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로 시작하는 성기능 개선 솔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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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금호은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1-08 09:37조회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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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로 시작하는 성기능 개선 솔루션
남성의 성기능은 단순한 생리 작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자존감, 부부 관계, 심리적 안정, 더 나아가 삶의 질과 직결된 건강 지표입니다. 중년 이후 많은 남성들이 겪는 발기부전, 성욕 저하, 조루 등 성기능 장애는 신체 노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를 방치하거나 회피할 경우 문제는 더욱 복합적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의학의 발전은 이러한 남성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중 가장 널리 사용되고, 높은 신뢰를 받아온 약물이 바로 비아그라입니다.
비아그라는 실데나필sildenafil이라는 성분을 기반으로 한 발기부전 치료제로, 1998년 미국 FDA 승인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명 이상이 사용한 대표적인 남성 성기능 개선 약물입니다. 성적 자극 시 음경 내 해면체에 혈류가 원활히 공급되도록 돕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며, 발기력 부족, 발기 유지 시간 감소 등 다양한 증상 개선에 효과가 입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비아그라는 즉각적인 효과와 안전성을 두루 갖춘 솔루션으로, 성기능 개선의 첫걸음을 떼려는 남성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선택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기능 개선은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일시적인 보완이 아니라 장기적인 회복을 위한 전략이 요구됩니다. 전문가들은 성기능 저하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심리적 요인으로, 스트레스, 우울감, 부부 갈등 등이 성욕과 성 반응을 억제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요인으로,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 호르몬 감소 등이 발기력 저하를 초래합니다. 특히 음경 해면체 내 혈관 건강이 저하되면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발기 자체가 어렵거나 불완전한 경우가 많습니다.
비아그라는 이 신체적 요인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약물입니다. 실데나필은 PDE5phosphodiesterase type 5 효소를 억제함으로써 cGMP의 분해를 막고, 산화질소NO의 혈관 확장 작용을 증폭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음경 내 혈관이 확장되고 혈류가 증가하여 발기가 촉진됩니다. 이 작용은 성적 자극이 있을 때에만 활성화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성 반응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발기의 질과 지속 시간을 향상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비아그라의 복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관계 약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하며, 공복 상태에서 복용할 경우 흡수율이 높아집니다. 효과는 보통 4시간가량 지속되며, 하루 1회 복용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일반적으로 50mg 용량으로 시작하며, 개인의 반응에 따라 25mg 또는 100mg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령이거나 특정 질환을 동반한 경우, 전문가의 복용 가이드에 따라야 안전하게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실제 임상시험 결과에서도 비아그라는 뛰어난 치료 효과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60~70의 환자에서 발기 기능의 뚜렷한 개선이 나타났으며, 당뇨병이나 심혈관 질환이 있는 환자군에서도 유의미한 효과가 보고되었습니다. 또한 반복 복용을 통해 장기적인 발기력 회복 가능성도 확인되고 있어, 성기능 장애의 지속적 개선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 병행하면 좋은 생활 습관도 중요합니다. 체중 관리, 꾸준한 유산소 운동,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조절, 건강한 식단 등은 비아그라의 효과를 높이고 장기적인 남성 건강 유지에 기여합니다. 특히 혈류 개선을 돕는 오메가3 지방산, 항산화 효과가 있는 비타민 E, 남성 호르몬 분비를 돕는 아연 등이 풍부한 식품을 섭취하면 비아그라 복용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안정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성기능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많은 남성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문제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기능 회복을 위해선 파트너와의 대화, 감정 공유, 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비아그라 복용을 통해 육체적 회복이 시작되면, 심리적인 안정과 부부 간의 유대 역시 자연스럽게 강화됩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 역시 존재하지만 대부분 경미한 수준입니다. 흔한 부작용으로는 두통, 안면 홍조, 코막힘, 소화불량, 시야 흐림 등이 있으며, 이는 일시적이고 개인의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드물게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기존 질환이 있거나 다른 약물을 병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 후 복용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질산염 계열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 비아그라와의 병용은 금기 사항이므로 반드시 복용 전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남성들의 실제 후기에서도 비아그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회복되니 일상도 활기차졌습니다, 예전과 같은 부부관계를 되찾아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한동안 관계를 피하던 제가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등 비아그라가 단순한 약이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목소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기능 개선의 첫걸음을 신중하게 시작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비아그라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선택지입니다. 이는 단순히 발기만을 돕는 약이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부부 관계를 회복하며 삶 전반의 활력을 불어넣는 포괄적 솔루션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아그라를 그저 약으로 보지 않고, 건강한 성생활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전략적 도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기능 문제는 감추고 외면할 일이 아닙니다. 빠르게 회복할수록 더 큰 자신감과 삶의 만족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비아그라는 그 회복 여정의 시작점이자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들이 그 효과를 경험했고,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전문가와 상의 후, 당신에게 맞는 성기능 개선의 첫걸음을 시작해보십시오. 당신의 건강과 자신감, 그리고 부부의 행복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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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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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선비 율곡과 동고는 왜 서로 원수가 됐나
김정탁 노장사상가
임진강 하류에 파주 율곡리가 있다. 이이(李珥·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어도 여기에서 성장해 호를 율곡(栗谷)이라 했다. 율곡리에는 화석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임진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바다신2릴게임 선조가 피난 가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여기에 불을 질러서 그 불빛을 이용해 임진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 율곡이 이런 전란을 예상하고 정자의 나무에 기름을 많이 발라서 빗속에서도 잘 탔다고 하는데 ‘율곡 신화 만들기’의 일환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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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의 파주 모임, 파벌 의심스럽자 “붕당은 환 릴게임한국 란 부를 것” 동고 비판
동고의 병풍 역할에 성장한 율곡 틈만 나면 혁신 외쳤으나 성과 미진
동고 별세 직후 사림 분열 거듭돼 결국 조선 망국, 동고의 경고 현실화 」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 율곡을 기리기 위해 세 릴게임하는법 워졌는데, 효종으로부터 자운이란 이름을 사액받았다. 대원군 시절에는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사진 김정탁]
율곡은 퇴계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런 그도 당대 존경받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1572)과 원수지간이었으니 ‘선한’ 선비들이 어째서 이런 험한 관계가 되었는지 황금성게임랜드 의아하다. 동고는 광주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4대조 이인손은 세조 때 우의정을, 3대조 이극배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또 3대조 이극균은 좌의정 시절 연산군에게 바른말을 해 자진 명령을 받고 죽었다. 조부 이세좌는 좌승지 시절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다준 일로 갑자사화 때 네 아들과 함께 처형돼 동고 아버지도 이때 죽었다. 이에 집안이 바다이야기합법 몰락해 6살 때 형 윤경과 괴산으로 피신해 생명만 부지할 수 있었다.
동고 이준경 초상. [사진 김정탁]
그런데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동고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고, 얼마 안 돼 조정의 주목받는 관료로 성장했다. 그리고 조광조를 비롯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을 옹호하다가 권신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명종 대는 척신 윤원형의 주도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언적과 함께 양심적인 선비들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또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신진 선비들 사이에서 우러름의 대상이었는데 이황과 이기(理氣) 논쟁으로 유명한 기대승도 동고가 우의정이 되자 조선 선비의 표준이라고 칭송했다.
승진 명단의 아들 이름 뺀 동고
이준경을 기리는 사당인 충정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있다. [사진 김정탁]
동고는 강직하고 청렴해 부인이 마련한 집에서 평생 살면서 방 한 칸 늘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집은 물건을 쌓아둔 창고처럼 보여 친구들이 동고(東皐·동쪽 언덕)라 부르지 않고 동고(東庫·동쪽 창고)라 불렀다. 영의정일 때는 승진 명단에 아들 이름이 있자 이를 뺄 만큼 스스로에 엄격해 정적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또 성격이 깐깐해도 유머 감각이 남달라서 다른 사람과 척지지 않으며 경륜을 편 유능한 선비였다.
동고가 죽고 200년이 지났어도 정조는 “마음 씀이 넓고 공평하며 나라의 안위를 한 몸으로 맡았어도 목소리와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고 국세(國勢)를 태산과 반석 같은 평안함에 두었다”라고 그를 칭송한 바 있다. 그가 황희·류성룡·이원익·채제공과 같은 반열의 영의정으로 평가받는 건 이 때문이다. 참고로 영의정 시절 이순신을 잘 봐 보성군수 방진에게 딸을 결혼시킬 것을 권유해 이를 실현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이준경 묘소. [사진 김정탁]
그렇지만 동고를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은 그가 연산군-중종-명종 대에 걸친 사대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 모두에 직간접적인 화를 입었음에도 서경덕·이황·조식·성혼처럼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키기보다 출사해서 지조를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은둔 사림으로부터 현실 참여에 따른 미움과 조롱을 받았어도 동고가 조정을 지켰기에 훈구파가 득실거려도 신진 사림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율곡은 이런 동고를 가리켜서 “사람이 죽을 때는 착하다는데 죽음에 이르러서 한 말이 사악하다”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는 『논어』 ‘태백’의 ‘새가 죽을 때는 울음소리가 슬퍼도 사람이 죽을 때는 말하는 게 착하다’를 인용한 내용이다. 율곡이 동고를 이처럼 비난한 건 동고가 죽기 직전 선조에게 올린 유차(遺箚·마지막 상소문) 중에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형성하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로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거다”라는 내용 때문이다.
“도량 없다” 율곡의 동고 비난
경기도 파주시 율곡리의 화석정.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뒤로 임진강이 흐른다. [사진 김정탁]
당시 율곡은 경기도 파주를 중심으로 성혼·심의겸·송익필·정철 등과 자주 어울려서 동고의 눈에는 이 모임이 붕당처럼 보였다. 선비의 붕당 결성은 조선에서 예비 반역 음모쯤으로 여겨져 율곡은 이 모임의 붕당적 성격을 부인해야 했다. 그런데도 사림이 만든 ‘군자당’이므로 별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또 훈구파가 조정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사림이 만든 붕당을 문제 삼으면 이를 적전 분열로 봐 붕당 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동고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다. 심지어 그의 『석담일기』에선 ‘왕을 도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상대를 받아들일 도량이 없다’라는 악평을 남겼다.
화석정 안쪽에 걸려 있는 한시. 율곡이 화석정을 소재로 여덟 살에 지었다. [사진 김정탁]
율곡이 어째서 이렇게 반응했을까? 혹시 조선에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고 봐 붕당을 형성해서라도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보아서일까? 율곡은 한 나라를 창업기·수성기·경장기로 나누어보는 역사 인식을 했는데 당시를 혁신이 필요한 경장기로 파악해 틈만 나면 경장론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경장론은 사대부조차 군역 의무와 세금 납부를 해야 하는 등의 계급적 양보를 전제로 하는 거라 당시로선 실현되기 어려웠다. 그러니 율곡은 조광조처럼 ‘뜨거운 의지’만 믿고 처한 ‘냉엄한 현실’을 외면한 셈이다.
화석정에서 내려다본 임진강. [사진 김정탁]
동고는 율곡과 달리 생각이 유연해서 개혁 속도를 조절하려고 애썼다. 이는 그가 겪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도 처음에는 조광조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았는데 그가 급진적인 개혁을 펴다가 기묘사화로 희생되자 교훈을 얻었다. 그건 급진적이면 실패하기 쉽고 오히려 반대파를 뭉치게 하는 부작용만 낳는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게 중요하고 일을 추진하려면 관념을 넘어 실질이 뒷받침돼야 함을 알았다. 또 병조판서를 세 번 역임한 입장에서 안타까워한 건 수군을 줄이고 육군을 늘이는 당시 조정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국방상의 위기를 초래할 거로 예견했는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입증되었다.
율곡 이이 초상. [사진 파주문화원]
동고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누가 봐도 사림의 분당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명해졌다. 그러니 동고의 예언이 맞고 율곡의 판단이 틀린 셈이다. 이에 율곡은 그의 잘못된 판단을 부끄러워해선지 1575년 ‘을해당론’을 시작으로 해 동서 간의 갈등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불안하긴 해도 얼마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는데 결국에는 파탄을 맞았다. 이렇게 된 데는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의 동시 탄핵을 두고 율곡이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한 게 큰 이유인데, 초년 관료 시절 옳다고 여겨 내뱉은 말과 행동이 오히려 붕당이 생겨나는 상황을 초래해 서인의 영수로 취급받은 게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나라 망친 정치 그러지 않아도 율곡은 대간(臺諫) 시절 조정 대신들을 원칙론으로 몰아붙여 자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동고도 이런 비판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동고로선 억울한 점이 많다. 사화로 인해 사림이 어려웠던 시절 동고는 이들의 병풍 역할을 해주었기에 조정에 갓 등장한 율곡 같은 사림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사림파는 선조 대에 들어서 훈구파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안동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까지 약 200년간 사림을 중심으로 정치가 펼쳐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림이 주도한 정치는 자체 분열로 인해 기대에 못 미쳤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했다. 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열했다. 결국에 노론이 조정을 장악했어도 이들 노론에 의해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섰으니 사림이 만든 붕당이라도 소인이 만든 붕당과 하등 다르지가 않다. 『논어』 ‘위령공’에 “군자는 단아하고 장중해서 다투지 않고 무리를 지어도 서로 도와서 잘못을 숨긴다”라고 하는데 군자를 자처한 사림들이 붕당을 결성해 조선의 정치를 망쳐놨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선한 선비 율곡과 동고는 왜 서로 원수가 됐나
김정탁 노장사상가
임진강 하류에 파주 율곡리가 있다. 이이(李珥·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어도 여기에서 성장해 호를 율곡(栗谷)이라 했다. 율곡리에는 화석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임진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바다신2릴게임 선조가 피난 가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여기에 불을 질러서 그 불빛을 이용해 임진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 율곡이 이런 전란을 예상하고 정자의 나무에 기름을 많이 발라서 빗속에서도 잘 탔다고 하는데 ‘율곡 신화 만들기’의 일환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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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의 파주 모임, 파벌 의심스럽자 “붕당은 환 릴게임한국 란 부를 것” 동고 비판
동고의 병풍 역할에 성장한 율곡 틈만 나면 혁신 외쳤으나 성과 미진
동고 별세 직후 사림 분열 거듭돼 결국 조선 망국, 동고의 경고 현실화 」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 율곡을 기리기 위해 세 릴게임하는법 워졌는데, 효종으로부터 자운이란 이름을 사액받았다. 대원군 시절에는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사진 김정탁]
율곡은 퇴계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런 그도 당대 존경받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1572)과 원수지간이었으니 ‘선한’ 선비들이 어째서 이런 험한 관계가 되었는지 황금성게임랜드 의아하다. 동고는 광주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4대조 이인손은 세조 때 우의정을, 3대조 이극배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또 3대조 이극균은 좌의정 시절 연산군에게 바른말을 해 자진 명령을 받고 죽었다. 조부 이세좌는 좌승지 시절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다준 일로 갑자사화 때 네 아들과 함께 처형돼 동고 아버지도 이때 죽었다. 이에 집안이 바다이야기합법 몰락해 6살 때 형 윤경과 괴산으로 피신해 생명만 부지할 수 있었다.
동고 이준경 초상. [사진 김정탁]
그런데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동고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고, 얼마 안 돼 조정의 주목받는 관료로 성장했다. 그리고 조광조를 비롯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을 옹호하다가 권신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명종 대는 척신 윤원형의 주도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언적과 함께 양심적인 선비들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또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신진 선비들 사이에서 우러름의 대상이었는데 이황과 이기(理氣) 논쟁으로 유명한 기대승도 동고가 우의정이 되자 조선 선비의 표준이라고 칭송했다.
승진 명단의 아들 이름 뺀 동고
이준경을 기리는 사당인 충정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있다. [사진 김정탁]
동고는 강직하고 청렴해 부인이 마련한 집에서 평생 살면서 방 한 칸 늘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집은 물건을 쌓아둔 창고처럼 보여 친구들이 동고(東皐·동쪽 언덕)라 부르지 않고 동고(東庫·동쪽 창고)라 불렀다. 영의정일 때는 승진 명단에 아들 이름이 있자 이를 뺄 만큼 스스로에 엄격해 정적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또 성격이 깐깐해도 유머 감각이 남달라서 다른 사람과 척지지 않으며 경륜을 편 유능한 선비였다.
동고가 죽고 200년이 지났어도 정조는 “마음 씀이 넓고 공평하며 나라의 안위를 한 몸으로 맡았어도 목소리와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고 국세(國勢)를 태산과 반석 같은 평안함에 두었다”라고 그를 칭송한 바 있다. 그가 황희·류성룡·이원익·채제공과 같은 반열의 영의정으로 평가받는 건 이 때문이다. 참고로 영의정 시절 이순신을 잘 봐 보성군수 방진에게 딸을 결혼시킬 것을 권유해 이를 실현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이준경 묘소. [사진 김정탁]
그렇지만 동고를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은 그가 연산군-중종-명종 대에 걸친 사대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 모두에 직간접적인 화를 입었음에도 서경덕·이황·조식·성혼처럼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키기보다 출사해서 지조를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은둔 사림으로부터 현실 참여에 따른 미움과 조롱을 받았어도 동고가 조정을 지켰기에 훈구파가 득실거려도 신진 사림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율곡은 이런 동고를 가리켜서 “사람이 죽을 때는 착하다는데 죽음에 이르러서 한 말이 사악하다”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는 『논어』 ‘태백’의 ‘새가 죽을 때는 울음소리가 슬퍼도 사람이 죽을 때는 말하는 게 착하다’를 인용한 내용이다. 율곡이 동고를 이처럼 비난한 건 동고가 죽기 직전 선조에게 올린 유차(遺箚·마지막 상소문) 중에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형성하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로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거다”라는 내용 때문이다.
“도량 없다” 율곡의 동고 비난
경기도 파주시 율곡리의 화석정.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뒤로 임진강이 흐른다. [사진 김정탁]
당시 율곡은 경기도 파주를 중심으로 성혼·심의겸·송익필·정철 등과 자주 어울려서 동고의 눈에는 이 모임이 붕당처럼 보였다. 선비의 붕당 결성은 조선에서 예비 반역 음모쯤으로 여겨져 율곡은 이 모임의 붕당적 성격을 부인해야 했다. 그런데도 사림이 만든 ‘군자당’이므로 별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또 훈구파가 조정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사림이 만든 붕당을 문제 삼으면 이를 적전 분열로 봐 붕당 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동고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다. 심지어 그의 『석담일기』에선 ‘왕을 도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상대를 받아들일 도량이 없다’라는 악평을 남겼다.
화석정 안쪽에 걸려 있는 한시. 율곡이 화석정을 소재로 여덟 살에 지었다. [사진 김정탁]
율곡이 어째서 이렇게 반응했을까? 혹시 조선에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고 봐 붕당을 형성해서라도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보아서일까? 율곡은 한 나라를 창업기·수성기·경장기로 나누어보는 역사 인식을 했는데 당시를 혁신이 필요한 경장기로 파악해 틈만 나면 경장론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경장론은 사대부조차 군역 의무와 세금 납부를 해야 하는 등의 계급적 양보를 전제로 하는 거라 당시로선 실현되기 어려웠다. 그러니 율곡은 조광조처럼 ‘뜨거운 의지’만 믿고 처한 ‘냉엄한 현실’을 외면한 셈이다.
화석정에서 내려다본 임진강. [사진 김정탁]
동고는 율곡과 달리 생각이 유연해서 개혁 속도를 조절하려고 애썼다. 이는 그가 겪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도 처음에는 조광조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았는데 그가 급진적인 개혁을 펴다가 기묘사화로 희생되자 교훈을 얻었다. 그건 급진적이면 실패하기 쉽고 오히려 반대파를 뭉치게 하는 부작용만 낳는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게 중요하고 일을 추진하려면 관념을 넘어 실질이 뒷받침돼야 함을 알았다. 또 병조판서를 세 번 역임한 입장에서 안타까워한 건 수군을 줄이고 육군을 늘이는 당시 조정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국방상의 위기를 초래할 거로 예견했는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입증되었다.
율곡 이이 초상. [사진 파주문화원]
동고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누가 봐도 사림의 분당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명해졌다. 그러니 동고의 예언이 맞고 율곡의 판단이 틀린 셈이다. 이에 율곡은 그의 잘못된 판단을 부끄러워해선지 1575년 ‘을해당론’을 시작으로 해 동서 간의 갈등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불안하긴 해도 얼마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는데 결국에는 파탄을 맞았다. 이렇게 된 데는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의 동시 탄핵을 두고 율곡이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한 게 큰 이유인데, 초년 관료 시절 옳다고 여겨 내뱉은 말과 행동이 오히려 붕당이 생겨나는 상황을 초래해 서인의 영수로 취급받은 게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나라 망친 정치 그러지 않아도 율곡은 대간(臺諫) 시절 조정 대신들을 원칙론으로 몰아붙여 자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동고도 이런 비판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동고로선 억울한 점이 많다. 사화로 인해 사림이 어려웠던 시절 동고는 이들의 병풍 역할을 해주었기에 조정에 갓 등장한 율곡 같은 사림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사림파는 선조 대에 들어서 훈구파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안동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까지 약 200년간 사림을 중심으로 정치가 펼쳐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림이 주도한 정치는 자체 분열로 인해 기대에 못 미쳤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했다. 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열했다. 결국에 노론이 조정을 장악했어도 이들 노론에 의해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섰으니 사림이 만든 붕당이라도 소인이 만든 붕당과 하등 다르지가 않다. 『논어』 ‘위령공’에 “군자는 단아하고 장중해서 다투지 않고 무리를 지어도 서로 도와서 잘못을 숨긴다”라고 하는데 군자를 자처한 사림들이 붕당을 결성해 조선의 정치를 망쳐놨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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