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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
고창고등학교 전경.
#오산학교의 어려움
고창 부안면 오산학교는 오직 사과 농장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더니 1922년 3월 마스토미는 일방적으로 오산고보의 폐교를 결정하고 말았다. 1921년 하반기부터 조짐은 있었다. '일신상의 사정 때문'이라고 했지만 일본 내 사과 판매가 원활하지 않은 것이 주원인이었다.
당시로서는 사과가 사치스런 기호 식품이기도 했지만,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도 세계 경제의 여파로 소비 부진과 극심한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 사과 농장 외 자신이 게임릴사이트 운영하던 다른 농장의 수익금이 충분하였음에도 그는 오산고보의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다 폐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조선 침략에 속죄하는 마음'이라던 그의 '선의의 교육사업'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교사 인건비 등 학교 운영비는 외면하고 재학생 무상교육 혜택을 지원하는 선에서 그쳤다. 학교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마스토 백경게임랜드 미는 학교 운영을 한국인 교사에게 맡긴 채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애초 학교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박약했다고 보여진다. 폐교를 결정한 마당에 마스토미는 재학생들의 이후 잔여 수업비로 1만 5천 원을 기부하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릴게임황금성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제176호)으로 지정된 구 고창고보 강당. 1939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창군민들의 교육 열망
1922년 무렵 폐교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 고창군민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고창의 중등교육을 이 바다이야기게임2 어가기 위해 뜻을 모았다. 1922년 2월 2일 군민대회를 열어 학교 인수를 결정하였고, 당시 군내에서 천석꾼에 해당하는 13명이 1인당 1만 원, 총 13만 원(당시 1만 원은 논 200마지기에 해당했다고 한다.)을 내놓았다. 마스토미가 내놓은 1만5천 원을 포함하여 총 14만 5천 원으로 법인 운영의 기초를 마련했다.
개인이 아니라 집 바다신2게임 단 운영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보통의 고창군민들 또한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비율에 따라 기금을 내어 총 35만 원이 모아졌다. 이에 재단 설립에 참여한 고창군민들이 모두 5,500명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실로 대단한 자립 교육 의지였고, 지역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재단 이사에 강대직, 김재석, 김상호, 김재종, 신수달, 이휴열, 이현승, 이필승, 민영직, 홍종철 등이 선임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당시 고창의 거부 홍종철(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었으며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됨)은 자신이 내기로 한 1만 원 외에 지역 주민들 몫 3천 명에 해당하는 기금을 더 냈다. 마침내 폐교 상황의 오산고보를 잇는 고창고보가 탄생한 것이다. 오산고보 학생들은 모두 고창고보에 흡수되었다.
1922년 6월 3일, 학교명이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어 재개교하기에 이르렀으며, 학교도 부안면 오산마을에서 고창군의 중심 고창읍 옛 읍성 자리로 옮겼다. 학교 운영권이 마스토미에서 양태승 교장을 비롯한 고창군민에게 완전 이전된 것이다.
1923년 7월 군민들은 고창고보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재단법인 체제를 갖춤과 동시에 마스토미를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마스토미의 이사장 선임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법인을 허가받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마스토미의 부인이 당시 총독이던 사이토 부인과 동문으로서 친분이 두터웠기에 그걸 활용하여 학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 이로써 마스토미 또한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신앙과 교육적 약속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다만 그는 학교 운영에 형식적으로 참여했을 뿐 실제 운영의 중심은 고창군민이었다. 1932년, 이전 오산학교 운영의 주요 수익원이었던 오산 사과 농장도 홍종철에게 유상으로 매도하였다. 부안면 오산마을 일대 그 토지는 대부분 최근까지 정치인 홍영표 등 홍씨 일가의 것이었다.
#마스토미에 대한 평가
신앙과 교육을 앞세운 선의의 일본인인가, 제국주의 정책에 편승한 식민지 투자자인가. 마스토미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양면적이다. 얼핏 보아 마스토미는 덴마크의 루터교 목회자였던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를 떠올리게 한다. 수년 전 국외 대안교육 현장 탐방을 위해 덴마크를 방문했을 때 그곳 학교마다 그룬트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그를 '근대교육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교육과 관련하여 그가 주창한 핵심은 패배 의식에 젖은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 개선을 위한 민중고등학교(Folk High School)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줄곧 신앙, 교육, 생활 계몽에 집착하였다. 마스토미 또한 그룬트비의 이러한 생애와 사상에 접하면서 조선에서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마스토미를 선의의 일본인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이들은 그가 신앙과 교육사업으로 한국민의 의식과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주로 개신교 측의 입장으로, 이러한 우호적인 시각은 일반적으로 공유되어 있다. 아쉽게도 식민지 지주로서 마스토미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외면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마스토미가 제국주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식민지 지주였다는 점도 함께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 지주처럼 마스토미 또한 국내 현지 농장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주로 일본에 거주했던 부재지주였다. 주로 추수기 소작료 징수 감독을 위해 1년에 몇 차례 오갔을 뿐 실제로는 국내 농장 관리는 고용된 농장 직원과 해당 구역 마름들이 담당하였다. 투자 손익을 따지면서 조선의 토지와 농장 경영을 했던 식민 경영자였다는 점이 분명하다.
마스토미가 교육사업에 투자한 자본은 소작제 농장 경영 수익이 아니라 사과 과수원의 것이 전부였다. 그의 주력 사업인 소작 농장 경영으로 취득한 수익은 온전히 그의 재산 증식에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사과 농장의 부진과 수익 창출이 어렵게 되자 점차 교육사업에서 발을 뺀 그의 행적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추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26년 4월 23일 고창고보 낙성식 후 김제 마스토미 집에서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 흰 머리가 사이토 총독, 좌측 웃고 있는 이가 마스토미, 좌에서 두 번째가 마스토미 부인으로 추정된다.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 제공
#사이토 총독의 고창고보 방문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는 3대(1919. 8.~1927.4.)와 6대(1929.7.~1931.6.)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특히 그는 기만적인 문화통치를 앞세워 조선의 독립을 억압했고,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 이간질시킨 장본인이다.
중추원 부활, 한국인 관료 임용 확대,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전환, 친일파 양성, 치안유지법 제정 등은 모두 그에게 나온 식민 통치술이었다. 이에 1919년 강우규, 1926년 송학선 등이 그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고창고보 낙성식과 관련하여 1926년 4월 26일 <시대일보>의 단신 기사도 있지만 같은 날 <매일신보>는 사진과 함께 보다 상세한 기사를 실었다. 좀 더 구체적인 장면,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기사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고창고보 낙성식 지난 (4월) 23일 성대히 거행, 대정 11년(1922년) 30만 원의 기본 재산을 연합하여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는 동시에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공사비 5만 원을 투자하여 부지 7천5백 평에 건평 3백 평 기와 2층 양옥을 건축하여 작년(1925년) 12월에 준공식을 했다는데, 이번 사이토 총독의 고창고보 시찰을 기회로 낙성식을 23일 오전 10시부터 거행하였다.
마스토미 교장의 개회식사, 사이토 총독의 고사(告辭), 내빈 제씨의 축사, 교장의 답사로써 식을 마쳤다. 여흥으로 20여 종의 운동 경기가 있은 후 오후 5시에 폐회하였다더라." 시대일보 기사에 의하면 야간에 학생들이 꾸린 연극도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준공은 1925년에 하였지만 낙성식은 해를 넘겨 4월에 진행되었다는 점, 지방의 단위 학교 낙성식에 총독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였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마도 마스토미 부인 데루코와 사이토 총독 부인 하루코의 학연(사사키 노부츠나의 제자)과 친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사이토의 일정에 맞추다보니 낙성식이 미루어져 이듬해에 치러진 것이다.
국어교사 송태회가 그린 1928년 고창고보 부근 풍경. 비단에 채색을 하였는데, 1925년 신축한 2층 붉은 벽돌 본관 건물이 선명하다. 교장 양태승이 대구 계성학교로 초빙되어 떠나자 선물한 그림이다. 그림 오른편 상단에 "무진년(1928) 가을 양태승을 위해 모양성 아래 우사에서 그렸다(高敞高等普通學校 附近 風景, 戊辰秋日 爲梁泰承君寫 牟陽城下 寓舍 念齋 宋泰會)."라는 글귀가 보인다.(양태승 교장 손자 양형렬 소유)
#전국에서 몰려든 민족학교
고창고보는 고창과 인근 호남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는 학교였다. 1924년 3월 10일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우등생 황영환과 박재우, 양선호, 이영규 등 7명을 배출하였다. 이 중 고창 출신은 2명뿐이었고, 다른 졸업생은 서울, 경기, 경북, 평북, 평양에서 배우러 온 학생들이었다. 특히 고창고보는 '군민학교', '민족학교'라는 취지를 살려 다른 학교에서 반일·항일 문제로 제적당한 학생들을 다수 받아들였다.
지난 <전주 신흥학교> 기사에서 언급했거니와 고창고보가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 조치를 당한 전주신흥학교 고등과 학생 전원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1929~1930년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 과정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전학을 희망한 학생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 시인 서정주는 1930년 당시 16세로서 서울 중앙고보 2학년 재학 중이었는데, 동료 학생 8명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1주기 기념 시위를 주도하다가 재판을 받고 퇴학을 당하였다. 그 역시 1931년 고향인 고창고보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제식 교육과 시험 거부 운동을 주도하다가 이곳에서도 권고 자퇴를 당하고 말았다.
고창고보를 민족학교 일군 1920년대의 교사들. 송태회(박종석 작 초상), 정인승, 이병학(좌에서 우로)
고창고보의 민족교육은 한국인 교장이 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22년 오산고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교장 대리로 임용되어 1928년까지 근무했던 양태승(1889~1955) 교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법인 이사회와 함께 전국적으로 유망한 교사들을 초빙하고 그들과 의기투합하여 학생들에게 독립 의지를 심어주고 애국심 고취하는 민족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이 때문에 민족교육의 양대 학교를 거론할 때 '북에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남쪽에서는 고창의 고창고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과 관련하여 고창고등학교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2011년에 개관한 '민족교육 역사관'이란 곳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 세우기 및 우리말 살리기 등의 민족교육' 담당했던 자취를 모아둔 곳이다. '재직했던 선생님들과 동문 선배들의 항일 독립운동, 한글 교육과 관련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갖춘 교육관'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창고보의 교사들
고창고보 이사회에서는 지역 사회의 교육에 대한 열망에 힘입어 교과교육은 물론 민족교육까지 이어갈 수 있는 역량 있는 교사를 전국적으로 수소문하여 초빙하였다.
먼저 서화가로 유명한 화순 사평 출신 송태회(宋泰會, 1872~1941)를 국어교사로 초빙하였다. 16세에 최연소로 사마시에 합격한 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잠시 활약하다가 보성군 사립 보성학교, 능주의 사립 육영학교, 순천 송광사에 있었던 사립 보명학교 등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위창 오세창, 매천 황현, 의재 허백련, 근촌 백관수 등과 교류했던 그는 교육을 통한 독립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전국적으로 고창보고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든 이유가 고창고보의 이러한 학풍이 때문이었다. 48세 때인 1920년 초빙된 그는 주로 조선어와 한문, 서화와 역사를 가르쳤다. 특히 서예와 사군자에도 솜씨가 뛰어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9차례나 입상하였으며, 고암 이응로 화백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가 1928년에 그린 고창고보의 전경은 아직 남아 있다. 그의 필묵 흔적은 영암 도갑사 '월출산 도갑사', 장성 백양사 '청운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 순천 송광사 '향수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설선당'과 '수홍루' 편액 등 호남지역 곳곳의 사찰에 많이 남아 있다.
고창고등학교 교표. 학교의 교훈인 '근로'를 상징한 듯 고창 특산품 청보리를 형상화했다.
전북 장수 출신으로서 정인승(鄭寅承, 1897~1986)은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고창고보에 초빙되었다. 그는 영어 교사로 초빙되었지만, 영어보다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국가관과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면 국어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당 1~2시간이던 국어(조선어) 시수를 일본어 수업 시수(8시간)에 버금가는 5시간으로 늘렸으며, 영어는 뒷전으로 하고 각 학년의 한국어 과목을 모두 맡아 가르쳤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을 제작에 관여했고, 이 때문에 1942년 10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전북대학교 3대 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 출신으로 고창고보 체육교사였던 이병학(李丙學, 1898~1963)의 업적도 소개해야겠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여 일본체육전문학교(지금의 일본체육대학)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역도 보급에 힘썼던 인물이다. 1926년 서상천·이규현 등과 조선체력증진법연구회를 창설하여 운영하다가 고창보고에 부임하여 닐스 부크(Niels Bukh, 1880~1950)가 창안한 '덴마크 국민체조'를 처음 들여와 수업에 적용하였다.
1936년부터는 보성전문에서 핸드볼(송구) 경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한국이 처음으로 'KOREA'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 선수단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체육인 양성을 하였다.
고창고보의 역사를 살펴보면, 송태희, 정인승, 이병학 외에도 실력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수많은 교사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025년은 고창고등학교 개교 106주년이다. 1919년부터 2025년까지 오산고보, 고창고보, 고창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19,381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고창고보가 1922년 6월 3일 오산에서 고창으로 이전했을 당시 처음에는 고창향교 명륜당과 부속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후 1925년 향교 바로 인근에 터를 잡아 2층의 벽돌 건물인 본관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낙성식까지 하였지만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기에는 시설이 부족하였다.
이후에도 신축과 증축이 이어졌다. 1937년 5월 15일 서편 신관이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12월 15일 함석지붕에 1층 벽돌 건물의 기숙사, 특별 교실이 완공에 이어 강당도 완공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함석지붕에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강당은 큰 행사와 체육 활동을 위한 공간이었다. 해방 이후 다른 건물들은 철거되고 새롭게 지어졌지만, 강당은 옛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비록 1939년 건립되었지만 무대와 홀의 공간 변용 없이 현재까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근대 학교 건축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2025년 10월 방문하였을 당시에도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 실내 체육 등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지방 교육 시설 연구 그리고 교육사적 자료로 가치 있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오산학교의 어려움
고창 부안면 오산학교는 오직 사과 농장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더니 1922년 3월 마스토미는 일방적으로 오산고보의 폐교를 결정하고 말았다. 1921년 하반기부터 조짐은 있었다. '일신상의 사정 때문'이라고 했지만 일본 내 사과 판매가 원활하지 않은 것이 주원인이었다.
당시로서는 사과가 사치스런 기호 식품이기도 했지만,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도 세계 경제의 여파로 소비 부진과 극심한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 사과 농장 외 자신이 게임릴사이트 운영하던 다른 농장의 수익금이 충분하였음에도 그는 오산고보의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다 폐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조선 침략에 속죄하는 마음'이라던 그의 '선의의 교육사업'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교사 인건비 등 학교 운영비는 외면하고 재학생 무상교육 혜택을 지원하는 선에서 그쳤다. 학교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마스토 백경게임랜드 미는 학교 운영을 한국인 교사에게 맡긴 채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애초 학교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박약했다고 보여진다. 폐교를 결정한 마당에 마스토미는 재학생들의 이후 잔여 수업비로 1만 5천 원을 기부하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릴게임황금성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제176호)으로 지정된 구 고창고보 강당. 1939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창군민들의 교육 열망
1922년 무렵 폐교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 고창군민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고창의 중등교육을 이 바다이야기게임2 어가기 위해 뜻을 모았다. 1922년 2월 2일 군민대회를 열어 학교 인수를 결정하였고, 당시 군내에서 천석꾼에 해당하는 13명이 1인당 1만 원, 총 13만 원(당시 1만 원은 논 200마지기에 해당했다고 한다.)을 내놓았다. 마스토미가 내놓은 1만5천 원을 포함하여 총 14만 5천 원으로 법인 운영의 기초를 마련했다.
개인이 아니라 집 바다신2게임 단 운영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보통의 고창군민들 또한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비율에 따라 기금을 내어 총 35만 원이 모아졌다. 이에 재단 설립에 참여한 고창군민들이 모두 5,500명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실로 대단한 자립 교육 의지였고, 지역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재단 이사에 강대직, 김재석, 김상호, 김재종, 신수달, 이휴열, 이현승, 이필승, 민영직, 홍종철 등이 선임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당시 고창의 거부 홍종철(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었으며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됨)은 자신이 내기로 한 1만 원 외에 지역 주민들 몫 3천 명에 해당하는 기금을 더 냈다. 마침내 폐교 상황의 오산고보를 잇는 고창고보가 탄생한 것이다. 오산고보 학생들은 모두 고창고보에 흡수되었다.
1922년 6월 3일, 학교명이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어 재개교하기에 이르렀으며, 학교도 부안면 오산마을에서 고창군의 중심 고창읍 옛 읍성 자리로 옮겼다. 학교 운영권이 마스토미에서 양태승 교장을 비롯한 고창군민에게 완전 이전된 것이다.
1923년 7월 군민들은 고창고보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재단법인 체제를 갖춤과 동시에 마스토미를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마스토미의 이사장 선임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법인을 허가받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마스토미의 부인이 당시 총독이던 사이토 부인과 동문으로서 친분이 두터웠기에 그걸 활용하여 학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 이로써 마스토미 또한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신앙과 교육적 약속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다만 그는 학교 운영에 형식적으로 참여했을 뿐 실제 운영의 중심은 고창군민이었다. 1932년, 이전 오산학교 운영의 주요 수익원이었던 오산 사과 농장도 홍종철에게 유상으로 매도하였다. 부안면 오산마을 일대 그 토지는 대부분 최근까지 정치인 홍영표 등 홍씨 일가의 것이었다.
#마스토미에 대한 평가
신앙과 교육을 앞세운 선의의 일본인인가, 제국주의 정책에 편승한 식민지 투자자인가. 마스토미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양면적이다. 얼핏 보아 마스토미는 덴마크의 루터교 목회자였던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를 떠올리게 한다. 수년 전 국외 대안교육 현장 탐방을 위해 덴마크를 방문했을 때 그곳 학교마다 그룬트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그를 '근대교육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교육과 관련하여 그가 주창한 핵심은 패배 의식에 젖은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 개선을 위한 민중고등학교(Folk High School)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줄곧 신앙, 교육, 생활 계몽에 집착하였다. 마스토미 또한 그룬트비의 이러한 생애와 사상에 접하면서 조선에서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마스토미를 선의의 일본인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이들은 그가 신앙과 교육사업으로 한국민의 의식과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주로 개신교 측의 입장으로, 이러한 우호적인 시각은 일반적으로 공유되어 있다. 아쉽게도 식민지 지주로서 마스토미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외면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마스토미가 제국주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식민지 지주였다는 점도 함께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 지주처럼 마스토미 또한 국내 현지 농장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주로 일본에 거주했던 부재지주였다. 주로 추수기 소작료 징수 감독을 위해 1년에 몇 차례 오갔을 뿐 실제로는 국내 농장 관리는 고용된 농장 직원과 해당 구역 마름들이 담당하였다. 투자 손익을 따지면서 조선의 토지와 농장 경영을 했던 식민 경영자였다는 점이 분명하다.
마스토미가 교육사업에 투자한 자본은 소작제 농장 경영 수익이 아니라 사과 과수원의 것이 전부였다. 그의 주력 사업인 소작 농장 경영으로 취득한 수익은 온전히 그의 재산 증식에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사과 농장의 부진과 수익 창출이 어렵게 되자 점차 교육사업에서 발을 뺀 그의 행적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추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26년 4월 23일 고창고보 낙성식 후 김제 마스토미 집에서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 흰 머리가 사이토 총독, 좌측 웃고 있는 이가 마스토미, 좌에서 두 번째가 마스토미 부인으로 추정된다.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 제공
#사이토 총독의 고창고보 방문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는 3대(1919. 8.~1927.4.)와 6대(1929.7.~1931.6.)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특히 그는 기만적인 문화통치를 앞세워 조선의 독립을 억압했고,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 이간질시킨 장본인이다.
중추원 부활, 한국인 관료 임용 확대,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전환, 친일파 양성, 치안유지법 제정 등은 모두 그에게 나온 식민 통치술이었다. 이에 1919년 강우규, 1926년 송학선 등이 그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고창고보 낙성식과 관련하여 1926년 4월 26일 <시대일보>의 단신 기사도 있지만 같은 날 <매일신보>는 사진과 함께 보다 상세한 기사를 실었다. 좀 더 구체적인 장면,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기사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고창고보 낙성식 지난 (4월) 23일 성대히 거행, 대정 11년(1922년) 30만 원의 기본 재산을 연합하여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는 동시에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공사비 5만 원을 투자하여 부지 7천5백 평에 건평 3백 평 기와 2층 양옥을 건축하여 작년(1925년) 12월에 준공식을 했다는데, 이번 사이토 총독의 고창고보 시찰을 기회로 낙성식을 23일 오전 10시부터 거행하였다.
마스토미 교장의 개회식사, 사이토 총독의 고사(告辭), 내빈 제씨의 축사, 교장의 답사로써 식을 마쳤다. 여흥으로 20여 종의 운동 경기가 있은 후 오후 5시에 폐회하였다더라." 시대일보 기사에 의하면 야간에 학생들이 꾸린 연극도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준공은 1925년에 하였지만 낙성식은 해를 넘겨 4월에 진행되었다는 점, 지방의 단위 학교 낙성식에 총독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였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마도 마스토미 부인 데루코와 사이토 총독 부인 하루코의 학연(사사키 노부츠나의 제자)과 친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사이토의 일정에 맞추다보니 낙성식이 미루어져 이듬해에 치러진 것이다.
국어교사 송태회가 그린 1928년 고창고보 부근 풍경. 비단에 채색을 하였는데, 1925년 신축한 2층 붉은 벽돌 본관 건물이 선명하다. 교장 양태승이 대구 계성학교로 초빙되어 떠나자 선물한 그림이다. 그림 오른편 상단에 "무진년(1928) 가을 양태승을 위해 모양성 아래 우사에서 그렸다(高敞高等普通學校 附近 風景, 戊辰秋日 爲梁泰承君寫 牟陽城下 寓舍 念齋 宋泰會)."라는 글귀가 보인다.(양태승 교장 손자 양형렬 소유)
#전국에서 몰려든 민족학교
고창고보는 고창과 인근 호남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는 학교였다. 1924년 3월 10일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우등생 황영환과 박재우, 양선호, 이영규 등 7명을 배출하였다. 이 중 고창 출신은 2명뿐이었고, 다른 졸업생은 서울, 경기, 경북, 평북, 평양에서 배우러 온 학생들이었다. 특히 고창고보는 '군민학교', '민족학교'라는 취지를 살려 다른 학교에서 반일·항일 문제로 제적당한 학생들을 다수 받아들였다.
지난 <전주 신흥학교> 기사에서 언급했거니와 고창고보가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 조치를 당한 전주신흥학교 고등과 학생 전원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1929~1930년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 과정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전학을 희망한 학생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 시인 서정주는 1930년 당시 16세로서 서울 중앙고보 2학년 재학 중이었는데, 동료 학생 8명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1주기 기념 시위를 주도하다가 재판을 받고 퇴학을 당하였다. 그 역시 1931년 고향인 고창고보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제식 교육과 시험 거부 운동을 주도하다가 이곳에서도 권고 자퇴를 당하고 말았다.
고창고보를 민족학교 일군 1920년대의 교사들. 송태회(박종석 작 초상), 정인승, 이병학(좌에서 우로)
고창고보의 민족교육은 한국인 교장이 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22년 오산고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교장 대리로 임용되어 1928년까지 근무했던 양태승(1889~1955) 교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법인 이사회와 함께 전국적으로 유망한 교사들을 초빙하고 그들과 의기투합하여 학생들에게 독립 의지를 심어주고 애국심 고취하는 민족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이 때문에 민족교육의 양대 학교를 거론할 때 '북에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남쪽에서는 고창의 고창고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과 관련하여 고창고등학교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2011년에 개관한 '민족교육 역사관'이란 곳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 세우기 및 우리말 살리기 등의 민족교육' 담당했던 자취를 모아둔 곳이다. '재직했던 선생님들과 동문 선배들의 항일 독립운동, 한글 교육과 관련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갖춘 교육관'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창고보의 교사들
고창고보 이사회에서는 지역 사회의 교육에 대한 열망에 힘입어 교과교육은 물론 민족교육까지 이어갈 수 있는 역량 있는 교사를 전국적으로 수소문하여 초빙하였다.
먼저 서화가로 유명한 화순 사평 출신 송태회(宋泰會, 1872~1941)를 국어교사로 초빙하였다. 16세에 최연소로 사마시에 합격한 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잠시 활약하다가 보성군 사립 보성학교, 능주의 사립 육영학교, 순천 송광사에 있었던 사립 보명학교 등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위창 오세창, 매천 황현, 의재 허백련, 근촌 백관수 등과 교류했던 그는 교육을 통한 독립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전국적으로 고창보고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든 이유가 고창고보의 이러한 학풍이 때문이었다. 48세 때인 1920년 초빙된 그는 주로 조선어와 한문, 서화와 역사를 가르쳤다. 특히 서예와 사군자에도 솜씨가 뛰어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9차례나 입상하였으며, 고암 이응로 화백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가 1928년에 그린 고창고보의 전경은 아직 남아 있다. 그의 필묵 흔적은 영암 도갑사 '월출산 도갑사', 장성 백양사 '청운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 순천 송광사 '향수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설선당'과 '수홍루' 편액 등 호남지역 곳곳의 사찰에 많이 남아 있다.
고창고등학교 교표. 학교의 교훈인 '근로'를 상징한 듯 고창 특산품 청보리를 형상화했다.
전북 장수 출신으로서 정인승(鄭寅承, 1897~1986)은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고창고보에 초빙되었다. 그는 영어 교사로 초빙되었지만, 영어보다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국가관과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면 국어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당 1~2시간이던 국어(조선어) 시수를 일본어 수업 시수(8시간)에 버금가는 5시간으로 늘렸으며, 영어는 뒷전으로 하고 각 학년의 한국어 과목을 모두 맡아 가르쳤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을 제작에 관여했고, 이 때문에 1942년 10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전북대학교 3대 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 출신으로 고창고보 체육교사였던 이병학(李丙學, 1898~1963)의 업적도 소개해야겠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여 일본체육전문학교(지금의 일본체육대학)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역도 보급에 힘썼던 인물이다. 1926년 서상천·이규현 등과 조선체력증진법연구회를 창설하여 운영하다가 고창보고에 부임하여 닐스 부크(Niels Bukh, 1880~1950)가 창안한 '덴마크 국민체조'를 처음 들여와 수업에 적용하였다.
1936년부터는 보성전문에서 핸드볼(송구) 경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한국이 처음으로 'KOREA'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 선수단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체육인 양성을 하였다.
고창고보의 역사를 살펴보면, 송태희, 정인승, 이병학 외에도 실력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수많은 교사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025년은 고창고등학교 개교 106주년이다. 1919년부터 2025년까지 오산고보, 고창고보, 고창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19,381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고창고보가 1922년 6월 3일 오산에서 고창으로 이전했을 당시 처음에는 고창향교 명륜당과 부속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후 1925년 향교 바로 인근에 터를 잡아 2층의 벽돌 건물인 본관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낙성식까지 하였지만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기에는 시설이 부족하였다.
이후에도 신축과 증축이 이어졌다. 1937년 5월 15일 서편 신관이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12월 15일 함석지붕에 1층 벽돌 건물의 기숙사, 특별 교실이 완공에 이어 강당도 완공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함석지붕에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강당은 큰 행사와 체육 활동을 위한 공간이었다. 해방 이후 다른 건물들은 철거되고 새롭게 지어졌지만, 강당은 옛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비록 1939년 건립되었지만 무대와 홀의 공간 변용 없이 현재까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근대 학교 건축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2025년 10월 방문하였을 당시에도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 실내 체육 등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지방 교육 시설 연구 그리고 교육사적 자료로 가치 있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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