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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구가 죽겠어. 일을 늘어진 두 아저씨 누가두 차례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1977년 7월 22일 부주석으로 복귀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적 복귀였다. 덩의 복귀와 전 주석 마오쩌둥의 부인이 이끄는 ‘4인방’ 축출 결정은 제1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이뤄졌다. 사진은 부주석 복귀 당일의 덩샤오핑. Gettyimage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중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 됐다.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이 주도한 개혁·개방정책이 공식 출범하면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중국의 경제적 번영의 여정이 시작됐다.
1978년 중국의 1인당 소득대신증권그로쓰스팩 주식
은 절대빈곤 수준의 156달러로 세계 133위였다. 46년이 지난 2024년에는 83배 증가해 1만2969달러에 달했고, 순위는 69위로 상승해 중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1978년 중국의 총 경제규모는 약 1495억 달러로 세계 11위였으나 2024년 약 18조9430억 달러로 미국(약 29조1849억 달러)에 이어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비상장주식거래
러한 중국의 대굴기(大崛起)는 전적으로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정책 덕분이다.
덩샤오핑은 키(157cm)가 아주 작았지만 최고지도자인 그가 방에 들어서면 좌중을 압도하는 기운으로 자연스레 모든 사람이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고 한다. 그가 방에 나타나면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고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았다. 그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때면SK에너지주식
집중력이 뛰어나고 과감했다. 덩샤오핑은 전시 군사령관으로서 활동하며 갖게 된 침착함과 반세기 동안 권력의 핵심부에서 중대한 일들을 처리하며 길러온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공식 직위로 국가 주석이나 총리를 역임하지 않았다. 이는 1975년 헌법 개정으로 주석직이 공식적으로 폐지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1릴게임종류
978~1983),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1~1989), 중앙자문위원회 주임(1982~1987) 등 여러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의 최고 국정 운영자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소련 유학에서 공산주의자로 귀국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四川)성 광안현 파이팡촌에서릴온라인
태어났다. 본명은 덩시안셩(鄧先聖)이었으며, 후에 덩시시안(鄧希賢)으로 개명했다가 프랑스 유학 시절 덩샤오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의 가정은 지역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 비교적 유복한 환경이었다. 그는 6세에 전통적인 서당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래 신식 교육으로 고향의 초등학교, 광안현의 현립고등소학교, 충칭(重慶)의 충칭부립중학교에 진학해 서구의 과학과 민주주의 사상을 배웠다. 이 시기 중국은 신해혁명(1911)과 5·4운동(1919)이 일어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어린 덩샤오핑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의식을 갖게 됐다.
정치적 동료였던 덩샤오핑과 저우런라이. 저우는 1949년 10월부터 1976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국무원 총리로 재임했고, 덩샤오핑은 1978년부터 1992년 은퇴할 때까지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다. Gettyimage
1910년대부터 중국 교육계의 주요 인사들 주도로 외국에 나가 일하면서 공부를 하자는 취지로 근공검학(勤工儉學) 운동을 펼쳤는데, 1919년 제1차 유학생단이 프랑스로 떠났다. 이어 1920년 16세의 덩샤오핑은 근공검학 제2차 프로그램에 선발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덩샤오핑은 정규교육보다는 철강 공장, 고무 공장 등에 다녔고 식당의 그릇닦이와 기관차 화부로도 일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본주의사회의 현실을 직접 체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계급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당시 프랑스는 중국 혁명가들이 결집한 나라였다. 1922년, 18세의 덩샤오핑은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유럽지부에 가입했다.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의 시작이었다. 1924년에는 3년 전 천두슈(陳獨秀) 등에 의해 창당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프랑스에서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리웨이한(李維漢), 천이(陳毅) 등 뒷날 중국 혁명의 주요 지도자가 될 인물들을 만났고, 후일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胡志明)도 만났다. 특히 여섯 살 위인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하고 활동하면서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관계는 멘토-멘티로까지 발전했는바,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이 실각할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보호하고 복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덩샤오핑이 훗날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됐다.
1926년 1월 덩샤오핑은 소련으로 가 모스크바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은 중국 혁명가들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1925년에 설립한 특수 목적 교육기관이었다. 소련에서 유학한 기간은 1년으로 짧았지만 덩샤오핑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공산주의 이념, 정치경제학 등을 배웠고, 당 조직 건설, 선전 활동, 노조 건설 등 혁명 활동의 실무 교육을 받았다.
1926년 말, 중국 국내 정세가 급변하면서 덩샤오핑은 귀국을 결정했다. 6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초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23세의 경험 많은 공산주의자로 성장해 있었다.
세 번 실권(失權)과 세 번 복권(復權)덩샤오핑의 정치 여정은 20세기 중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혁명 세대로서 온갖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 개혁 세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했다. 종국에는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중국을 세계 강국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정치 자산이 됐고, 그로 말미암아 중국은 대변혁의 길로 갈 수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덩샤오핑은 즉시 혁명 활동에 투신했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4·12 쿠데타) 이후 중국공산당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덩샤오핑도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 1927년 가을, 덩샤오핑은 시안(西安)에서 펑위샹(馮玉祥) 군벌의 정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28년 펑위샹이 공산당원들을 숙청하면서 덩샤오핑은 상하이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다시 1929년 12월 바이써(百色)의 봉기를 지도하고 중국공산당 홍군 제7군을 창설해 군사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33년 소련 유학파 왕밍(王明)을 중심으로 한 '28인의 볼셰비키'에 의해 '우경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당내 직책에서 해임됐는데, 이것이 덩샤오핑의 첫 번째 정치적 시련이었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이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덩샤오핑도 형이라 부르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참여했다. 대장정 도중인 1935년 1월 마오쩌둥이 당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고,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군대인 홍군 7군의 정치위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덩샤오핑은 항일전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재개됐다.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중국 내전 후기에 벌어진 요심전역(遼瀋戰役), 회해전역(淮海戰役), 평진전역(平津戰役)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민당군의 주력이 사실상 궤멸됐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가능해졌다. 국공내전의 결정적 승패를 가른 3대 전투 중 덩샤오핑은 화이하이잔이(淮海戰役)에서 서기로서 전체 작전을 지휘해 60만의 군대로 100만 명의 국민당 군대를 물리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9년경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함께 대화하는 모습. Gettyimage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덩샤오핑은 중앙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52년 덩샤오핑은 중앙 인민정부 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됐다. 1954년에는 국무원 부총리, 1955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당과 정부의 최고 지도층에 진입했다. 1956년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은 중앙위원회 총서기(사무총장)로 선출됐다. 이는 그의 정치적 지위가 마오쩌둥, 류샤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에 이어 네 번째로 올라섰음을 의미했다.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덩샤오핑은 두 번째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 함께 덩샤오핑을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규정하고 숙청했다. 1967년 덩샤오핑은 모든 공직에서 해임됐고 당적까지 정지됐다. 덩샤오핑과 가족들은 베이징에서 강제로 추방돼 장시(江西)성 신젠현의 한 공장으로 하방(下方)됐다. 3년 4개월의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다.
1973년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 사건(1971년 9월 13일 중화인민공화국의 2인자였던 린뱌오가 부인 예췬, 자신의 아들 린리궈 등과 꾸몄던 마오쩌둥 암살 계획) 이후 당내 균형을 위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후 그는 1974년에는 유엔 총회에 중국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1975년 저우언라이는 자신이 병에 걸리자, 덩샤오핑에게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겨 자신의 실질적인 후계자임을 암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국 전역에서 추도 열기가 뜨거웠다. 덩샤오핑은 1976년 1월 8일 평생 동지였던 저우언라이 장례식장에 참석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4월 5일 청명절을 맞아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대규모 추도집회가 열렸는데, 이는 사실상 문화대혁명에 대한 항의 시위로 변질됐다. 마오쩌둥과 '4인방'은 '4·5천안문 사건'을 덩샤오핑이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판단했다. 덩샤오핑은 다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됐고, '반당·반사회주의적 우경복벽의 원흉'으로 규정됐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시련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 6일 4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종료됐다. 화궈펑(華國鋒)이 당 주석과 총리를 겸임하며 최고지도자가 됐지만, 그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덩샤오핑은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세 번째로 복권됐다. 그는 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의 직책을 회복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73세였다.
1978년 12월 18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169명의 중앙위원회 위원과 112명의 후보 위원들을 앞에 두고, 덩샤오핑은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라는 4개 노선을 발표했다. 제한적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이었다. 이 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 부정됐고,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한 개혁·개방정책이 확정됐다.
덩샤오핑의 삼전삼기(三顚三起))의 긴 정치적 인생의 결론은 "마오쩌둥 주석이 말한 많은 사상을 우리는 마땅히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과오 역시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사상적으로 나는 마오쩌둥 사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깃발조차 들지 않았다"라는 마오쩌둥의 골수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와 부정(否定)이다.
덩샤오핑의 엄청난 개혁·개방정책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농업 부문에서 시작돼 점진적으로 전 경제 부문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은 정치적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농업개혁(1978~1984)은 개혁·개방의 첫 번째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중국 정부는 농업개혁을 위해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의 공동체 시스템과 집단농장을 폐지했다. 인민공사 중심의 중앙 통제 방식을 과감히 철폐하고, 가족 단위의 경영 책임제인 '가정연산승포책임제(家庭聯産承包責任制)' 일명 '가족책임제'의 도입을 적극 권장했다. 개인과 각 가정으로 하여금 경작하는 땅에 대해 책임지게 했다. 어떤 농작물을 재배할 것인지에 대해 개별 농민이 결정하게 했다. 사실 가정연산승포책임제는 당초 정부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집단농업에 반발해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실험한 결과를 정부가 수용·권장한 것이었다.
1978년 안후이(安徽)성 펑양현 샤오강촌의 18가구 농민들이 비밀리에 토지를 분할해 개별 경작하기로 합의한 것이 농업개혁의 출발점이 됐다. 이들은 "생산량을 늘리면 개인이 갖고, 감소하면 개인이 책임진다"는 원칙으로 사실상 집단 농업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샤오강촌의 실험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운 좋게도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개혁에 목말라 있던 덩샤오핑의 리더십이 18가구 농민의 실험 결과를 적극 수용해 전국에 확대 적용했다. 1979년 샤오강촌의 식량 생산량은 전년 대비 6배나 증가했고, 농민들의 소득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1982년까지 가정연산승포책임제는 전국 농촌 지역의 99%에 도입됐다. 사회주의 집단농장이 사라지고 전국 농촌에 농민 가족 각각이 농업 경영과 관련해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 결과로, 중국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식량 부족으로 인민이 굶어 죽는 일이 사라졌다.
가정연산승포책임제의 도입과 함께 농산물 가격정책도 개혁됐다. 정부는 곡물 수매가격을 20% 인상하고, 초과 생산분에 대해서는 50% 프리미엄을 지급했다. 또한 농민들이 잉여 농산물을 자유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했다. 농업개혁 성과는 통계로도 명확히 드러났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농업 총생산량은 연평균 7.7% 증가했고, 농민의 1인당 순소득은 같은 기간 15.2% 증가했다. 특히 식량 생산량은 1978년 3억 485만t에서 1984년 4억 731만t으로 38.5% 증가해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
농업개혁의 성공에 힘입어, 덩샤오핑은 공업 부문의 개혁에 착수했다. 국유기업 개혁이 그 핵심이었는데, 이는 농업개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였다. 초기 국유기업 개혁은 기업의 자율권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1979년부터 시작된 '경영관리책임제'는 기업에 생산계획 수립, 원자재 조달, 제품 판매 등에서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했다. 또한 계획 목표를 초과 달성한 기업에는 그 이익의 일부를 기업이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이윤 유보제'라고 불렸는데, 기업의 투자 재원 확보와 근로자 인센티브 제공에 활용됐다.
1983년부터는 '리가세(利改稅)' 정책이 도입됐다. 이는 과거 국유기업이 벌어들인 이윤을 국가에 상납하던 방식을 세금 납부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이윤은 기업이 자체적으로 유보해 재투자하거나 직원 복지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윤 상납 방식은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내도 결국 국가가 가져가기 때문에 기업의 자율성을 저해하고 생산성 향상 동기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리가세는 기업의 자율성을 높였고, 생산성 향상과 효율적인 경영을 추구할 동기를 부여했고, 재정수입의 확대와 안정화에 기여했다.
국유기업 개혁과 함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시장친화적 향진기업(鄕鎭企業)의 적극적 육성이었다. 향진기업이란 중국의 향(鄕·township)과 진(鎭·village) 단위에서 설립된 소규모 지방 기업을 의미한다. 향진기업은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농촌 지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비국유(非國有)기업을 총칭했다. 주로 농민들의 자본과 노동력을 기반으로 향이나 진 정부, 개인, 또는 다양한 합작 형태로 설립, 운영됐다. 향진기업은 중앙정부의 엄격한 계획 통제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과 판매를 결정할 수 있었고, 시장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향진기업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가 성장하는 데 국유기업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중국 전체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농촌에서 발생한 막대한 잉여노동력을 흡수해 농민들의 소득 증대에 기여함으로써 도시로의 급격한 인구이동을 완화하고, 농촌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향진기업의 성장은 농민들의 비농업 소득을 크게 증가시켜 농촌과 도시 간의 소득격차를 완화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으며, 농촌의 공업화와 소도시의 발전을 촉진했다. 1978년 1524만 명이던 향진기업 취업자는 1989년 9365만 명으로 6배 이상 증가했고, 총생산액도 같은 기간 493억 위안에서 8487억 위안으로 17배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경공업과 수출 가공업에 특화해 중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의 일환으로 맥도날드가 1990년 9월 25일 선전에 중국 최초 매장을 개점했다. Gettyimage
공업 육성 위해 단행한 미국과의 수교농업개혁 이후 다음 단계는 공업의 육성이었다. 하지만 이를 내부적으로 추진할 생산수단이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이를 서방 국가에서 들여오기로 하고, 그 첫 단계로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수교를 전격으로 단행했다. 미국과 수교한 후에 덩샤오핑은 자신이 구상한 경제개발 모델을 시험할 '경제특구(Special Economic Zone·SEZ)'를 지정했다. 1980년에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샤먼(厦門), 산터우(汕頭) 등 4곳에 경제특구를 만들었다. 경제특구는 사회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드시 개혁해야만 하는 곳으로, 개혁과 개방에 실패해도 국가 전체에 큰 피해가 없는 곳을 지정했다. 이들 경제특구는 모두 중국 남동쪽 해안가에 있어 물자 유통과 수송이 편리했다. 이러한 곳에 경제특구를 지정한 것은 자본주의의 영향을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경제특구의 설립은 중국이 세계경제와 통합되고 경제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들 경제특구에는 특별한 정책이 적용돼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고, 세금 혜택이 주어졌으며, 행정 절차도 대폭 간소화됐다. 경제특구는 중국의 대외 개방정책을 실험하는 '실험실' 역할을 했다. 특히 선전 특구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1979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이었던 선전은 1990년에는 인구 100만 명의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했다. 선전의 국내총생산은 1980년 2.7억 위안에서 1990년 171.7억 위안으로 63배 증가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경제특구의 성공에 힘입어 1984년에는 14개 '연해개방도시'가 추가로 지정됐다. 다롄(大連), 친황다오(秦皇島), 톈진(天津), 옌타이(烟臺), 칭다오(青島), 롄윈강(連雲港), 난퉁(南通),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원저우(温州), 푸저우(福州), 광저우(廣州), 잔장(湛江), 베이하이(北海) 등이 그 대상이었다. 다음 해에는 창정(長江) 삼각주, 주장(珠江) 삼각주 등을 개방했다. 1986년에 산둥(山東)과 랴오둥(遼東) 반도를 개방했고, 1988년에는 하이난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성(省)으로 승격시켰으며, 1990년에 상하이 푸둥(浦東) 지구를 개방했다.
대외 개방의 효과는 무역 통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국의 대외무역 총액은 1978년 206억 달러에서 1989년 1116억 달러로 5.4배 증가했다. 특히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치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79년 처음 외국인 투자가 허용된 이후 1980~90년대 경제특구별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는 매년 연평균 선전 30억 달러, 주하이 5억 달러, 샤먼 10억 달러, 산터우 4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의 나아갈 길을 다시 밝힌 남순강화덩샤오핑은 1989년 11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중국의 실권자 자리에서 퇴임했다. 이때 그는 85세 고령이었다. 덩샤오핑이 실권자 자리에서 물러난 주된 이유는, 퇴임 5개월 전에 일어난 톈안먼 사태에 대한 책임, 권력 이양 및 집단지도체제 확립, 고령에 따른 은퇴 등이었다. 톈안먼 시위 학생들이 제출한 7개 요구 사항에는 덩샤오핑의 사퇴 요구나 비난이 없었으나, 국제적인 큰 비난을 막고 국내 정치 불안정을 막기 위해 덩샤오핑은 새로운 지도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용퇴하기로 결심했다. 마오쩌둥 시대의 1인 독재체제를 경험한 덩샤오핑으로서는, 자신의 용퇴를 통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고, 후임 지도자들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장기적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국은 심각한 내·외부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보수파의 비판이 거세졌다. 덩샤오핑이 추진해 온 시장경제적 개혁·개방은 정체 상태에 빠졌고, 중국 경제는 활력을 잃어갔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중국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주의의 모태인 소련의 해체는 중국에 정신적 충격이자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이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을 재확립하기 위해 직접 나설 필요성을 느꼈다.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이 갈망하는 인권과 민주화보다는, 확고한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 기강을 확립해 중국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포기할 수 없었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지난 14년 동안 애써 온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로서 그는 세 번이나 자아비판을 당하는 치욕을 겪은 적도 있지만, 그는 바로 그 영역에서 같은 방식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비록 공식 직책이 없이 평당원에 불과했지만, 중국공산당의 최고 실권자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88세의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武漢),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순방하면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이를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자성사(姓資姓社·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비롯한 이념 논쟁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개혁·개방 노선을 강화하고, 생산을 증대하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 중국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은 중국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제시한 전략의 28자 방침은 냉정관찰(冷静觀察), 온주진각(稳住陣脚), 침착응부(浸着應付), 도광양회(韬光養晦), 절불칭패(絶不稱霸), 결부당두(決不當頭), 유소작위(有所作爲)를 말한다. 28자 방침은 중국이 대외관계에서 국익이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할 일을 하되, 전반적으로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서 주장한 것 중 냉정한 관찰(냉정관찰)은 중국이 어떤 입장을 내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에 국제 정세가 어떻게 형성됐고 변화돼 가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내부 질서와 역량을 공고히 하고(온주진각), 중국의 국력과 이익을 고려해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며(침착응부),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내부의 실력을 기르면서(도광양회), 절대로 패권을 칭하지 않으며(절불칭패), 절대로 앞에 나서서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말며(결부당두), 꼭 해야만 하는 일은 한다(유소작위)는 것이다. 이들 28자 방침 중에서 도광양회와 유소작위가 중국의 국제 정세에 대한 방침을 가장 잘 나타낸다.
빛나는 두 업적, 굶주림 극복과 빈곤 해소 연설의 핵심 내용은 개혁·개방 노선의 재확인, 성사성자 논쟁의 종식, 선전 특구의 역할 강조 등이다. 남순강화를 통해 정치적 반전을 이뤄냈고, 개혁·개방을 다시 점화함에 따라 중국 경제가 활력을 회복했다. 권력에서 내려온 지 3년이 지난 시점에 공산당 평당원인 덩샤오핑이 행한 남순강화는 중국이 1990년대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이념 논쟁을 종식하고 경제발전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독특한 모델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시진핑(習近平)의 패착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의 7개 표어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한 데서 기인한다.
군중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 덩샤오핑 모습. Gettyimage
덩샤오핑은 키 157cm의 작은 체구로 거대한 중국을 통치하면서 중국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덩샤오핑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살아나기에 '부다오웽(不倒翁)' '오뚜기', 키가 작기에 '시아오핑저(小甁子)' '작은 거인(小巨人)', 중국에 천지개벽을 가져왔기에 '개혁의 아버지', 강력하고 단호한 리더십 스타일을 반영해 '철의 사령관(鋼鐵司令)'으로 불렸다.
중국 역사에 재와 덕을 겸비한 인재들이 차고 넘치지만, 부국안민의 관점에서 가장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다. 제나라 환공을 춘추시대 첫 패자로 만들어 제갈량이 자신의 사표로 삼았고 사마천이 극찬했던 관중(管仲),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대당(大唐) 성당(盛唐) 시대를 연 중국 역대 최고의 성군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그리고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해 현대 중국을 천지개벽시킨 덩샤오핑이다. 중국을 G2로 부상시킨 업적이 외관상 더 큰 위업으로 보일지 모르나, 덩샤오핑의 실제 치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두 지표, 즉 식량자급률과 빈곤 해소를 살펴보면 확실히 와닿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중국 정부는 농업 집단화 정책을 통해 식량 생산을 늘리려 했지만, 오히려 대기근이 발생해 인민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농업개혁에서 농민에게 경작권을 부여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함으로써 식량 생산량이 크게 증가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식량 자급이 가능해졌다.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경작지 감소, 소득 증대에 따른 육류 소비 증가로 인한 사료용 곡물 수요 급증 등의 이유로 최근엔 다시 식량 자급률이 하락하는 추세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 이후 4100년의 중국의 긴 역사에서 특정 시대, 특정 왕조나 제후국에서 식량 자급률이 높았던 사례는 있었겠지만, 중국 전체로 인민 모두의 식량 자급이 가능해진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중 농업혁명의 결과다. 중국 정부는 2020년 중국 전체로 빈곤 인구가 9899만 명이라 발표한 바 있다. 2025년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14억1000만 인구 가운데 빈곤층은 전체의 약 3% 수준으로 대폭 축소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의 빈곤 해소 또한 덩샤오핑의 1978년 개혁·개방에서 비롯됐다. 덩샤오핑은 중국 4100년 역사에서 당시 10억여 명에 달했던 모든 인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지도자였다.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덩샤오핑은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중국 선전의 유명한 덩샤오핑 대형 초상화. 선전은 중국 최초의 완전 계획도시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기에 개발을 시작해 1980~90년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수십만 농민이 살던 농촌에서 현재 18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로 변모했다. Gettyimage
형용모순(形容矛盾)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덩샤오핑은 유토피아나 구세주가 있는 낙원이 아니라 부유하고 강력한 중국을 만들기를 원했다. 덩은 민족주의자였고, 그에게 공산주의와 공산당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였다. 덩은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나는 가난을 퍼뜨릴 수도, 부를 퍼뜨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중국 인민의 선택을 강요했다.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골수 공산주의자들이 '성자성사(姓資姓社·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논쟁으로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에 시비를 걸 때마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를 강조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덩샤오핑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고 칭송되고 있는 점이다. 그는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경제 운영 방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모두 경제의 수단이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이러한 이론적 혁신은 후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중국 특유의 경제모델로 또는 표어로 승화됐다.
덩샤오핑의 조어(造語)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말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맞는 조어라면 네모난 원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형용모순(形容矛盾)이다. 형용모순은 상반된 어휘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수사법이다. 덩샤오핑이 추진한 정책들의 내용과 본질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였지 결코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물론 '사회주의 지시(계획)경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조어는 10억 명이 넘는 중국 인민의 삶을 다루는 경제정책의 엄중한 핵심 표상(表象)이고 구호다. 그 구호가 결과적으로 내용이 모순되거나 불분명하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권과 선택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하면서 경제주체(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쟁을 유도·촉진하는 경제체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사유재산권과 선택의 자유, 경쟁 원리를 적극 수용했다. 지난 40여 년간 중국 경제는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였지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중국의 특수성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에 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를 유지하며 모든 것이 당의 통제하에 있고, 모든 것이 국가 우위 체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가 없음은 물론 사유재산권과 경제적 자유가 공익을 빌미로 필요하면 언제든 제한된다.
덩샤오핑을 포함, 중국의 모든 보수 정치가는 공산주의자이고 공산당 당원이다. 그들은 헌법에 명시된 사회주의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된다.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국가 우위 체제 일당 독재체제를 수용하는 공산주의자인 한, 그들에게 '자본주의'란 말 자체가 금기어가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성취한 경제 기적을 생각하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의 본질은 당연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라 칭해야 함이 마땅하다. 결단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 칭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 세계 경제대국이 된 것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새로이 만들어 경제대국을 만든 양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약 중국의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가 무너지면, 그 즉시 중국의 표어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바뀌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그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최광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석좌교수·前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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