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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no1reelsite.com충절사에 모셔진 정운 영정(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조선 수군의 신망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 녹도진 만호는 정운(鄭運, 1543-1592)이었다.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1594년(선조 27) 8월12일자 ‘선조실록’의 대화가 적격이다.
선조가 “임진년 이후 우리 군대가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 교활한 적병 릴게임방법 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운이 1592년(선조 25) 9월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하고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는 정운의 사망이 조선 수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 오징어릴게임 시 돌격대장이었던 정운은 1543년(중종 38) 전라도 영암군 옥천종면 대산리(현,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정7품 훈련원 참군(參軍)을 지낸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하동,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일곱 살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 새긴 칼을 차고 다니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겼다고 하니 보통 카카오야마토 아이가 아니었다.
1570년(선조 3)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금갑도(현, 진도) 수군 권관,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늘 짧았다.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 이순신의 왼팔이 되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보성 출신 안방준 바다이야기게임2 이 남긴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정운유사’(鄭運遺事)의 글이 참고된다.
“젊어서부터 강개해 호협한 기풍이 있어 매양 절의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스스로 허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산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관찰사)의 수행원 중에 신임을 받은 사람이 민폐를 끼치자 공(정운)이 곤장을 쳤는데, 감사가 좋아하지 않자 곧바로 벼슬을 황금성게임다운로드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웅천현감이 되어 감사의 미움을 사자 또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또 목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는데, 돌아오는 배에 한 마리의 망아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강직하고 청고(淸高)한 바가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정운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종4품 녹도진 만호에 임명된다. 당시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관할구역은 5관 5포였다. 5관은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다섯 곳의 육지 행정구역을 말하는데,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고흥)이었고, 다섯 곳의 수군 행정구역 5포는 여수 돌산의 방답진과 고흥의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었다.
녹도만호였던 정운의 직속 상관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었다. 정운은 이순신보다 2살이 많았고, 과거급제는 6년이나 빨랐다. 그럼에도 정운은 이순신을 정성으로 모셨고, 이순신은 정운을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2월, 휘하 부대 점검을 한다. 녹도진을 가장 먼저 찾아 방비책을 점검했지만, 전쟁 준비 상태는 완벽했다.
이순신이 남긴 2월21일자 ‘난중일기’에 “만호 정운의 극진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호 정운과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대포 쏘는 것도 구경하느라 촛불을 한참 동안 밝히고서야 헤어졌다”는 기록을 남긴다.
“만호 정운의 극진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라는 기록 속에, 정운의 전쟁 준비도, 이순신에 대한 존경도 묻어 있다. 이때부터 전라좌수영에는 정운은 송희립과 더불어 좌 정운, 우 희립이라 불릴 정도로 신임하는 장수가 된다.
이순신이 관할 부대를 점검하면서 칭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가 허술했던 사도진의 경우 첨사를 비롯한 군관과 색리 등을 처벌하기도 했다.
- 이순신의 돌격대장이 되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원 요청을 받는다. 하지만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은 채 머뭇거린다. 그 이순신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경상도 출병을 강행시킨 분이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자, 정운이 이순신을 설득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우리가 우리 지역(전라도)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경상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전라도)도 보존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종4품 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정3품 이순신을 협박해서 경상도로 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1594년(선조 27) 11월12일자 ‘선조실록’에 정곤수는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에게 ‘장수(이순신)가 만일 가지 않으면 전라도는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할 수 없이 가서 (적을) 격파했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박협(迫脅)이라고 나온다. ‘박협’은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함’이라는 뜻이니 협박과 상통한다. 부하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협박했다는 기록은 놀랍다.
1597년(선조 30) 1월23일자 ‘실록’에는 아예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목을 베려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협박했다’와 ‘참하려 했다’는 기록은 실제 믿기는 어렵다. ‘실록’의 두 기록은 이순신을 시기하던 상대 당의 모함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녹도만호 정운이 칼을 뽑아 들고 경상도로의 진격을 망설이는 이순신을 재촉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지만,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해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운의 주장을 이순신이 따른 것만은 분명하다. 경상도로의 출전 직전 정운이 이순신을 알현하고 답하는 대목이 ‘난중일기’에는 “(전라)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의 세력이 잠깐 사이 서울에 가까워지니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다. 만약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처럼 나온다. 전라우수사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진격하자는 건의였다.
정운의 주장은 적중했고, 이순신은 무적의 신화를 남기게 된다. 경상도로의 출정을 앞장서 주장했던 그가 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이 되었던 연유다.
- 나라가 오른팔을 잃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5.8),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 한산도(7.8), 안골포 해전(7.12)에서 연승을 거둔다. 그리고 한 달 여의 휴식을 취한 후 9월1일 부산포를 급습한다.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대승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라며 탄식한다.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시신을 수습한 후 해남의 두륜산 자락 선영에 안장하고 영전에 다음의 제문을 올린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아, 슬프도다….”
정운은 사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사망 소식을 접한 조정은 곧바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증직한다. 이어 1606년(선조 39)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에 가증(加增)된다. 1798년(정조 22)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는데,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니 ‘충’이요, 싸움터에 나가 죽으니 ‘장’이라.”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사당도 건립된다. 효종 3년(1652) 영암 유림에 의해 경호사(鏡湖祠)가 건립되고 1682년(숙종 8)에 충절사(忠節祠)로 사액된다. 충절사 사당 오른쪽에는 정운을 기리는 충신 정려각도 있다.
정운을 모신 사당, 충절사(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그는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에도 배향된다. 쌍충사는 1587년(선조 20) 녹도만호로 손죽도에서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이대원을 기리기 위해 녹도진성 안에 건립된 사당이다. 당시 이름은 이대원 묘당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정운이 부산 다대포(몰운대)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해 이대원 묘당에 함께 모시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됐다가 1681년(숙종 7)에 새로 건립했으며, 2년 뒤인 1683년(숙종 9) 조정으로부터 쌍충사로 사액을 받는다.
정운을 모신 사당, 쌍충사(고흥군 도양읍)
정운은 오늘도 후배 해군들의 기림을 받고 있다. 1997년 잠수함을 건조하고 붙인 이름이 ‘정운함’이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는 ‘충신정공운순의비’(忠臣鄭公運殉義碑)가 서 있다. 정운의 8대손 정혁이 1798년(정조 22) 다대첨사로 있을 때 세운 것인데, 비석의 뒷면에는 “그가 몰운대 아래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의 ‘운(雲)’자가 이름인 ‘운(運)’과 음이 같음을 알고, 이곳에서 전투 중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분전하다 순절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수 이순신 광장에도 이순신을 도운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그가 당당하게 서 있다.
정운 순의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정운 (여수시 이순신 광장)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 당시 정운의 역할은 안방준의 시문집 ‘은봉전서’에 나오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 이순신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조선 수군의 신망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 녹도진 만호는 정운(鄭運, 1543-1592)이었다.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1594년(선조 27) 8월12일자 ‘선조실록’의 대화가 적격이다.
선조가 “임진년 이후 우리 군대가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 교활한 적병 릴게임방법 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운이 1592년(선조 25) 9월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하고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는 정운의 사망이 조선 수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 오징어릴게임 시 돌격대장이었던 정운은 1543년(중종 38) 전라도 영암군 옥천종면 대산리(현,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정7품 훈련원 참군(參軍)을 지낸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하동,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일곱 살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 새긴 칼을 차고 다니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겼다고 하니 보통 카카오야마토 아이가 아니었다.
1570년(선조 3)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금갑도(현, 진도) 수군 권관,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늘 짧았다.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 이순신의 왼팔이 되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보성 출신 안방준 바다이야기게임2 이 남긴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정운유사’(鄭運遺事)의 글이 참고된다.
“젊어서부터 강개해 호협한 기풍이 있어 매양 절의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스스로 허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산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관찰사)의 수행원 중에 신임을 받은 사람이 민폐를 끼치자 공(정운)이 곤장을 쳤는데, 감사가 좋아하지 않자 곧바로 벼슬을 황금성게임다운로드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웅천현감이 되어 감사의 미움을 사자 또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또 목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는데, 돌아오는 배에 한 마리의 망아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강직하고 청고(淸高)한 바가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정운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종4품 녹도진 만호에 임명된다. 당시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관할구역은 5관 5포였다. 5관은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다섯 곳의 육지 행정구역을 말하는데,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고흥)이었고, 다섯 곳의 수군 행정구역 5포는 여수 돌산의 방답진과 고흥의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었다.
녹도만호였던 정운의 직속 상관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었다. 정운은 이순신보다 2살이 많았고, 과거급제는 6년이나 빨랐다. 그럼에도 정운은 이순신을 정성으로 모셨고, 이순신은 정운을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2월, 휘하 부대 점검을 한다. 녹도진을 가장 먼저 찾아 방비책을 점검했지만, 전쟁 준비 상태는 완벽했다.
이순신이 남긴 2월21일자 ‘난중일기’에 “만호 정운의 극진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호 정운과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대포 쏘는 것도 구경하느라 촛불을 한참 동안 밝히고서야 헤어졌다”는 기록을 남긴다.
“만호 정운의 극진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라는 기록 속에, 정운의 전쟁 준비도, 이순신에 대한 존경도 묻어 있다. 이때부터 전라좌수영에는 정운은 송희립과 더불어 좌 정운, 우 희립이라 불릴 정도로 신임하는 장수가 된다.
이순신이 관할 부대를 점검하면서 칭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가 허술했던 사도진의 경우 첨사를 비롯한 군관과 색리 등을 처벌하기도 했다.
- 이순신의 돌격대장이 되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원 요청을 받는다. 하지만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은 채 머뭇거린다. 그 이순신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경상도 출병을 강행시킨 분이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자, 정운이 이순신을 설득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우리가 우리 지역(전라도)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경상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전라도)도 보존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종4품 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정3품 이순신을 협박해서 경상도로 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1594년(선조 27) 11월12일자 ‘선조실록’에 정곤수는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에게 ‘장수(이순신)가 만일 가지 않으면 전라도는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할 수 없이 가서 (적을) 격파했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박협(迫脅)이라고 나온다. ‘박협’은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함’이라는 뜻이니 협박과 상통한다. 부하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협박했다는 기록은 놀랍다.
1597년(선조 30) 1월23일자 ‘실록’에는 아예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목을 베려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협박했다’와 ‘참하려 했다’는 기록은 실제 믿기는 어렵다. ‘실록’의 두 기록은 이순신을 시기하던 상대 당의 모함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녹도만호 정운이 칼을 뽑아 들고 경상도로의 진격을 망설이는 이순신을 재촉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지만,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해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운의 주장을 이순신이 따른 것만은 분명하다. 경상도로의 출전 직전 정운이 이순신을 알현하고 답하는 대목이 ‘난중일기’에는 “(전라)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의 세력이 잠깐 사이 서울에 가까워지니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다. 만약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처럼 나온다. 전라우수사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진격하자는 건의였다.
정운의 주장은 적중했고, 이순신은 무적의 신화를 남기게 된다. 경상도로의 출정을 앞장서 주장했던 그가 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이 되었던 연유다.
- 나라가 오른팔을 잃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5.8),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 한산도(7.8), 안골포 해전(7.12)에서 연승을 거둔다. 그리고 한 달 여의 휴식을 취한 후 9월1일 부산포를 급습한다.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대승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라며 탄식한다.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시신을 수습한 후 해남의 두륜산 자락 선영에 안장하고 영전에 다음의 제문을 올린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아, 슬프도다….”
정운은 사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사망 소식을 접한 조정은 곧바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증직한다. 이어 1606년(선조 39)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에 가증(加增)된다. 1798년(정조 22)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는데,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니 ‘충’이요, 싸움터에 나가 죽으니 ‘장’이라.”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사당도 건립된다. 효종 3년(1652) 영암 유림에 의해 경호사(鏡湖祠)가 건립되고 1682년(숙종 8)에 충절사(忠節祠)로 사액된다. 충절사 사당 오른쪽에는 정운을 기리는 충신 정려각도 있다.
정운을 모신 사당, 충절사(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그는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에도 배향된다. 쌍충사는 1587년(선조 20) 녹도만호로 손죽도에서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이대원을 기리기 위해 녹도진성 안에 건립된 사당이다. 당시 이름은 이대원 묘당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정운이 부산 다대포(몰운대)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해 이대원 묘당에 함께 모시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됐다가 1681년(숙종 7)에 새로 건립했으며, 2년 뒤인 1683년(숙종 9) 조정으로부터 쌍충사로 사액을 받는다.
정운을 모신 사당, 쌍충사(고흥군 도양읍)
정운은 오늘도 후배 해군들의 기림을 받고 있다. 1997년 잠수함을 건조하고 붙인 이름이 ‘정운함’이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는 ‘충신정공운순의비’(忠臣鄭公運殉義碑)가 서 있다. 정운의 8대손 정혁이 1798년(정조 22) 다대첨사로 있을 때 세운 것인데, 비석의 뒷면에는 “그가 몰운대 아래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의 ‘운(雲)’자가 이름인 ‘운(運)’과 음이 같음을 알고, 이곳에서 전투 중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분전하다 순절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수 이순신 광장에도 이순신을 도운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그가 당당하게 서 있다.
정운 순의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정운 (여수시 이순신 광장)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 당시 정운의 역할은 안방준의 시문집 ‘은봉전서’에 나오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 이순신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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