작과 프란시스 베이컨이 나란히 걸려 있더군요. 2020년대의 슈퍼 스타인 사라 휴즈, 다나 슈츠, 헤롤드 엔카트, 피터 도이그, 다니엘 리히터 등의 대형 회화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고루 만날 수 있는 건 미술관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컬렉팅을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월~목요일은 밤 10시까지 미술관을 열어 둡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계절에 저는 구석구석을 관람하고 바다 끝자락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에야 미술관의 문을 나섰습니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서는 문을 닫는 시간까지 바닷바람을 맞으며 긴 시간을 바닷가에서 ‘물멍’을 때리며 앉아 있었어요. 저의 길고 긴 미술여행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말이죠.
미술관을 떠난 밤 9시가 넘은 시간의 모습. 일몰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김슬기
바다는 반짝거리고, 새들이 쉼 없이 날아들었습니다. 루이지애나의 여름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놀랍게도 늦은 시간에도 관람객은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겐 처음이 아닌 방문일 테죠. 덴마크 국립미술관과 글립토텍의 50만명보다도 많은 연 방문객 70만명이 이 시골을 찾아옵니다. 믿기지 않는 숫자죠.
미술관이 꼭 대도시에만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저는 이곳에서 깨트린 것 같습니다. 설립자의 감각과 애정, 실력 있는 인력의 헌신, 그리고 그림 같은 ‘자연’이 있다면 최고의 미술관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됐고요. 저는 반드시 이 미술관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을 하며 이곳을 떠났습니다. 코펜하겐에서도 1시간 거리에 있는 모험이 필요한 곳임에도 말이죠.
제가 1년 동안 쉬지 않고 배달해온 ‘슬기로운 미술여행’이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종이책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꼭 만나보시길! 유럽 최고 미술관들의 이모저모를 속속들이 담았으니, 아마도 유럽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여름 가장 완벽했던 하루의 종착지는 덴마크에 위치한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입니다. 오전에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바삐 만나고 늦은 점심에 훔레벡(Humlebæk)에 도착했죠. 일반적으로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훔레벡으로 기차를 타고 온 뒤 15분 정도를 걸어야 미술관에 닿습니다.
저는 남북을 오가며 완행버스를 탄 덕분에 경치가 좋은 해안도로를 달려 미술관 코앞에서 내렸습니다. 배는 고팠고, 이미 지쳐있던 상황이었죠. 제가 런던에서 미술계 종사 사이다쿨 자들에게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여행지는 코펜하겐이었고, 미술관은 루이지애나였습니다. 앞서 만난 오드럽가드가 근사했고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든 우려는 그저 기우였어요. 이곳은 무엇을 기대해도 그 이상인 곳이었거든요.
미술관의 간판인 알리샤 크바데의 모바일야마토 돌 지구본 [Pars pro Toto] ©김슬기
허세가 아닌 영혼이 깃든 미술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의 입구. 담쟁이 덩굴로 뒤덮 바다이야기프로그램다운로드 인 작은 건물이 맞아준다. ©김슬기
담쟁이로 뒤덮인 숲속 미술관을 떠난 지 1시간 만에 나타난 미술관의 첫 인상은 비슷했습니다. 초록초록한 작은 저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유명한 미술관이 이렇게 작을리가 없는데…. 혼잣말을 하며 실내로 들어갔더니 티켓 판매소와 안내 바다이야기게임 를 위한 로비가 있더군요.
여행 기간 내내 정말 알뜰살뜰 사용했던 코펜하겐 카드를 보여주고,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180도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작은 저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입구를 통과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바다이야기 을 따라 내려가면 꽤 큰 규모의 서점과 아트숍이 꾸며져 있더군요. 1층의 목이 좋은 곳에는 열 권 남짓한 책이 탑처럼 잘 보이게 쌓여 있었는데요. 늦여름 8월에 열리는 문학 축제에 초대된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탑이었습니다.
<인터메초>로 온 유럽을 휩쓸고 있는 슈퍼스타 샐리 루니, 미국의 아프리카계 문학을 이끄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이 그 해 루이지애나를 찾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이런 (거짓말 조금 더해서) 노벨문학상급 라인업의 문학축제를 여는 건 반칙아닙니까. 예정된 행사 프로그램을 보니 황석영 선생님도 계시더군요.
칼더와 외레순 해협이 보이는 바다뷰 ©김슬기
문을 열고 탁트인 정원으로 나오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그대로 자연 속의 미술관이 펼쳐졌거든요. 광활한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이 아늑한 정원에는 눈을 돌리면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외레순 해협의 바다가 보였고요.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증부터 생겼죠.
미국도 아닌 북유럽에 붙여진 루이지애나란 이름이 낯설었습니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의 이전 소유주였던 왕실사냥단의 장교였던 귀족 알렉산더 브룬의 세 아내 이름이 모두 ‘루이즈(Louise)’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겁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놀라운 사연이라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1958년 세워졌습니다. 치즈 사업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크누드 W. 젠슨(Knud W. Jensen, 1916~2000)은 1955년 덴마크 해안의 25에이커(3만평) 규모 부지에 자리한 ‘놀라운 사연을 가진’ 루이지애나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처음부터 젠슨은 대중이 예술을 허세스러운 것이 아니라 관람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도록, ‘영혼이 깃든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대 미술을 덴마크인들에게 더 친숙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개관 이후 1995년까지 40년 가까이 미술관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루이지애나를 “덴마크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많이 찾는 문화 중심지”(뉴욕타임스)로 키워냈습니다. 건축가 요르겐 보(Jørgen Bo)와 빌헬름 볼레르트(Wilhelm Wohlert)와 협력해, 건물과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설계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빌라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건물을 레고처럼 하나씩 덧붙여 나갔죠.
각기 다른 개성의 건물은 마치 바느질로 하나로 꿴 태피스트리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집니다. 자연 속에서 튀지 않도록 지하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2층 이상으로 높이지 않아, 건물들은 전혀 존재감을 뽐내지 않습니다. 덕분에 건축과 자연, 예술은 완벽하게 어우러집니다.
사우나 원칙이 뭐예요?
서점과 아트숍. ©김슬기
게다가 처음에는 덴마크 예술에 집중하려 했으나, 이후 국제적인 현대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하여 루이지애나를 세계적인 현대 미술의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미술계에 화두를 던지는 선구안이 좋은 전시를 꾸준히 하면서 이 덴마크 시골 미술관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죠. 스웨덴의 힐마 아프 클린트를 2014년 가장 먼저 대규모로 국외에서 소개한 미술관도 이곳이었습니다.
덴마크 현지 언론은 “크누드 W. 옌센은 덴마크인들의 박물관 관람과 미술 감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훔레벡에 있는 그의 웅장한 박물관은 전국 박물관의 모델이 되었다”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부단한 노력 덕분에 기적처럼 코펜하겐에서 1시간 거리의 미술관은 덴마크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으로 성장했습니다.
젠슨이 남긴 재미있는 유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우나 원칙(Sauna Principle)입니다. 이 원칙은 관람객에게 뜨거운 온탕과 차가운 냉탕을 번갈아 경험하듯 상반된 매력을 제공해 몰입도를 높이도록 원칙을 세웠죠.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이 원칙에 따라 연간 6~10회의 전시를 기획하며, 자코메티, 쿠사마 야요이 같은 거장(Hot)과 젊고 전위적인 현대 작가(Cold)의 전시를 균형 있게 구성하는 현대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중과 이완은 예술과 자연을 번갈아 경험하는 동안에도 작동해, 우리의 감각을 깨우도록(Refresh) 설계되었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종일 걷고 지쳤던 저는 카페로 달려가 오션뷰에 자리를 잡고 허기를 채웠습니다. 저처럼 연어 요리에 맥주를 마셔도 좋고, 덴마크 가정식 오픈 샌드위치인 스뢰레브뢰와 함께 커피를 마셔도 좋습니다. 카페에 앉아서 보는 바다 풍경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의 비밀
헨리 무어 [누워 있는 인물 5호(시그램)] ©Louisiana
리처드 세라 [협곡의 문] ©Louisiana
배를 채웠으니 모험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100개가 넘는 미술관을 헤맨 끝에 여행의 끝자락에 찾은 이 미술관은 ‘발견의 기쁨’을 알려준 곳입니다. 흔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진 이 미술관 조각 공원의 짜임새와 수준이 ‘넘사벽’이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지대가 높은 해변 언덕에 자리잡아 말그대로 바다 위에 떠 있는듯한 미술관입니다. 부지는 놀랍게도 호수와 숲을 모두 끼고 있고요. 28종의 나무로 조경한 나무 지도가 세워져 있는데요. 반세기 이상 세심하게 가꾼 정원의 나무들은 울창하게 자라 숲을 거니는 것 같았습니다.
50여개의 조각이 부지 전체에 숨어 있는 조각 공원은 미술관의 상징입니다. 각 작품을 찾아 헤매는 경험은 정말 특별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눈에 띄지만, 어떤 작품들은 숨어 있고, 주변 환경에 신비롭게 녹아들어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조각들은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작품이 많았죠. 여기엔 창립자의 특별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훌륭한 조각품은 언제나 견고함의 시험을 통과한다.”
젠슨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이 만든 무언가가 더해지지 않으면 지나치게 지배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각을 만지고 뛰어놀기도 하고, 거센 눈과 비바람에 마모되면서도 이곳을 지키게 된 이유죠.
미술관을 거니는 동안 헨리 무어, 리히텐슈타인, 칼더, 리처드 세라 같은 거장들이 낯설고 신기한 조각과 어우러지는 걸 봤습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인 알리샤 크바데의 지구 모양의 돌조각은 숲 속에 불시착한 태양계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공수한 다양한 암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이 ‘미니어처 태양계’는 휴먼 스케일의 익숙한 환경 속에 배치되어 경외감을 주는 동시에, 우주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제가 만난 루이지애나는 모험하는 미술관이었습니다. 좁은 비탈길을 오르내리고, 심지어 미끄럼틀을 타거나, 부두의 숨은 의자까지도 모험하듯 만나야 미술관의 모든 얼굴을 보게 되거든요. 심지어 장 누벨이 바닷가 부두에 벤치로 세워 놓은 작품에는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이 누워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야간개장
로버트 룽고의 전시 ©김슬기
실내로 들어가보니 소장품도 방대했지만 오늘의 가장 트렌디한 작가의 개인전 3개를 동시에 열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전시를 봤던 너무 잘나가는 작가 로버트 룽고는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요. 근사한 공간에 펼쳐진 대작들을 보니 다시 보이더군요. 특유의 목탄 페인팅은 많은 변화를 거쳐왔음을 목격했습니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탱크들이 만든 대지의 궤적을 나란히 목탄 페인팅으로 재현해 걸어놓은 모습에서 저는 이 작가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느끼게 됐습니다.
모로코 작가 보우크라 칼릴리(Bouchra Khalili)는 이민자들의 이주 경로를 별자리처럼 그려내는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시의성 있는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카리 업손은 주목받은 여성 작가의 파괴력 있는 설치 작업을 보여줬고요. 신체 일부를 연상시키거나 아주 사적인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낸 작품들은 신체, 욕망, 트라우마, 가족 등 작가 특유의 주제를 거대한 스케일로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요절한 작가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죠.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룽고와 함께 여성-이민자 예술을 한자리에 모으는 기획력이 탁월했습니다.
호수가 보이는 자코메티의 방. 모두가 이 곳에서 인생 사진을 남긴다. ©김슬기
헤롤드 엔카트와 피터 도이그가 걸려 있다. ©김슬기
3000점이 넘는다는 컬렉션을 소개하는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정상급 작품을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이라이트인 자코메티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방에선 필립 거스턴의 초기작과 프란시스 베이컨이 나란히 걸려 있더군요. 2020년대의 슈퍼 스타인 사라 휴즈, 다나 슈츠, 헤롤드 엔카트, 피터 도이그, 다니엘 리히터 등의 대형 회화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고루 만날 수 있는 건 미술관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컬렉팅을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월~목요일은 밤 10시까지 미술관을 열어 둡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계절에 저는 구석구석을 관람하고 바다 끝자락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에야 미술관의 문을 나섰습니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서는 문을 닫는 시간까지 바닷바람을 맞으며 긴 시간을 바닷가에서 ‘물멍’을 때리며 앉아 있었어요. 저의 길고 긴 미술여행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말이죠.
미술관을 떠난 밤 9시가 넘은 시간의 모습. 일몰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김슬기
바다는 반짝거리고, 새들이 쉼 없이 날아들었습니다. 루이지애나의 여름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놀랍게도 늦은 시간에도 관람객은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겐 처음이 아닌 방문일 테죠. 덴마크 국립미술관과 글립토텍의 50만명보다도 많은 연 방문객 70만명이 이 시골을 찾아옵니다. 믿기지 않는 숫자죠.
미술관이 꼭 대도시에만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저는 이곳에서 깨트린 것 같습니다. 설립자의 감각과 애정, 실력 있는 인력의 헌신, 그리고 그림 같은 ‘자연’이 있다면 최고의 미술관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됐고요. 저는 반드시 이 미술관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을 하며 이곳을 떠났습니다. 코펜하겐에서도 1시간 거리에 있는 모험이 필요한 곳임에도 말이죠.
제가 1년 동안 쉬지 않고 배달해온 ‘슬기로운 미술여행’이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종이책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꼭 만나보시길! 유럽 최고 미술관들의 이모저모를 속속들이 담았으니, 아마도 유럽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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